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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팔 서부4] 햇살은 화가 되고 라라호수는 캔버스 되어

화이트보스 2010. 8. 31. 13:33

네팔 서부4] 햇살은 화가 되고 라라호수는 캔버스 되어

라라호수~카키~감가디~루마~박가온~주타산

여명 속에서 동쪽의 다울라기리 산군이 이고 있는 하늘이 오렌지색으로 물든다. 이어 서쪽의 사이팔 히말이 머리부터 붉게 물들고, 20여 분 동안 서서히 산 아래로 번져간다. 그러다 돌연 칸지로와 히말의 머리 위로 태양이 불쑥 솟아올라 세상에 밝은 빛과 온기를 전한다.


여기서 바라보는 라라호수는 길쭉한 모습이다. 사방을 둘러싼 산들이 불룩해 마치 여인의 음부처럼 보인다. 높이 솟은 히말이 양이라면 라라호수는 음이다. 음양의 조화가 잘 어우러진 명당이다.


내려가는 길이 험해 애를 먹는다. 북사면이라 눈이 얼어서 매우 미끄럽다. 사람도 어렵지만 짐을 실은 말들은 더 어렵다. 미끄러지고 비틀거리고 우왕좌왕이다. 피켈로 길을 내가며 간신히 말을 수습해 내려갔다.


라라호수 일대는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어 보존이 잘 되어 있다. 자작나무와 침엽수가 울창한 산길을 터덜터덜 내려간다. 숲 사이로 파란 라라호수가 언뜻언뜻 보인다. 발걸음이 다시 빨라진다.


▲ 라라호수 근처 4,000m 고지를 향해 가는 도중 바라본 칸지로와 히말 풍경.
▲ 라펠릭패스 뒷산에서 본 깐지로와 히말의 만년설봉들.

짐을 운반하는 말들을 만났다. 그 중 검은 말이 특히 멋지다. 갖가지 조화와 색실로 화려하게 치장하고 목에는 여러 개의 종을 걸었다. 특별대우를 받아 등에는 짐도 없다. 카메라를 들이대자 녀석은 한껏 포즈까지 취한다.


라라호수에 도착했다. 호숫가에는 갈대가 드문드문 군락을 이루고 멀리 설산이 늘어서 있다. 거리가 멀기 때문에 높은 설산이 여기서는 낮아 보인다. 그 설산이 호수에 반영되어 신비로운 분위기를 연출한다.


호수에서는 오리들이 저희들끼리 장난을 치며 헤엄을 친다. 맑은 물속에서 유영하는 물고기들을 발견했다. 팔뚝만 한 검은색 고기로 몸체와 지느러미가 철갑상어를 꼭 빼닮았다. 다른 종류의 물고기는 보이지 않는다.


▲ 물푸레레크 앞 산에 약초를 심고 돌아오고 있는 네팔 여인들.

호숫가 목초지에는 양과 염소들이 풀을 뜯고 있다. 목에 종을 단 커다란 검은 개가 그 양들을 지키고 있다. 마스티브 종이다. 이 개는 힘이 세고 성질이 사납다. 주로 경비견으로 활용하나 사냥에도 능하다고 알려져 있다.


국립공원 관리사무소에서 관리하는 야영지에 캠프를 쳤다. 바로 옆에는 중대 규모의 군부대가 주둔하고 있다. 군사적인 목적은 모르겠지만 아마도 밀렵과 벌목을 감시하는 병력으로 판단된다.


라라호수에 반영되는 일몰의 히말을 촬영하려고 뷰포인트인 힌두 사당을 찾았다. 안타깝게도 바람이 불어 호수에 비친 산영이 흔들린다. 나중에는 구름까지 몰려와 결국 촬영을 접어야 했다. 매번 운이 좋을 수는 없다. 허탕을 쳐도, 정성을 기울이다 보면 반드시 기회는 온다고 믿는다.


▲ 설산을 담아내고 있는 라라호수.


라라호수 근방에서 제일 큰 마을 감가디


2009년 11월 30일. 호수의 일출 촬영은 까다롭다. 히말과 호수를 한 프레임에 담고, 히말의 일출이 호수에 반영되는 순간을 포착해야 한다. 그러므로 호수의 상태가 매우 중요하다. 호수가 맑고 잔잔할수록 반영은 더욱 선명해진다.


