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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인당 GNP 70달러 시절… 70만달러 원자로는 사치였을까

화이트보스 2010. 1. 10. 09:22

1인당 GNP 70달러 시절… 70만달러 원자로는 사치였을까

입력 : 2010.01.09 03:16 / 수정 : 2010.01.10 02:51

김동섭이 만난 원자력 1호 유학생 윤세원 前 선문대 총장 '폐허 속 희망 심은 이승만을 말하다'
원자력원, 장관급 부처로 만들어 英·美에 200여명 장학생 보내
日 배터리 기술자에게 속아 거액 연구비 사기당하기도

한국전력 컨소시엄이 47조원 규모의 아랍에미리트(UAE) 원전(原電)사업을 수주한 뒤 한전 관계자들이 언급한 인물은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이었다. "그가 없었다면 원전 수출을 꿈꾸는 것은 불가능했다"는 데 모두 공감했다.

본지 12월 31일자 보도

서울대 물리학과 부교수이던 35세 윤세원(사진·尹世元)은 1957년 11월 경무대에 불려갔다. 문교부 기술교육국에 신설된 원자력과장에 임명된 지 한달 만이었다. 대통령이 부처의 일개 과장을 부른다는 건 상상조차 못할 시대였다.

긴장한 그에게 이승만 대통령은 "우리도 원자무기를 만들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그리곤 원자력산업은 원자무기를 만드는 방향으로 추진해야 한다고 말을 이어갔다. 그는 그게 무슨 뜻인지 금세 알아차렸다.

6·25사변이 한창이던 1951년 이 대통령은 원자탄을 만들겠다고 나선 60대 일본인 배터리 기술자에게 속았다. 진해 앞바다 무인도에 기지를 제공하고 거액의 연구비를 줬지만 가짜 실험을 거듭하며 돈을 떼먹은 것이다.

우리 정부가 원자력에 관심을 쏟게 된 것은 1955년 7월 미국과 원자력협정을 가(假)조인하면서다. 원자폭탄을 처음 만든 미국은 소련이 세계 최초로 상업용 원자력발전소를 세우자 우방들과 서둘러 원자력협정 체결에 나선 것이었다.

당시 한국은 원자력 불모지대였다. 원자력을 연구하는 대학도, 교수도, 정부의 담당부처도 없었다. 1955년 교수 출신인 박철재 문교부 기술교육국장이 1개월간 미국 원자력연구소에서 연수했다. 그는 "우리도 원자력을 연구해야겠다"고 불을 지폈다. 원자력에 관심있는 젊은 학자 10여명이 매주 토요일 국방과학연구소에 모였다.

물리학과·화학과·공대를 나온 군 장교들과 교수들이었다. "교재라곤 미군 장교에게서 입수한 '핵공학 서설'이란 책 1권뿐이었어요. 교재를 타자기로 일일이 친 뒤 등사기로 밀어 복사했어요. 그걸로 토론했지요." 초창기 원자력 개발을 주도할 핵심 인물들은 이렇게 독학으로 키워졌다.

한밤에도 불 밝히며 건설 중인 신 고리 3·4호기 공사현장. / 조선일보 DB
미국은 1956년 시카코 인근의 알곤(Argonn)연구소에 국제원자력학교를 만들었다. 여기에 간 외국 학자 중에 서울대 윤세원·김희규 교수가 있었다. 제1기 원자력 유학생으로 선발된 이들은 9개월간 대학에선 원자공학을 배우고, 원자력연구소에선 원자로 실무교육을 받았다. 그 중 제1호 원자력 국비 유학생인 윤 교수는 이 인연으로 초대 문교부 원자력과장이 되었다. "문교부가 원자력 담당부처가 되면서 원자력과를 만들었습니다. 당시 문교부장관과 기술교육국장이 모두 물리학과 교수 출신이었어요. 이 두 분이 저를 미국에 유학을 보내곤 귀국하자마자 과장으로 발령냈습니다."

미국에 간 원자력 유학생이 120여명에 이른다. 이들은 이곳에서 한국 원자력 산업을 어떻게 발전시킬지 꿈을 키웠다.

이런 원자력 연구를 뒷받침한 것은 이 대통령이었다. 문교부에 원자력과가 만들어졌지만 과(課) 단위로는 해결할 수 없는 일들이 쌓였다. 학자들을 외국에 유학 보내고 원자력연구소를 만들고 원자로를 도입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 대통령은 1959년 원자력원을 장관급 부처로 만들었다. 초대 원장에 문교부장관을 지낸 김법린씨를 임명했다. 원자력연구소 소장엔 박철재 문교부 국장을, 원자로 도입을 담당하는 부장엔 윤 원자력과장이 임명됐다.

원자력연구소는 최고 대우의 '특급 연구소'였다. 다른 연구소들은 소장이 2급 대우였다. 그러나 원자력연구소는 1급만 3자리이고, 2급도 5자리나 되었다. 방사선 위험수당이 붙어 월급도 더 많았다.

"연구소에 왜 고위직 자리를 많이 만드느냐고 총무처가 심하게 반대했어요. 그래서 미국 유타대에 있는 과학자 이태규 박사 같은 분을 모시려면 어떻게 2급 갖고 되겠느냐고 설득했지요."

