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미의 유일한 6·25 참전국 콜롬비아 가봤더니
당시 참전 용사들 귀국 후엔 마약조직·좌익게릴라와 싸워
"한국 발전… 우리도 영웅"
6·25 전쟁 발발(勃發)일, 불모(不毛) 고지 전투(3월 9일·Battle of Old Baldy), 금성 전투(10월 23일), 파병 기념일(11월 1일).6·25 전쟁을 잊지 않기 위해 1년에 4번 정부 차원에서 공식 기념행사를 하고, 국방부 중앙에 '한국전쟁 기념 공원'을 만들어 모든 장교가 전사자들을 추모하는 나라가 있다. 남미(南美)의 유일한 6·25 전쟁 참전국가인 콜롬비아다. 콜롬비아 참전용사회 회장인 에르난도 고메즈(Gomez·75)씨는 지난달 26일 수도 보고타의 산등성이에 있는 용사회 건물을 찾아간 기자를 반갑게 맞았다. 그는 "한국에서 기자가 온다고 해서, 어제부터 종일 마음이 설레었다"고 했다. 군데군데 벽돌이 떨어져 나간 건물이지만, 내부엔 6·25 전쟁과 관련한 사진들이 가득했다.
'콜롬비아 대대'는 미군 24사단에 편입돼, 1951년 5월 처음으로 한국 땅을 밟았다. 지구 반대편에서 이름도 처음 듣는 '친구(amigo)의 나라'로 가는 데만, 배로 한 달이 걸렸다. 모두 4차례에 걸쳐 4312명이 파병됐고, 전사자 191명에 부상자는 무려 448명에 달했다. 한국에 갔던 7명 중의 한명은 목숨을 잃거나 다쳤다.
- ▲ 지난달 26일 콜롬비아 보고타의 한국전 참전용사회 건물에 모인 에르난도 고메즈 참전용사회 회장(왼쪽)과 호르헤 곤잘레스 이사(가운데), 페드로 에르난도 사무총장(오른쪽). 이들 70대 노병은 “한국이 이렇게 발전했으니, 우리도 영웅이라고 할 수 있지 않으냐”며 웃었다./보고타=조의준 특파원
노인은 "그렇게 전투가 치열했나요?"라는 질문에 갑자기 눈물을 뚝 떨어뜨렸다. 어느새 인해전술(人海戰術)로 몰려오는 중공군과 백병전으로 맞섰던 '불모지(Old baldy) 전투'의 현장에 선 듯했다. 고메즈 회장은 손을 떨며 "지금 생각해도 너무나 두려워. 그때 겨우 열여덟살이었는데…"라고 했다. 콜롬비아 병사들은 대부분 고교를 갓 졸업한 지원병이었고, 파병 전에 받은 3~4개월의 신병 훈련이 다였다. 그는 "살을 에는 전장의 겨울밤, 중공군의 무시무시한 피리 소리는 야자수 그늘에서 하루를 보내곤 했던 어린 병사들을 완전히 공포로 몰아넣었다"고 했다.
참전용사회의 페드로 에르난도(Hernando·77) 사무총장이 옆에서 거들었다. "우린 짐승처럼 싸웠어요. (불모 고지 전투 당시) 하루에 수십명씩 동료가 실종됐지만, 시신도 찾기 어려웠죠." 에르난도씨도 그때 포탄 파편을 허벅지에 맞았다. 눈물을 훔친 고메즈 회장은 "그래도 후회는 없어요. 한국이 발전한 걸 보면, 우리도 영웅이 아니냐"며 웃음을 지었다.
한국전 참전 부대는 지금도 '콜롬비아 대대'란 이름을 유지한다. 국방장관과 육군 사령관 등이 이곳에서 무더기로 배출돼, 콜롬비아 육군의 최고 엘리트 부대다. 6·25 전쟁 참전 용사들은 다시 콜롬비아로 돌아와 아마존 정글과 안데스 산맥에 은신한 마약 조직, 좌익 게릴라들과 싸웠다.
하지만 시간 앞에서 백전노장들도 '후퇴'를 거듭한다. 참전 용사들의 3분의 2 이상이 이미 숨졌다. 고메즈 회장은 그래도 "집과 땅을 팔아서라도, 마지막 참전용사가 숨지기까지는 이 사무실을 어떻게든 운영하고 싶다"고 말했다.
한국국제협력단(KOICA)은 최근 콜롬비아 내전에서 다친 병사를 위한 전문 재활병원(200병상 규모)을 짓는 사업을 시작했다. KOICA의 송창훈 보고타 사무소장은 "2010년 6·25 전쟁 발발 60주년에 맞춰 시작한 이 프로젝트로, 조금이라도 은혜를 갚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