운이 좋다. 새벽녘 라라호수는 잔잔하다. 기온이 낮아서 물안개도 없다. 멀리 히말의 어깨 너머로 은은한 금빛이 감돈다. 라라호수에 금빛이 뿌려지고, 시간이 갈수록 금빛은 미세한 변화를 거듭한다. 그러다 히말의 머리 위로 태양이 솟구치는 순간 호수에는 넓고 긴 금빛 다리가 생겨난다.


▲ 카키마을 아이들.

금빛 다리는 태양에서 시작되어 호수를 가로질러 내 앞으로 순식간에 달려온다. 그 순간 나와 태양은 다리로 연결된다. 그 다리에 올라서 걸어가면 태양에 당도할 것 같은 환상이 나를 사로잡는다.


해는 떴어도 라라호수의 변화는 계속된다. 히말과 나무를 투영하는 태양의 각도에 따라 호수의 색상은 시시각각으로 변한다. 햇살은 화가가 되고 라라호수는 캔버스가 되어 나그네의 발길을 잡는다.

라라호수~카키~감가디~루마~박가온~주타산

라라호수를 떠나 길을 잃고 헤매다 카키 마을에 도착했다. 마을 사람들은 저마다 가을걷이에 한창이다. 여인들은 절구를 찧고, 도리깨로 곡식을 털고, 키로 낱알을 까부른다. 남자들은 보이지 않는다. 산간 마을의 여인들은 생활력이 강하고 억세다. 그러면서도 정이 많다.


할머니들이 달려와 야생화를 내 귀에 꽂아주며 환대한다. 산간 마을 사람들은 외국인을 꺼려하지 않고 대부분 호의적이다. 아이들은 더하다. 마을을 떠날 때까지 졸졸 쫓아다니며 관찰한다.


오후에 감가디 마을에 도착했다. 이 마을은 라라호수 근방에서 제일 큰 마을이다. 관공서와 학교, 상점들이 밀집해 있다. 부근 감가디 공항까지 이어진 도로는 차가 다닐 정도로 넓다.


거리에서 힌두식 결혼 행렬을 만났다. 북치는 사람들과 심벌즈 치는 소년을 따라 말을 탄 신랑 신부, 하객들이 뒤를 따른다. 신랑은 목에 사자의 갈기와 비슷한 장식을 하고, 신부는 붉은 망사와 드레스로 한껏 멋을 냈다.


▲ 결혼식을 올리고 있는 감가디마을 신부.

이들은 같은 카스트로 짐작된다. 힌두교는 카스트가 다르면 결혼을 못 하고 서로 섞여 살지도 못한다. 신분에 따른 차별은 법으로 금지되어 있지만 여전히 관습법으로 통용되고 있다. 간디의 노력은 아직 결실을 맺지 못했다.


학교는 트레커에 개방되어 있어 방과 후 학교 운동장에 캠프를 쳤다. 하교 시간이 이채롭다. 전교생이 북소리에 맞춰 맨손체조를 하고 차례로 교문을 나선다. 학생들의 어깨를 일일이 두드려주는 교장선생님이 보기 좋다.


2009년 12월 1일. 새벽에 두런두런 말소리가 들린다. 고등학생들이 책을 싼 보자기를 옆에 끼고 등교를 한다. 아침 자율 학습이다. 학생들은 전등이 없는 깜깜한 교실에서 큰소리로 암기공부를 한다. 배움에 대한 열정이 대단한 학생들이다.


이 학교는 수백 명의 초중고생이 함께 공부한다. 건물이 여러 동인데도 새로 건물을 지으려나보다. 인부들이 연신 말에 돌을 싣고 와 학교 구석에 쌓고 있다. 아침에 학교를 출발해 500m쯤 내려가는데 교장 선생님이 헐레벌떡 쫓아온다. 어제 학교에 약간의 의약품을 전달했는데 감사 인사를 못 했다며 예의를 차린다.


▲ 나무를 해오고 있는 가리방마을의 아낙.

마을 외곽의 교도소를 지난다. 교도소라고는 해도 감시 망루가 없고 철조망 담장도 없다. 양철 지붕의 건물 십여 동에 얕은 담장을 둘러친 게 전부다. 허술하기 짝이 없다.


카날리 강의 철제 구름다리에 도착했다. 두 명의 여인이 다리를 건너오면서 파이프 담배를 핀다. 햇볕에 그을린 검은 피부와 깊은 주름 때문에 나이를 짐작할 수 없다. 사실 이 지역의 소녀는 대부분 미인이다. 아리안 혈통으로 오뚝한 코와 커다란 눈망울이 참 매력적이다. 하지만 고된 삶이 얼굴을 그렇게 바꾸어 놓는다.


