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 은행잎들이 보도블록에 여기저기 떨어져 있는 장면을 보았습니다.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왠지 모르게 한쪽에서는 슬픈 마음이 듭니다. 은행잎은 왜 이렇게 노란지 그 이유를 알려주세요." 나이 지긋한 50대 여성독자가 전자우편으로 필자에게 보낸 편지내용 가운데 한 대목이다. '왜 은행잎은 이렇게 노랗단 말인가!' 칼럼을 쓰는 나도 역시 동일하게 고민하고 있는 질문이다.
나에게 남은 인생도 저 은행잎과 같은 것인가! 그런데 왜 이렇게 그 떨어지는 잎새의 빛깔은 아름답고도 처연한 느낌을 준단 말인가! 필자도 매일 생로병사를 고민한다. 그렇지만 이 초겨울에 '마지막 잎새'와 맞닥뜨려 보니까 노(老)도 받아들이기 어렵고, 병(病)도 받아들이기 어렵고, 사(死)도 또한 받아들이기 어렵다.
어찌 저 고개와 강물을 넘어간단 말인가!동양의 철인들은 생로병사를 이처럼 못 받아들이는 범부의 생사를 분단생사(分段生死)라고 불렀다. 사전적 의미는 따로 있지만, 생과 사를 서로 떨어진 분단(分段)의 세계로 생각하는 생사관이 '분단생사'이다. 분단생사관에서 보자면 죽음은 엄청난 공포이다.
그 반대가 변역생사(變易生死)이다. 생사가 서로 격절된 세계가 아니고 단지 몸만 바뀌어 변화된 세계라고 보는 생사관이 '변역생사'이다. 생사가 서로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하면 죽음은 죽음이 아니라 하나의 변화라고 생각하게 된다. 동양의 철인들은 생사를 분단이 아닌 변역으로 보았다.
변역생사관의 근거는 사시(四時)의 순환이다. 생로병사는 춘하추동과 같다고 여겼다. 가을이 지나면 겨울이 오고, 겨울이 된다고 모든 게 끝난 것이 아니다. 기어코 다시 봄이 온다. 은행잎이 노란 것은 그 사명과 책임을 다했기 때문이다. 그 잎이 땅에 떨어져야만 다시 새싹이 나올 것 아닌가! 백발이 되지 않으면 흑발도 나올 수 없다. 밤과 낮도 그렇다. 낮이 생이라면 밤은 작은 죽음이다. 밤과 낮은 고정되어 있지 않고 끝없이 변화한다.
이러한 이치는 자연을 들여다보아야만 깨닫게 된다. 자연과 격리되어 인공 구조물에 빠져 사는 삶일수록 노년이 허(虛)하다. 그래서 동양의 식자층들이 대자연의 품속에 자신이 누워 있는 산수화를 그토록 좋아한 것이다.
분단생사(分段生死)와 변역생사(變易生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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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09.12.06 22:00 / 수정 : 2009.12.06 2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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