민족사의 재발견/겨례의 지도자

박정희대통령 18년, 긍정해야한다.

화이트보스 2009. 12. 2. 10:39

박정희대통령 18년, 긍정해야한다.

 

김일영(성균관대학 교수)

 

 

1.최근의 사관논쟁

새로 출범한 문민정부가 기존 권위주의 체제와의 단절을 강조하고 자신을 3·1운동 -임시정부 -4·19혁명 -5·18광주민주화투쟁 -6월민주항쟁의 연장선상에 놓자, 일부 언론이 보수적인 기득권층의 암묵적 동조를 등에 업고 공개적인 반격에 나섬으로써 역사적 경험에 대한 가치판단 논쟁은 표면화되었다. 양시 반론의 요지는 역사에 있어서 생략이란 있을수 없으므로 대한민국의 정통성은 독립운동-반공에 기초한 국가건설과 보위(이승만)-경제발전(박정희와 전두환)-민주화(노태우와 김영삼)로 이어지고 있다고 봐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보수 기득권층의 공세에 대응함에 있어 무조건 과거를 부정하고 단죄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이점은 특히 박정희 체제 18년의 경우에 더욱 해당된다. 필자는 박정희 체제의 위상을 한국 산업화 과정의 연장선상에서 정당하게 자리매김하고 그에 입각해 그의 집권 18년을 평가해 줄 것을 제안한다. 박정희 체제는 산업화 초기 단계라는 시점과 분리시켜 평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2.가치판단의 준거점 : 희생이 수반된 선택의 문제

최근 들어 박정희가 쿠데타를 통해 집권하긴 했지만 국민을 절대 빈곤으로부터 구하고 경제발전을 시켰다는 점을 평가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박정희 시대에 추구된 경제발전전략-외자의존·수출지향·국가주도-이라든지 경제성장을 위해 정치발전과 통일을 잠시 접어두자고한 「방법론적 유보」론에 대해서도 당시 시대 여건에서 효율성 추구를 위해 불가피한 것이었다고 주장되고 있다(조갑제, 김정수, 이석제, 김성진등). 

 

그러나 이런 결과론적 논법에 대한 반발 또한 만만치 않다. 그들은 박정희 체제가지닌 태생적한계-친일경력이라든지 쿠데타를 통한 집권 등-로부터 그의 정당성을 문제삼으면서 당시의 발전전략이 초래한 대외종속성·불균형성·반민중성과 방법론적 우회전략이 지닌 반민주성과 반민족성(반통일성)을 지적하고 있다. 따라서 그들은 삶의 질이란 면에서 박정희 시대는 퇴행의 시기였다고 주장하고 있다(김대환, 손호철, 고성국등). 

 

이 두 가지 대립하는 논리에 대한 태도에는 산업화와 민주화라는 두 가지 가치기준을 동시에 가지고 이 면에서는 긍정적인데 저 면에서는 긍정적인데 저면에서는 부정적이라는 식의 절충주의적인 양가론과 이 기준에서는 이것이 옳고 저 기준에서는 저것이 맞다는 식의 상대주의적인 양시론 등의 태도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렇듯 가치 중립적 입장에만 설 것이 아니라 선택의 조건을 고려하고 그 토대 위에서 가치를 선택, 그에 입각해 연구를 진행시켜야 하는 것도 사회과학의 영역이다. 

 

이때 문제가 되는 것은 선택을 위한 결단을 내림에 있어 고려해야 할 조건들의 구체적 내용이다. 필자는 먼저 다음 두 가지, 즉 시간의 흐름과 각 시점에서의 사회적 및 구조적 여건을 고려할 것을 제안한다. 이 때 시간의 흐름이나 시점과 관련하여 꼭 고려해야 하는 것이  산업화의 단계(성숙정도)이다. 

 

 

3.민주주의와 경제발전은 양립가능한가 ?

산업화에 민주화를 동시 추진, 성공한 예는 없다

이론적 차원에서 민주주의와 경제발전이 양립하지 못할 이유는 없으며 실제로 산업화의 성숙단계에 도달한 대부분의 서구국가들에서 그것은 경험적으로 실증되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산업화의 초기단계에서도이들 국가들이 민주화와 산업화를 병행추진하거나 「선민주화, 후산업화」의길을 걷는 것이 가능했겠는가? 

