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일 오후 2시쯤 경기도 양평군 양동면 계정리 산6번지. 승용차에서 내린 남녀 5명이 눈 덮인 산길을 따라 올랐다. 일행은 높이 13m쯤 되는 산벚나무 아래 멈췄다. 나무에서 1.5m쯤 떨어진 곳에 가로 50㎝, 세로 50㎝, 깊이 50㎝ 크기의 구덩이가 파여 있었다. 50대 남자가 높이 20㎝ 남짓한 진흙항아리를 조심스레 구덩이에 내려놓았다. 덮인 흙 위로 국화 2다발이 놓였다. 88세로 세상을 떠난 문모 할머니의 수목장(樹木葬)이 열린 '하늘숲추모원'의 모습이다.
지난해 5월 문을 연 국내 첫 국유 수목장림인 하늘숲추모원은 55㏊ 야산에 조성됐다. 소나무·굴참나무·잣나무·신갈나무·산벚나무 등 2009그루를 골라 추모목으로 정했다. 18일 현재 800여 그루의 나무 주변에 1400여위의 유골이 안치됐다. 비석이나 봉분이 없어 산림욕장에 온 느낌마저 드는 곳이다. 누가 묻힌 나무인지를 알려주는 목제 명패(名牌)가 매달려 있지만, 10×15㎝ 크기라 잘 보이지 않는다.
친환경 장묘법인 수목장을 대중적으로 보급한 사람은 스위스의 전기기술자였던 우엘리 자우터(Sauter)다. 1993년 그의 영국인 친구 마이클이 세상을 떠났다. 친구는 죽기 전에 "함께 있을 수 있도록 스위스에 묻어달라"고 부탁했다. 자우터는 친구의 뼛가루를 뒷동산 나무 밑에 뿌렸다. 뼛가루가 나무의 거름이 되고, 친구와 나무는 상생할 것이라는 데 착안한 것이다. 자우터는 1999년 '프리드발트(Friedwald·안식의 숲)'라는 브랜드를 내세워 수목장림 사업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수목장은 영국·일본·독일 등 선진국에서 장묘문화를 이끌어갈 대안으로 확산되고 있지만, 국내에선 겨우 첫발만 내딛고 멈춰선 상태다. 수목장 등 자연장에 관한 법은 2007년에 겨우 생겨 2008년 5월부터 시행됐다. 이전에 생긴 사설 수목장 시설들은 불법으로 단속됐고, 가족과 조상의 유골을 안치한 국민들만 피해를 봤다.
보건복지가족부의 2009년 자료에 의하면 최근 7년간 묘지로 덮인 국토면적은 총 42.2㎢(약 1278만평)이다. 여의도 면적의 5배나 된다. 전국의 분묘 수는 2000만개로 추정된다. 국토 전체의 1%, 서울특별시 면적의 1.6배라고 한다.
국내에서도 뜻있는 인사들과 종교계의 노력으로 화장(火葬)에 대한 인식이 변했다. 1970년 10.7%였던 전국의 화장률은 2005년 52.6%, 2008년 61.9%로 늘었다. 이렇게 화장률은 뛰는데, 화장시설은 기고 있는 게 우리 현실이다. 2009년 말 49개로 11년 전에 비해 고작 5개가 늘었다. 2008년 화장률이 72.2%인 서울에 화장장은 1곳뿐이다. 예약이 밀려 4일장, 5일장을 치르는 게 다반사다.
전국 묘지에 대한 정확한 통계도 없다. 2001년 묘지나 분묘를 15년(3회 연장 가능·최장 60년) 한시적으로 설치 사용하도록 하고, 매장 시 신고 의무화, 묘지 일제조사 실시 등을 규정한 법이 마련됐다. 하지만 실태조사는 없었고, 신고도 엉터리였다.
보건복지가족부가 올해부터 '장사정보 종합시스템'을 마련해 운영하겠다는 계획을 내놓았다. 전국의 묘지실태 조사를 비롯해 화장시설 예약, 사망정보 등을 통합 관리하겠다는 것이다. 이번에도 말만 해놓고 흐지부지해서는 곤란하다. 단순한 조사와 서비스 제공의 차원을 넘어 장묘문화 개혁의 신호탄으로 삼아야 한다. 고령사회의 멍에를 져야 할 후손들에게 '묘지강산(墓地江山)'에서 살아야 하는 부담까지 떠넘겨선 안 될 일이다.
'묘지강산(墓地江山)'을 물려줄 순 없다
입력 : 2010.01.18 2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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