다리를 건넜다. 한 할아버지가 도망치는 당나귀를 뒤쫓고 있다. 당나귀는 다리를 건너지 않으려고 이리저리 도망을 다닌다. 당나귀는 체구는 작지만 힘이 세서 짐을 운반하는 데 주로 쓰인다. 하지만 눈치가 멀쩡한 데다 고집이 세서 종종 애를 먹인다. 결국 지나가는 청년의 도움으로 할아버지가 겨우 당나귀를 붙잡았다. 화가 난 할아버지는 당나귀를 거칠게 발로 차며 다리를 건넌다. 고집스런 당나귀가 우습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하다.


▲ 담배를 피우고 있는 내오리갓마을 주민.


의약품 얻으려 수많은 주민 몰려들어


큰 고개를 넘어 오후에 루마 마을에 도착했다. 마을 입구에 아치형 문이 서 있고, 문 양편에는 붉은 깃발이 그려져 있다. 한쪽 깃발에는 낫과 망치, 다른 한쪽엔 다섯 개의 별 그림이 선명하다. 네팔 공산당의 깃발이다.


네팔 공산당은 흔히 ‘마오이’로 불리는데 네팔에서 상당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카스트 제도 타파와 부의 재분배, 평등한 교육 기회, 평등한 신분 등을 주장하기 때문인지 이 지역에서 호응도가 높아 보인다.


루마 마을은 50호 정도로 집들이 촘촘하게 계단식으로 조성되어 있다. 계곡물이 적어 물레방아는 없는 대신 공동 방앗간을 사용한다. 거대한 바위에 절구 구멍을 여러 개 파놓고 곡식을 빻고 있다. 파리  떼가 엄청나다. 곡식 찌꺼기와 가축 분뇨를 동네 길에 깔아놓은 탓이다. 위생이 걱정된다.


2009년 12월 2일. 루마 마을은 산간 마을 중에서도 특히 낙후된 지역으로 보인다. 상업, 교육, 행정이 비교적 발달한 감가디 마을과 하루 정도의 거리지만 감가디 마을과 여러 면에서 큰 차이를 보인다.


마을 규모가 작지 않고, 계단식 밭과 가축 수는 많지만 생활수준은 아주 열악하다. 우선 다른 산간 마을에 대부분 설치된 솔라 전기시설이 없다. 물론 의료 시설도 전혀 없다.

미리 준비해 간 의약품은 구충제, 진통제, 복합연고제, 파스 정도인데 얻어가려는 현지인들이 아주 많았다. 그 중 구충제는 정확한 용도를 설명하기 어려워 애를 먹었다. 아무리 설명해도 배 아픈 데 먹는 약으로 오인한다. 할 수 없이 무조건 한 사람당 하나씩 주고 보는 데서 먹도록 했다.

다행히 출장 의료 지원은 어느 정도 이루어진다. 보건당국에서 나온 것으로 짐작되는 직원이 아이들에게 예방접종 주사를 놓는 광경을 목격했다. 여인들을 대상으로는 가족계획을 지도한다. 아주 초보적인 지원이다.


이런 오지에서 병이라도 나면 큰일이다. 지난밤에는 급체로 고생을 했다. 콩을 볶아 먹고 호두를 먹은 게 체했다. 침을 맞고 약을 먹었지만 별 차도가 없다. 다행히 새벽에 속이 뚫리면서 설사를 하고 나자 살 만하다.


루마 마을을 떠나 산길을 오른다. 500m 고도를 올리는 데 두 시간이 걸린다. 다시 한 시간을 더 걸어 바우 마을에 도착했다. 이 마을은 70호 규모로 300년 전에 정착했다고 한다. 두꺼운 너와지붕을 얹고 굵은 목재를 사용해서 집은 아직도 튼튼해 보인다. 통나무 계단은 얼마나 오래 사용했는지 닳고 닳아 반질반질하다.


▲ 곡식을 고르고 있는 내오리갓마을 아낙.

한 할머니가 머리를 말린다. 코걸이와 귀고리, 목걸이를 착용하고 손가락에 반지까지 끼고 있다. 이 지역 여성들은 장신구를 무척 좋아한다. 손가락 굵기의 은팔찌와 은발찌를 착용한 여성도 많다. 아무리 어렵게 살아도 치장하고 싶은 여성의 본능은 어쩔 수 없나 보다.