 

이에 대해 선발 산업화국가들인 영국과 프랑스, 미국 등이 정치혁명(시민혁명)과 경제혁명(산업혁명)을 순차적으로 겪었다는 점에 주목하면서 그것이 가능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리고 더 나아가 이러한 앵글로 아메리카적 경험을 보편적 「모델」로 삼아 많은 후속국가들에 대해서도 그 기준을 그대로 적용하는 단선적 발전개념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영국이 민주화와 산업화를 병행 내지는 순차적으로 추진했다는 것은 사실에 부합되지 않는 편견이거나 도그마이다. 19세기 영국에서 참정권의 범위가 얼마나 제한적이었고 노동운동에 대한 탄압이 얼마나 극심했는지 등을 생각해 본다면 이 점은 쉽게 이해될 수 있다. 따라서 영국도 산업화를 어느 정도 성숙시킨 연후에야 민주화로 나아갔다는 점에서 후속 국가들과 다를 바 없다. 

 

이렇듯 산업화 초기 단계에 민주주의에 의거해서 경제를 도약시킨 사례를 찾기는 어렵다. 특히 그 범위를 후발 산업화 국가들과 그 이후에 본격적인 산업화를 추진한 국가들로 한정시킬 경우 그 예는 전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므로 적어도 경험적으로는 산업화 초기 단계에서 권위주의와 자본주의적 경제발전 사이에 「선택적 친화력」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고 권위주의 체제가 반드시 경제발전을 가져 온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제3세계에의 수많은 권위주의 체제 중 경제발전에 성공한 나라가 오히려 예외에 속한다는 사실이 그것을 증명한다. 여기서 국가의 역할과 성격에 주목하게 된다. 국가개입이 자본주의 발전과정과 불가분의 관계였다는 점은 오늘날 많은 학자들에 의해 지지되고 있다. 

 

그러면 무엇이 이러한 국가개입이나 역할에 있어 정도의 차이를 낳는가. 경제발전에서 국가의 역할은 산업화의 시기가 상대적으로 늦을수록 일반적으로 커진다고 할 수 있다. 최근 들어 후발 내지 후후발 산업화과정에서 나타나는 경제적 역할이 큰 국가를 지칭하기 위해 「발전지향형국가」라는 개념이 많이 사용된다. 이러한 발전지향형 국가는 단순한 권위주의 체제와는 차별성을 지닌다.

 

역사적으로 보아 권위주의 하에서 경제발전이 일어날 수 있었던 경우는 국가가 사회 내의 제계급(지배 및 피지배계급 모두)으로부터 상당히 자율적이면서도(그 국가가) 발전을 도모하기에 적합한 정책적 및 제도적 능력을 갖추었을 때뿐이다. 이런 특징을 갖춘 국가를 본 논문에서는 「발전지향적」이라고 지칭하고 싶다. 

 

그러므로 이제까지의 경험에서 관찰될 수 있는 권위주의적 발전의 예는 모두 그 국가가 「발전지향적 권위주의」체제였기 때문이지 단순하너 권위주의 체제였기 때문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산업화 초기단계에서 발전지향적 권위주의 체제와 자본주의적 경제발전 사이에는 「선택적 친화력」이 있다는 명제를 설정할 수 있을 것이다. 

 

 

1960년대의 선산업화 정책은 정당했다

이렇게 볼 때 산업화의 초기 단계인 1960∼70년대, 특히 그 초두인 1960년대 전반의 한국 상황에서 민주주의와 경제발전이란 두 가치는 병행추진이 어려운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때 박정희 체제의 가치 선택은 발전이었고 필자가 보기에 그 선택은 현실성이 있었다. 그 이유는 다음 두 가지다. 

 

하나는 이미 살펴보았듯이 산업화 초기단계에서 민주를 선택하여 발전을 성공적으로 이룬 선례가 없다는 경험적 근거 때문이다. 또 하나는 민주라는 가치가 중요하긴 하지만 그것이 만약 굶주림이나 절대빈곤과 배타적 선택관계에 있다면 생각을 달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빵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민주는 그 의미가 지탱되기 어렵다. 따라서 필자는 적어도 산업화의 초기 단계에서는 민주보다 발전을 선택하는 것은 의미있다고 본다. 한국에서 이런 산업화가 본격적으로 시발된 것이 바로 박정희 집권하의 1960∼70년대이다. 

 

문제는 여기서 발생한 여러 가지 부작용들의 원인을 과연 어디로 귀속시켜야 하는가라는 문제이다. 흔히 주장하듯 박정희 체제 탓인가 아니면 산업화의 불가피한 부산물인가. 필자는 양자가 공유해야 할 문제라고 생각한다. 당시가 산업화 초기단계였기 때문에 발생할 수밖에 없었던 문제들-예컨대 저임금·장시간노동·정치체제의 비민주성 등-이 있었지만 그것이 당시 한국이 추구했던 독특한 압축형 산업 발전전략으로 인해 가중되었고 그 와중에서 자원의 왜곡배분이나 1인 장기접권과 같은 현상도 았다고 볼 수 있다. 

