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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아요디아의 쌍물고기 무늬는 가야의 사돈국이라는 강력한 증거 기사

화이트보스 2010. 1. 17. 19:20

인도 아요디아의 쌍물고기 무늬는 가야의 사돈국이라는 강력한 증거

2010.01.17 06:04 입력

25일 한·인도 정상회담 2000년 전 인도 공주 허황옥의 자취를 찾아서

<1> 인도 아요디아(옛 아유타국) 힌두교 사원의 쌍어문 조각. 이 지역의 주장(州章)이다. <2>중국 사천성 안악현 (옛 보주) 서운향에 있는 보주 허씨 사당. <3>김해 수로왕릉의 쌍어문. 가락국의 국장(國章)으로 추정된다.

서기 48년 7월 27일(아마도 음력일 것이다). 붉은 돛을 단 배가 오늘날 김해를 중심으로 일어난 가락국(駕洛國·후에 가라, 가야로 변함)에 도착했다. 배에서 여러 명이 내렸다. 그중 한 여인이 수로왕 앞에 나아가 자기를 소개했다.
“저는 아유타국 공주입니다. 성은 허씨, 이름은 황옥이고, 나이는 16세입니다(妾時 阿踰陀國 公主也, 姓許 名黃玉 年 二八矣).”

아유타국(阿踰陀國). 『삼국유사』 ‘가락국기 ’에 기록된 아유타국은 갠지스 강변의 아요디아(Ayodhia)를 뜻한다. 아요디아는 힌두교의 중흥시조인 라마(Ram)왕의 탄생지로 세계적인 명성을 갖고 있다. 석가모니가 출가하여 설법을 시작한 지역으로도 유명하고, 인도 전국시대의 맹주국인 코살(Kosala)국의 중심지로서도 역사적인 무게가 남아 있는 곳이다.

그런데 그런 고대 인도의 중심 도시 출신 공주가 한국에 시집을 왔다. 이루 다 기록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예물을 내놓고 수로왕과 결혼해 왕비가 됐다. 두 사람 사이에서 왕자 10명과 공주 2명이 태어났다. 그들이 오늘날 김해 김씨와 김해 허씨의 조상이 됐다. 후손들은 그런 이야기를 굳게 믿어 김해 김씨와 김해 허씨는 지금도 통혼하지 않는 강한 전통이 있다. 매우 흥미 있는 인류학적 현상이다.

사학계 일부에서는 인도에서 한국까지의 먼 거리를 2000년 전에 어떻게 배를 타고 여행할 수 있었을까 하여 ‘가락국기’ 자체를 의심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인도와 한국, 아유타국과 가락국을 연결하는 확실한 문화코드가 있다. 바로 쌍어문(雙魚文)이다. 쌍어문이란 물고기 두 마리가 마주 보고 있는 도안(圖案)이다. 김해 수로왕릉 앞에 서 있는 삼문(三門)에 그려진 쌍둥이 물고기 그림들이 그것이다. 수로왕릉뿐만 아니라, 김해시 소재 신어산의 은하사에도 그려져 있고, 합천 영암사지 돌비석 등 옛 가락국 영역 안에 있는 고대 사찰에 무수하게 남아 있다.

반면 한반도 내의 다른 지역, 즉 당시의 고구려나 백제·신라의 영토 내에서는 거의 발견된 예가 없다. 그래서 필자는 혹시 쌍어문이 가락국의 국장(國章)이 아니었을까 생각하고 있다.

사실 필자는 김해 김가다. 유년시절엔 남다른 검은 피부로 콤플렉스가 있었다. 그런데 수로왕의 국제결혼 상대가 인도 여인이라는 이야기를 학교에서 배우고 나서 필자의 고민은 말끔히 없어졌다. 피부가 검을수록 인도 공주의 유전인자가 많이 남아 있는 왕족의 후손임을 믿으며 살게 되었기 때문이다.

1975년 필자는 평생의 은인을 만났다. 소설가 이종기씨다. 그는 나에게 김해 수로왕릉에 그려져 있는 쌍어문이 인도 아요디아에도 무수하게 새겨져 있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아요디아에 도착한 순간부터 이 나라가 물고기의 나라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수백 개의 힌두교 사원 정문에, 학교 정문에, 관청 대문에, 군인 계급장에, 경찰 모자에, 택시 번호판에 쌍어문이 새겨져 있었다. 쌍어문은 아요디아를 중심으로 하는 우타르프라데시주의 주장(州章)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인도에서는 쌍어문의 상징적 의미를 연구하는 사람을 만날 수 없었다. 분명 매우 중요한 상징이기 때문에 입는 옷이나 건물, 타는 차에 그리고 다닐 텐데 의미를 명쾌하게 설명해 주는 사람이 없었다. 박물관장도 설명을 하지 못했다. 이 무슨 해괴한 일인가.