바우 마을을 떠나 고갯마루에 올랐다. 멀지 않은 곳에 쌍봉낙타의 혹처럼 우뚝 솟은 바위산이 두 개 보인다. 고개 아래로는 드넓은 계단식 밭이 펼쳐진다. 밭에 일정한 간격으로 찍혀 점처럼 보이는 것들은 두엄더미다. 여인들이 바구니로 연신 두엄을 나르고 있다.


박가온 마을을 지나 오후 4시경에 도르커 마을에 도착해서 캠프를 쳤다. 오늘은 여덟 시간 정도 산길을 오르내렸다. 네팔어로 오르는 것은 ‘마티’내려가는 것은 ‘딸라’라고 한다. 인생 역시‘마티 딸라’아닌가.


2009년 12월 3일. 쌍봉낙타의 혹이 아른거린다. 뷰포인트로는 최적의 장소로 판단된다. 루마 마을에서 고용한 현지인 가이드에 따르면 그 산은 주타산(4,200m)으로 경사가 험하고 길은 없지만 오를 수는 있다고 한다. 부쩍 욕심이 생긴다. 그래서 예정에는 없었지만 어제 저녁에 주타산 등정을 결정했다.


▲ 내오리갓마을 젊은 새댁이 아이에게 젖을 물리고 있다.

여행에서 즉흥적인 결정은 사실 바람직하지 않다. 하지만 스태프들은 등반 경험이 풍부한 베테랑으로 다년간 함께 호흡을 맞춰온 사이다. 좋은 작품이 나오면 상응하는 팁을 지급하기 때문에 스태프들은 흔쾌히 찬성했다.



주타 산정에서 히말라야 대장관 만나


새벽부터 점심도시락으로 짜빠티와 삶은 달걀을 준비하고, 7시 반쯤 카메라팀만 데리고 먼저 출발했다. 나머지 스태프들은 텐트를 천천히 정리하고, 다음 캠프지로 이동해 우리를 기다리기로 했다.


두 시간쯤 산길을 오르자 활엽수림이 나타난다. 우거진 나무 사이로 새소리가 요란하고, 여기저기 쓰러져 있는 고목에는 푸른 이끼가 가득하다. ‘딱딱딱딱’나무를 찍는 소리에 올려다보니 딱따구리 한 마리가 벌레를 사냥 중이다. 비디오 카메라를 들고 몇 번을 쫓아갔으나 결국 허탕을 쳤다.


존 캐리 고개(3,700m)에서 왼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목초지를 지나자 이제 희미했던 길조차 사라진다. 위쪽을 올려다보니 거의 절벽이다. 하지만 포기할 수는 없다. 드문드문 돌틈 사이에 자생하는 풀을 잡고 올라간다. 낙석의 위험 때문에 신중을 기하다 보니 진행이 더디다.


11시경 어렵사리 주타산 정상에 도착했다. 누군가가 쌓아놓은 돌탑이 여러 개 있고, 정상 여기저기에 이끼 낀 퇴적암들이 아무렇게나 흩어져 있다. 역시 기대한 대로 히말의 파노라마가 펼쳐져 있다.


동쪽으로는 칸지로와 히말, 다울라기리, 구리자 히말이 보이고, 남쪽으로는 라라호수가 살짝 보인다. 서쪽으로는 사이팔 히말이 보이고, 힌두와 티베트불교의 성산인 카일라시도 멀리 보인다. 북쪽으로는 칸티히말이 보인다. 그야말로 360도 파노라마다. 그 웅대하고 장엄한 광경에 일순간 감격이 벅차오른다. 미친듯이 카메라 셔터를 누르자 두 시간이 훌쩍 지난다. 늦은 점심 후에 세 개의 돌탑을 쌓으며 일행의 안전과 가족의 안녕을 기원했다.


어두워져야 스태프들이 기다리고 있는 계곡의 캠프지에 도착했다. 양치는 노인으로부터 양을 한 마리 구입해 불고기와 탕을 해 먹었다. 이 지역의 양고기는 냄새가 전혀 없다. 맛도 굉장히 좋다. 좋은 작품을 촬영해 마음이 뿌듯하다. 히말의 신에게 감사할 뿐이다.


/ 글·사진 조진수 사진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