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티 지진참사 현장의 유일한 한국군 이선희 소령
아이티 파견 유엔 평화유지군 소속… 작년 11월부터 근무
머물던 호텔 지진에 '폭삭' 야근 덕분에 참사 면해 남편에 "조기귀국 않겠다"
미국 대사관은 지진에‘멀쩡’‘철저한 준비 필요’ 새삼 느껴
지금 된장찌개 제일 먹고싶어
이선희 소령은아이티에 파견된 유엔 평화유지군 소속 안정화지원단에서 군수 업무를 맡고 있다. 유엔은 지난 2004년 3월 아이티에서 아리스티드 당시 대통령이 군부 쿠데타로 축출되면서 내전이 격화되자 치안유지와 정국안정을 위해 그해부터 평화유지군을 파견하고 있다.
현재 아이티에는 18개국의 군인 7068명과 25개국 경찰 2066명 등 9134명이 유엔 평화유지군으로 근무하고 있다. 이 소령은 2003년 상록수부대의 구매장교로 동티모르에 파견돼 처음으로 유엔 평화유지군으로 활동했고, 이번 아이티 근무는 두 번째 유엔 근무다.
경북대학교를 졸업한 후 여군 35기로 임관했다. 1995년에 육사 출신인 김정균씨와 결혼해 군인 부부가 됐고 외동딸 지은(14)양을 두고 있다. 남편 김씨는 전역해 현재 군인공제회에서 근무하고 있다.
- ▲ 22일 아이티 수도 포르토프랭스 시내의 유엔 평화유지군 본부에서 군수장교인 이선희 소령이 자신의 사무실에 앉아 있다. 김씨는 아이티 평화유지군에서 일하는 유일한 한국인이다. /김상민 기자 momo@chosun.com
이선희(43) 소령은 두 손으로 의자 팔걸이를 꽉 잡고 두 눈을 크게 떴다. 작년 11월부터 아이티에 주둔하는 유엔 안정화지원단(MINUSTAH·미누스타) 평화유지군의 일원으로 근무해온 이 소령도 아이티 대참사의 '이재민' 중 한 사람이다. 이 소령은 아이티에 지진이 발생한 12일 오후 4시 55분쯤(현지시각) 숙소로 사용하던 몬타나호텔이 무너지면서 단돈 22달러와 간단한 옷가지 몇 벌만 남았다. 그가 참사를 피할 수 있었던 것은 퇴근 시간인 오후 4시를 지나서도 사무실에서 계속 일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22일 아침 아이티 수도 포르토프랭스 안정화지원단 사무실에서 만난 그는 환한 웃음으로 기자를 맞았다. 이 소령은 "이래 봬도 '리틀 코리아 앰버시'(작은 한국대사관)"라며 40㎡쯤 되는 자기 사무실로 안내했다. 리클 코리아 앰버시는 대지진 이후 한국 교민은 물론 구호활동을 위해 아이티를 찾은 한국인들 치고 이곳을 방문하지 않은 사람이 없다는 뜻으로 그가 붙인 별칭이다. 지진 여파인 듯 높이 2.5m쯤 되는 벽면 한쪽은 천장에서 바닥까지 굵은 금이 가 있었다. 참사로 호텔 숙소를 잃은 그는 이 사무실과 인근 브라질군 공병대 막사를 오가며 숙식을 해결하고 있었다.
이 소령은 전날 밤에도 늦게 잔 듯 얼굴이 수척해 보였다. 지난 17일 브라질 유력 일간지 폴랴 데 상파울루는 "이선희 소령은 잠도 제대로 자지 않고 쉴새없이 일하고 있다. 한국 정부와 아이티 거주 한국인들 사이의 연락 체계를 유지하는 데 그가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며 이 소령을 비중 있게 다뤘다. 신문은 "이 소령이 '안전을 걱정하는 남편에게 조기 귀국하지 않겠다'고 전했다"며 헌신적인 구호 활동을 높이 평가했다.
