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나라의 기병이 돌진해옵니다. 고구려군은 커다란 육각방패로 진형을 갖추고는 그 뒤에서 궁병이 화살을 퍼붓습니다. 적도 만만치 않군요. 기병과 말을 온통 찰갑으로 두른 적의 중장기병들이 아군의 화살 세례를 뚫고서 본진에 다가옵니다. 아군의 철기군은 적의 기병을 상대하지 않고 바로 적의 본진을 기습하러 떠났습니다. 방패부대의 가슴이 콩알만해집니다. 맹렬하게 돌진해오는 적의 중장기병을 오직 방패 하나로 막아내야 하기 때문입니다.
중장기병의 위병은 그야말로 대단합니다. 마치 코끼리떼가 몰려오듯이 지축이 흔들리고 흙먼지를 일으키며 몰려오는 중장기병은 보병에게 그야말로 공포의 대상입니다. 하지만, 두 눈 질끈 감고는 방패 손잡이를 잡고는 옆의 동료들과 몸을 밀착시키며 방패의 숲을 쌓습니다. 군령은 지엄한 법이니까요.

<위풍당당하게 행진하는 고구려의 극병. 乙자 모양의 가지날이 인상적이다.
옆구리에는 육각 방패를 끼고 있다. 일반 창병이나 보병은 대개 작고 둥근 방패를 든다. 안악 3호분>
드디어 적의 기병이 코앞까지 다가왔습니다. 아군의 방패를 짓밟으며 적의 기병 몇 기가 진형을 무너뜨리며 넘어오고 있군요. 어느 한 곳이라도 터지면 전체 둑이 무너지듯이 진법도 마찬가지입니다. 적의 기병이 아군의 진형을 무너뜨리면, 그 다음에는 적의 본진이 물밀듯이 밀려올 게 뻔합니다. 건곤일척의 순간, 극병이 출동합니다.
아군의 방패부대에 막혀 속도가 한층 떨어진 적의 기병을 에워싸고는 3m에 이르는 긴 갈고리 창을 던져 걸어서 땅으로 떨어뜨립니다. 땅에 떨어진 기병은 말 그대로 물에 빠진 생쥐입니다. 허둥지둥 스스로 일어서기도 힘겨워 보입니다. 부월(도끼)을 든 보병이 나섭니다. 땅에 떨어진 적의 기병이 채 일어나기도 전에 도끼병들이 우르르 달려들어 적을 내리칩니다. 전신 갑옷으로 무장한 중장기병이지만 보병의 도끼 앞에는 맥을 못씁니다. 온몸의 뼈가 으스러져 절명하고 맙니다. 기병의 예봉이 꺾인 당나라군은 마침내 퇴각의 나팔을 붑니다.

<적과 기병전을 벌이고 있는 고구려의 중장기병)
고구려와 당나라의 전투를 한 번 상상해봤습니다. 이번 전투의 주인공은 극(戟)입니다. 역사극을 보면 이따금씩 등장하는 무기이지요. 생김새가 아주 독특하기 때문에 한번 보면 쉽사리 잊을 수 없는 병장기입니다. 비록 후대에는 거의 사용되지는 않았지만 전국시대 이전부터 당나라 시대까지 광범위하게 사용되었던, 한때는 전장을 호령하였던 주요 병장기 중의 하나입니다. 음, 뭐랄까 고전적인 창 종류 중의 하나라고 보면 되겠군요.
극은 모(矛)와 과(戈)를 합한 모양입니다. 즉 창에 갈고리를 단 형태이지요. 모는 긴 자루에 뾰족하고 폭이 넓은 양날의 창날을 부착한 병기로 흔히들 창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과는 긴 자루에 청동제 날을 수직으로 부착한 병기로 전차전에서 많이 사용되었던 무기입니다. 진시황 이전 상, 주(기원전 16세기~기원전 3세기)나라 때 군대의 주력은 전차부대였습니다. 이러한 전차전에서는 창으로 상대를 찌르는 것보다는 과를 사용하여 상대를 걸어 당겨 넘어뜨리는 것이 훨씬 효과적인 공격수단이었지요.

<가장 일반적인 극의 형태>
극은 모의 찌르기 공격과 과의 걸어 당기는 능력을 합한 것입니다. 이러한 다재다능한 기능 때문에 극은 전차병과 보병, 그리고 기병들에게서 모두 사랑을 받았습니다. 양손으로 사용하는 장극(長戟)과 한손으로 사용하는 수극(手戟)이 있습니다. 길이가 짧은 수극을 사용할 적엔 다른 한 손엔 방패를 들었겠지요.
느닷없이 극 이야기를 하게 된 것은 얼마전 케이블,Tv에서 다시 보게 된 영화 ‘적벽대전’ 때문입니다. 적벽대전 1편이었는데 여기서 극이 아주 드라마틱하게 등장합니다. 제갈량과 주유가 펼친 거북이 진법에 조조의 선봉대인 기병3000명이 갇히게 되는 장면입니다. 몇 개의 소규모 부대로 나뉜 조조의 기병대를 주유와 유비의 연합군이 차례대로 각개격파하지요. 여기서 관우 장비 조자룡 등 유비의 맹장들에 못지않게 조조군을 격파하는 데 큰 수훈을 세운 부대가 등장합니다. 바로 극으로 무장한 무명소졸들이지요. 조조군을 에워싼 방패들이 스르르 열리고 땅바닥에 낮게 깔린 극들이 튀어나와 조조군의 발목을 걸어 당기는 장면입니다. 또한 조조의 기병들을 연합군의 보병들이 에워싸고는 극으로 낚아채는 모습도 나왔지요.
이처럼 극은 보병이 기병이나 전차병을 상대하는 데 매우 유용한 무기입니다.

<영화 적벽대전의 한 장면. 조조의 선봉 기병대는 이 진형에 갇혀 각개격파 당한다.>
극을 잘 다루었던 인물로는 조조의 용장이었던 전위를 들 수 있습니다. 전위는 전쟁터에서 항상 두 자루의 극을 사용하였는데 그 무게가 두 자루를 합하여 80근(약 18kg)이었다고 합니다. 그가 사용했던 극은 물론 수극이었겠지요. 그렇다면 두 자루 극을 든 쌍극의 달인이었다는 얘기가 되는군요. 극의 변형된 형태로 방천화극도 있습니다. 삼국지 제일의 장수로 손꼽히는 여포가 사용하여 그 위용을 만천하에 떨친 무기이지요.
한반도에서도 삼국시대엔 극이 널리 사용되었습니다. 황해도 안악 3호분을 보면 극을 든 고구려의 용맹한 병사들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고구려의 극은 가지날이 을(乙)자 형태인 것도 특이합니다. 무게는 가볍게 하면서 상대 기병을 낚아채는 효과는 극대화한 것이지요. 또한 극을 든 보병이 영화 ‘적벽대전’에서 보던 것과 유사한 커다란 육각 방패를 들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돌진해오는 적의 기병에 대항하기 위한 것으로 추측됩니다. 즉 영화에서처럼 극병이 적의 기병을 제1선에서 저지하였다는 얘기이지요. 정말이지 용감무쌍한 극병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극병, 화이팅입니다.

<당나라 기병이 착용했던 갑옷. 장갑이 두꺼우면서도 무게는 찰갑에 비해 가볍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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