 

 

4. 박정희 체제 하에서 진행된 발전의 동인과 과정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지도력인가, 편승인가

박정희 집권 18년 동안 한국경제가 비약적으로 발전한 원동력이 무엇인가. 이에 관한 대표적 두 견해가 「리더십」론과「편승」론이다. 

 

전자는 패배감에 젖어 있던 국민들에게 박정희의 탁월한 리더십으로 자신감을 불어 넣어 경제발전을 이루었다는 논리이고 후자는 국내외적으로 이미 갖추어져 있던 경제발전 조건 (미국의 아시아 정책변화, 이미 마련되어 있던 경제개발 계획안, 양질의 노동력, 농지개혁의 성과 등)에 박정희가 편승했을 뿐이라는 주장이다. 따라서 편승론은 박정희 아닌 다른 사람이 집권했어도 그 정도의 성과는 거두었고 그것도 민주적인 방식으로 성취했을 것으로 본다. 

 

그러나 이러한 논리의 대립은 한국 경제발전의 동인을 박정희 개인이나 구조적 여건 사이에서 양자택일적으로 찾으려는 논쟁으로, 다분히 저널리스틱하고 정치적의도가 함유된 것이다. 따라서 역사적 조건과 인간 행위의 구체적 내용을 문제시하는 것이 필요하다.

 

동아시아 신흥공업국들의 경제발전에 대해서는 많은 이론적 성과가 있다. 그 중 국제적 환경을 경직된 결정적 구조가 아니라 일련의 유동적인 제약들로 보아야 하며, 그 안에서 국가들은 학습하고 그들의 활동영역을 확장시킬 수 있는 것으로 파악해야 한다는 제도론자들의 생각이 주목된다. 필자는 여기에서 세계체제와 국가, 그리고 사회(내 제 계급) 간의 상호 작용이 체계적으로 분석되기 위해서는 3자 사이의 매개항 역할을 하고있는 국가를 개념적으로 보다 정교화시킬 필요가 있다고 보고 국가의 상대적 자율성, 능력, 그리고 강도(strength)개념을 도입할 것을 제안한다. 

 

국가의 상대적 자율성이란 「국가가 지배계급과의 관계에서 그들의 의사에 반해 목표를 세우고 정책을 입안할 수 있는 정도」인 데 반해, 국가의 강도는「국가가 피지배계급과의 관계에서 억압과 동의 중 어떤 수단에 더 많이 의존하는가」에 따라 강성과 약성으로 구분되는 개념이다. 그리고 국가 능력은 「국가의 정책 집행능력」으로서 그것의 크기는 국가가 제도적으로 어느 정도 정비되어 있고 또 어떤 목표를 위해 그것을 재정비 할 수 있는가, 국가의 정책결정구조가 어느 정도 응집적인가, 국가가 보유하고 있는 각종 자원은 어느 정도인가 등의 요인에 의해 결정된다.

 

 

60년대의 한국은 국가 엘리트에 의한 발전지향적 연성 권위주의 체제

5·16을 통해 등장한 군부는 발전, 즉 조국 근대화를 목표로정했다. 지지기반의 확충이 아쉬운 군부는 미국의 케네디정부가 권하는 안정화보다는 도시 토목사업을 통한 재정자금의 살포(실업문제의 해결), 중소기업자금·영농자금의 방출, 농어촌 고리채 정리, 농산물 가격 유지제등과 같은 민중주의적 정책을 선호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이들이 62년1월 공포한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내용도 처음에는 농업육성을 통해 국내시장을 확대하고 중화학 공업을 중심으로 수입 대체사업화를 추진함으로써 자립경제를 지향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62∼64년사이, 인플레이션의 격화와 외환파동, 미국의 안정화 압력 등 국내외적인 어려움에 직면한 쿠데타세력은 기존의 개발계획의 내용을 보다 수출지향적인 것으로 수정하고 긴축정책을 통해 인플레이션을 억제시키는 조치로 돌아선다. 이러한 정책전환을 성공시키기 위해 박정권은 외자의존정책 및 노동집약적 경공업 부문을 중심으로 한 수출지향 정책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박정희 체제는 환율제도개혁(평가절하), 외자도입법 제정, 수출 진흥확대회의 설치, 수출금융 설치, 금리인상 등의 정책적·제도적 조치를 취하였다. 또 당시 외교적으로 한일관계정상화와 베트남 파병이 이루어지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그러나 국가주도적 발전전략을 위해 박정희 체제가 취한 가장 중요한 조치는 은행을 국가관리 하에 둠으로써 자본에 대한 통제권을 확보하는 것이었는데, 이 체제가 이런 혁명적 정책을 실시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중심세력이 정상적인 정치과정이 아니라 쿠데타로 등장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쿠데타는 군부체제의 태생의 한계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그것이 국가주도의 발전지향적 정책을 펴나갈 수 있을 정도로 커다란 자율성 및 강도를 확보할 수 있게 해주는 기반 이기도 했다. 이상의 논의를 근거로 할 때 이 시기의 국가는 자율성, 강도, 그리고 능력면에서 모두 크다는 점에서 「발전지향적 권위주의 체제(DAR(SE))」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1960년대에는 아직 절차적 민주주의의 기본 원칙이 어느 정도 지켜지고 있었다는 점에서 특히 「발전지향적 연성 권위주의 체제(soft DAR(SE))」로 규정하는 것이 좋겠다.