이 소령은 아이티 주둔 유엔 평화유지군에서 일하는 유일한 한국인이다. 평화유지군과 경찰에 유류와 식량·식수 등을 공급하는 군수장교로 근무했지만, 지금은 유엔군과 우리측 구조대의 징검다리 역할이 더 중요하다. 토고 유엔군 부사령관의 부인이 지진발생 당시 한 피트니스 센터에서 매몰된 것으로 알려지자 유엔군측은 이 소령을 통해 119국제구조단의 수색작업을 요청했다. 한국의 구호단체들이 유엔군 지원을 요청하면 이 소령은 백방으로 뛰어다니며 유엔군의 차량 호위를 붙여주곤 한다.
유난히 흰 피부빛깔 때문에 밖에 나가서도 이 소령은 쉽게 눈에 띄었다. "지금은 피부가 많이 탄 편이에요. 기초화장품이 부족해서 더 잘 타는 같아요. 하하하."
―지진이 발생한 12일을 기억하시나요.
"작년 11월 아이티에서 근무하면서 몬타나호텔 1층에 숙소를 잡았습니다. 지진이 일어났던 12일에는 할 일이 좀 많아서 오전에 출근할 때부터 반소매 티셔츠 두 벌과 트레이닝복 바지 한 벌을 챙겨 나왔어요. 하루에 최소 30분씩은 운동한다는 것이 제 목표인데 이날은 야근 때문에 호텔로 돌아가지 않고 부대에서 그냥 운동할 생각이었죠. 그날 몬타나호텔이 폭삭 무너져버렸어요. 정말 소름이 끼쳤죠. 제가 일하는 데 꼭 필요한 물건은 전부 챙겨 다행이었습니다. 특히 전자사전은 하나뿐인 딸(김지은·14)이 준 소중한 물건이었어요."
지진으로 일반 전화와 휴대전화, 인터넷 등 외부로 연결되는 통신수단이 모두 두절되자 이 소령은 유엔 평화유지군의 위성전화기를 이용해 합참에 처음으로 상황을 보고했다. 합참이 한국에 있는 가족에게 이 소령 대신 "살아있다"는 안부를 전했고, 전화를 끊은 이 소령은 곧바로 한국인 피해자를 파악하러 나섰다.
―지진이 처음 발생했을 때 위험을 무릅쓰고 여기저기 많이 돌아다녔다고 들었습니다.
"아이티에 상주하는 분들은 비상연락망으로 연락이 되는데, 외부에서 업무차 방문한 분들의 연락이 잘 안 됐습니다. 도미니카 한국대사관에서 업무차 아이티를 방문한 한국인 4명이 카리브호텔에 있으니 생사를 확인해달라는 요청을 해 왔습니다. 유엔 경찰차를 타고 소식을 들을 수 있을만한 곳을 모두 찾아다녔지요. 빨리 구하러 가야겠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다행히 네 분 모두 무사하다는 소식을 접하고 나서 얼마나 감사하던지…. 최원석 도미니카 한국대사관 참사관(아이티 긴급지원팀장)과 고아원을 운영하는 백삼숙 목사님 등 모든 한인들이 정말 열심히 노력했습니다. '이런 데서 한국인들의 저력이 나오는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진이 일어난 뒤 몬타나호텔 현장에는 가보셨습니까.
"일주일 만인 지난 19일 한국 119국제구조대가 몬타나호텔에 구조 활동할 때 함께 가봤습니다. 정말 처참했습니다. 6층이었던 호텔 건물이 마치 종이 더미를 쌓아둔 것처럼 완전히 눌러앉았더군요. 제 키가 1m60인데 내려앉은 건물의 1층부터 6층까지 높이가 제 키 두 배 정도 높이에 불과할 만큼 그대로 내려앉았습니다. 제가 머무르던 1층 방은 아예 흔적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요즘에는 어디에서 어떻게 지내십니까.
"이곳 미누스타 사무실에서 야전 침대를 놓고 자거나, 브라질군 숙소에서 잠을 자며 지내고 있어요. 이런 공간이라도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평소 알던 한인들이 속옷부터 라면 등 먹을 것까지 챙겨주셔서 부족한 것 없이 잘 지내고 있습니다."