필자의 쌍어문 추적은 계속됐다. 쌍어 상징은 인도와 한국 사이의 넓은 내륙 곳곳에서 볼 수 있었다. 방글라데시의 다카, 미얀마와 중국의 국경지대인 등충, 운남의 곤명, 사천의 안악, 그리고 양자강을 따라 무수하게 발견됐다. 아유타국 사람들이 걸어오며 남긴 흔적일 것이다. 더 서쪽으로는 아프카니스탄의 스키타이 유적에서, 이란 페르시아 시대의 파살가드 유적에서, 터키 바빌로니아 시대의 페르가몬에서 궁전의 조각으로, 시리아와 튀니지에서 민속품으로 사용되고 있음도 확인하였다. 그 장소들을 지도에 찍으며 수십 년간 현장을 답사했다.

내가 찾아낸 결론은 쌍어가 페르시아 신화에 등장하는 카라어(Kara Fish)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카라는 바다에 사는 물고기였다. 바다에 뿌리를 내리고 꽃을 피우는 ‘코케레나’라는 나무를 지키는 수호신이었다. 코케레나의 잎사귀는 인간의 만병을 치료하는 영약이다. 그런 믿음이 바빌로니아로 이어지고, 그 시대에 노예생활을 하던 유대인에게 스며들어 구약성서(느헤미아 기 등)에 기록으로 남고, 예수님의 이적(異蹟)인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중생을 구휼한 이야기(五餠二魚)로 전해지고 있다.

국내에서 쌍어문은 김수로왕의 무덤을 지키는 수호신으로 전승돼 왔다. 그렇다면 쌍어가 무덤을 지키고, 사원을 지키고, 집을 지키고, 사람을 지켜준다는 생각은 누가 가야에 전했을까. 아유타국 출신 공주 허황옥이 처음으로 전파한 것은 아닐까.

그녀의 이동 경로를 좀 더 알아보도록 하자. 우선 인도와 중국을 연결하는 길은 히말라야 산맥의 남쪽 기슭을 통과하는 산악도로인 차마고도(車馬古道)가 알려져 있다. 또 있다. 더 남쪽의 구륭산맥을 넘어 미얀마를 통과하는 길이다. 오척로(五尺路)라고 부르는 산악도로다. 산비탈을 깎아 만든 폭이 1m 남짓한 좁은 길로, 말이나 당나귀들만 짐을 싣고 갈 수 있는 험로다. 이런 길을 통해 오가던 상인들은 무겁지 않은 차(茶), 보석, 비단 같은 고부가 상품을 거래했다.

그 길은 인도~미얀마~중국의 운남~사천~양자강 일대를 잇는 고대 무역로였다. 이 루트에는 사당 벽돌 조각으로, 제기(祭器) 무늬로 무수한 쌍어문이 남아 있다.
사천에 도착한 인도인들은 보주(普州·오늘날 安岳)에 잠시 정착했다. 보주는 후한 때 남군으로 편입되지만, 그때까지 소수민족이 독립세력을 형성하던 곳이었다. 이들은 이곳에 아유타국의 분국(分國) 같은 것을 세우고 지내다 중국의 한나라와 충돌했다.

남군에서는 한나라의 통치에 대항하는 민족 봉기가 두 번 일어났다. 『후한서』에 따르면 서기 47년 첫 번째 봉기 후 소수민족 7000명이 보주를 떠나 강하(江夏·오늘날 武漢)로 강제 이주당했다. 그리고 다음 해 허황옥 일행은 황해를 건너 김해에 도착했다. 김해에 있는 허황옥의 능비에는 시호가 보주태후(普州太后)라고 명기돼 있다. 그녀의 실제 성장지가 중국 보주일 것으로 추정되는 이유다.

101년 두 번째 봉기 끝에 주동자가 항복했다. 그의 이름이 허성(許聖)이다. 옛날 사천지방에 허씨 세력이 대단하였음을 암시하는 기록이다. 사실 그때까지 사천·운남 지방은 낙양을 중심으로 하는 한나라 세력이 크게 힘을 미치지 못했다.
필자가 안악(보주) 지역을 답사해 보니 그곳에 보주 허씨들이 15만 명이나 살고 있었다. 그들은 사당에 중국 수학의 아버지로 추앙받는 허창수(許昌洙)라는 인물을 모시고 있었다.

허황옥과 그의 선조가 거쳐온 길은 중국·인도를 거쳐 지중해까지 연결되는 내륙 도로다. 차와 소금, 비단과 보석, 어쩌면 약재들까지 이 길을 통해 동서양을 넘나들었을 것이다. 인도와 한국은 먼 나라가 아니었다. 아주 옛날부터 무역을 하고 사돈을 맺던 이웃 나라였다. 고대 인도와 한국이 왕족들 간에 국제결혼을 한 사건도 불교가 한국에 공식적으로 소개되기 훨씬 전의 일이다.

허황옥이 가져온 결혼 예물 중에는 인도와 미얀마 특산품 중 하나인 경(瓊·옥의 일종)과 구(玖·루비의 일종)가 포함돼 있었다. 허황옥을 배에 태워다 준 사람들은 결국 차마고도를 통해 인도와 한국을 오가던 상단(商團)들이었다. 그렇게 광대한 지역에 관한 지식과 경험이 허황옥 일행을 통해 고대 한반도에 전달됐다. 2000년 전에도 글로벌 지식을 가진 사람들이 이미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김병모 한양대 명예교수·고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