 

 

한국산업화의 성숙, 국제적 위상 제고에는 도움 준 유신체제

그런데 1960년대 말이 되면서 노동집약적 경공업제품 위주의 수출 경제는 한계를 드러내기 시작했고 노동 및 빈민문제, 1971년 양대 선거에서의 야당 선전, 안보적 불안감등이 겹치면서 정책과 제도를 변경시키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 주된 내용은 권위주의의 강화(유신)와 중화학공업화의 추진이었다. 그 방법은 외자의존, 그리고 청와대 주도였다. 이 정책은 많은 자원의 비효율적 배분과 국민적 희생을 낳기도 했지만 세계체제 내에서의 한국의 위상이 제고되고 산업화의 성숙도를 높이는 토대를 마련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면 유신체제의 수립과 중화학 공업화 정책은 국가와 사회 간의 관계를 어떻게 변모시켰는가? 당시 유명무실해진 의회와 정당을 대신해 정치를 주물렀던 곳이 바로 청와대 비서실과 중앙정보부였으며 추진하는 국가적 사업조차 관계 부처를 제쳐두고 이들이 직접 관장함으로써 국가가 우위에 선 정경유착을 가져오게 된다. 이렇게 볼 때 유신체제는 1960년대에도 이미 상대적 자율성이 크고 강성이었으며 능력도 크던 국가를 세가지 면 모두에서 더욱 강화시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절차적 민주주의도 무시되고 기본권조차 유린되던 시기였다는 점에서 유신체제는 이전의 연성에 대비되는 「발전지향적 경성 권위주의 체제(hard DAR(SE))」라고 명명할 수 있을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보았듯이 박정희 체제 18년 동안 한국이 이룬 발전은 어느 한 사람의 리더십 때문이거나 또는 모든 여건이 다 구비되어 있었기 때문만도 아니다. 그것은 세계 체제로부터의 구조적 제약과 역사적으로 형성된 사회적 조건 속에서 국가가 한편으로는 적절한 전략적 산업정책을 수립·집행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것의 추진에 필요한제도들을 갖추면서 스스로를 강력한 발전지향적 권위주의 체제로 변모시킨 결과로 보아야 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국가는 스스로를 구조적으로 조건지었던 세계체제 내에서의 위상을 변화시키고 사회의 내부구조도 변형시켰던 것이다. 

 

 

5. 발전지향적 권위주의 체제의 변증법적 자기부정
산업화를 일정수준 이상으로 끌어 올린 국가들만이 민주주의로 갔거나 이행 중에 있다는 것이 경험적으로 확인되는 사실이라고 할 때 우리의 경우 그 시점을 언제로 잡을 것인가가 문제가 된다. 이것은 발전지향적 권위주의 체제 하에서 추진되던 발전 모델이 한계를 드러내는 시점을 찾는 문제라는 점에서 보다 객관적인 성격을 지닌 문제이기도 하지만, 그것과 무관하게 인간들 간의 세력관계나 주관적 의지에 의해 인위적으로 축소 또는 연장될 수도 있다는 점에서 보다 주체성이 개입되는 문제이다. 

 

필자는 1980년을 그 시점으로 보고자 한다. 1970년대까지의 발전주의적 권위주의 체제가 추진한 성장모델의 요체인 외자의존, 수출지향, 국가주도, 그리고 개발독재 중 앞의 두 가지는 내용상의 변화만 있을 뿐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요소들이지만 국가주도는 1980년대 초부터 시작되어 80년대 말 이후 그 해제가 가속화되고 있는 요소이기 때문이다. 

 

전두환 체제는 경제부문에서는 이런 국가주도성의 완화조치를 취했으나 정치는 여전히 개발독재적인 성격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리하여 그간의 「희생적 격차」를 해소하고 새로운 발전모델을 모색했어야 하는 시기에 시효만료된 모델을 인위적으로 연장하려 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