한국형 원자로 신 고리 1호기. / 연합뉴스
다른 연구소들의 1년 예산이 평균 2000만환이었다. 하지만 원자력연구소는 1959년 예산이 3억환이었다. 대통령이 특별한 관심을 보이는 사안에 어느 누구도 감히 이의를 제기할 수 없었던 것이다.

'원자력 장학생'이 탄생한 것도 대통령 의지였다. 1956년 7월 ICA(국제협조처) 전력고문 시슬러 박사가 경무대를 찾았다. 그는 '에너지 박스'라고 부르는 상자를 갖고 왔다.

"여기에 들어있는 석탄으론 4.5㎾ 전기를 생산하지만 똑같은 양의 우라늄으론 그보다 무려 266만배인 1200만㎾의 전력을 생산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 대통령이 "우리도 그걸 가질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시슬러는 "원자력에 관한 법과 연구기관을 만들어야 하고 그러려면 우선 젊은 과학자 50여명을 외국에 보내 연수시키는 게 시급하다"고 강조했던 것이다.

하지만 외국 유학을 보내는 돈 마련이 쉽지 않았다고 한다. 대통령은 각 부처에 흩어져 있던 외국 원조자금을 끌어모았다. 그렇게 만든 돈으로 미국·영국 등에 보낸 유학생이 200여명을 넘는다.

"이런 귀중한 장학금을 받고도 귀국하지 않거나 엉뚱하게 북한으로 간 이도 생겼어요. 북한도 원자력 연구를 시작했던 때였으니까요."

원자력연구소 부지 선정도 쉽지 않았다. 이 대통령은 군사기지가 있는 진해를 선호했다. 원자로가 설치되어야 하므로 비밀이 유지되고 안전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거론된 게 지금의 과천청사 자리와 안양 박달리였다.

과천은 땅이 너무 넓어 예산 확보 문제로 포기했다. 박달리는 일제 때 포탄 저장고가 있던 은밀한 곳이었는데 미국이 한사코 반대했다. 미국측은 대학이 많은 서울지역에 설치할 것을 고집했다.

국방부장관이 대안으로 송파의 육군형무소 자리를, 서울대에선 경기 양주 신공덕리(서울 공릉동) 서울대 공대 부지를 추천했다. 송파는 교통·전기·상수도 같은 기반시설이 전혀 없었다. 서울대 공대 자리는 대학과 연계해 연구할 수 있는 장점이 있었다. 그러나 한강 이북에 있어 전쟁이 날 경우 전략적으로 불리한 위치였다. 국방부가 전략적으로 검토한 결과, 겨우 서울대 공대 자리로 결론이 났다.

원전 강국의 문을 연 이승만 대통령이 1959년 서울 공릉동 원자로 기공식에서 첫삽을 뜨는 모습. / 조선일보 DB
미국에서 도입키로 한 원자로 '트리가 마크 Ⅱ'는 가격이 70만달러였다. 1인당 GNP가 70달러이던 시절, 70만달러짜리 원자로는 사치라는 지적도 많았다. 미 정부가 35만달러를 지원하지만 나머지는 우리가 대야 했기 때문이다. 이 대통령은 원자로를 군사적 잠재성뿐만 아니라 국가를 살릴 투자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북한도 이 시절에 원자력 개발에 나섰다. 1955년 북한과학원 안에 핵물리학관련 연구소를 짓고 1956년 소련 원자력연구소로 유학생을 보냈다. 이 대통령이 미국과 원자력협정을 1957년 체결하고 100㎾ 연구용 원자로를 만든 것처럼 북한도 1959년 소련과 원자력협정을 체결하고 2000㎾ 연구용 원자로를 영변에 만들었다. 까딱했으면 북한에 영원히 뒤처질 뻔한 것이다.

1959년 7월 14일 서울 공릉동에서 역사적인 원자로 기공식이 열렸다. 이 대통령은 "우리의 장래는 원자력에 달려 있다"고 했다.

하지만 이 대통령은 정작 자신이 시작한 원자로 사업의 열매를 거두지 못했다. 원자로가 가동한 것은 착공 2년여가 지난 1962년 3월 30일이었기 때문이다. 이 대통령은 이미 권좌에서 물러나 망명지인 하와이로 떠나 있었다.

이 대통령이 뿌린 원자력 씨앗은 20여년 지난 뒤 성과가 영글기 시작했다. 1978년 박정희 대통령이 첫 한국형 원전인 고리발전소를 세웠고, 이제는 20기의 원자로를 가진 세계 6대 원전 강국으로 발돋움하게 만들었다.

"공릉동 원자로는 폐쇄됐지만 영구히 보전했으면 합니다. 거기에는 원자력의 무한한 가능성을 꿈꾸며 인재 양성에 힘쓴 이 대통령의 열정이 담겨져 있습니다." 올해 미수(米壽)를 맞은 영원한 원자력과장 윤세원(88)씨의 간절한 새해 소망이다.

윤세원씨는 서울대 물리학과 1회 졸업생으로 문교부 원자력 과장, 원자력연구소 원자로 부장을 거쳐 학계로 복귀, 경희대 부총장, 선문대 총장을 지냈다. 물리학회 원로로 학술원 회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