- ▲ 작년 12월 아이티의 평화유지군 사무실에서 이선희 소령이 같이 일하는 필리핀 군인들과 아이티 현지인(왼쪽에서 두 번째)과 함께 포즈를 취하고 있다. /이선희 소령 제공
―지진참사 후 시간이 많이 흘렀는데 현재 아이티 상황은 어떻습니까?
"다행히 안정을 되찾고 있는 것 같습니다. 처음에는 처참하다는 표현이 어울렸지만, 차차 이곳 사람들도 복구 의지를 보이고 있습니다. 우리 정부에서 지원을 늘렸고 민간단체에서도 많이 와서 한국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니까 유엔 쪽에서도 많이 고마워합니다."
―이번 지진을 겪으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을 것 같습니다.
"지진을 경험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습니다. 폐허가 된 집들을 보면서 '뭐든지 철저히 준비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이번 지진에도 미국 대사관은 끄떡없었습니다. 그동안 아이티 사람들이 내진(耐震) 설비를 아예 하지 않았고 지진에 대한 지식도 없었다는 게 드러난 거죠."
이 소령은 인터뷰 중간에 사무실을 오가는 외국인과 유엔군 동료를 볼 때마다 환하게 웃으며 일일이 포옹하고 악수를 나누며 안부를 주고받았다. 미누스타의 군수 총괄 담당자인 로베르토 도미노(이탈리아) 중령은 "이 소령은 악수할 때마다 손을 너무 꽉 쥐어서 손이 얼얼하다"고 농담을 한 뒤 이 소령 어깨를 두드리며 "별 문제는 없느냐"며 격려했다.
―성격이 참 밝고, 여장부 같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친구들로부터 '왈가닥', '동네 반장'으로 불렸습니다. 저는 도전과 모험을 좋아하지요. 미누스타에서도 분위기 띄우는 건 제 역할입니다. 한국에서 보내준 김을 동료들에게 나눠줬는데, 먹지를 않더라고요. 조금 어색해졌는데 제가 김을 앞니에 붙여 우스꽝스런 모습을 하자 웃음보가 터지면서 분위기가 좋아진 적이 있습니다."
―함께 일하는 동료들이 부르는 별명이 있습니까?
"제 피부가 하얘서 그런 건지 '스터닝 선(stunning sun·눈부신 선희)'으로 불립니다. 지금은 피부가 좀 많이 탄 겁니다. 하하하."
―어릴 때는 어떻게 자랐습니까?
"1남3녀 중 셋째이고, 딸로는 둘째입니다. 장녀인 언니가 책임감도 강해서 많이 의지하는 편이지요. 저는 어렸을 때부터 혼자서 많이 돌아다니는 성격이어서 일찍부터 부모님께서 이래라저래라 간섭 하지 않으셨어요."
―가족이 그립지는 않습니까?
"보고 싶죠. 하지만 시간대가 완전히 반대라서 힘든 면이 있긴 합니다. 딸은 제 성격을 닮아서 그런지 가끔 통화하면 "내 걱정하지 말고 (엄마) 잘 지내라"고 말합니다."
이 소령은 딸 얘기가 나오자 눈가에 눈물을 글썽였다. 부부 군인인 아빠와 엄마가 여기저기 부대를 옮겨 다닐 때마다 친정어머니가 딸을 봐 주면서 "군인이 하는 일은 굉장히 중요하고 훌륭한 것"이라며 교육을 잘 해놓아 딸이 엄마를 잘 이해하고 있다고 했다. 딸의 장래 목표는 한의사라고 했다. 많이 마른 체형인 아빠(군인공제회 근무)에게 보약을 먹이고 싶기 때문이란다. 이 소령은 "딸이 나보다 더 치밀한 면이 있는 것 같다"며 "하하하"하고 크게 웃었다.
―유엔 평화유지군 근무가 이번이 처음은 아닌 걸로 알고 있습니다.
"지난 2003년 4월부터 10월까지 동티모르에서 평화유지군 생활을 한 게 처음입니다. 유엔군으로는 첫 근무였지요. 구매장교로 식량이나 유류 등을 요청하고 검수하는 일이었습니다. 한국군은 지원체계가 상당히 탄탄한데 유엔군은 어떻게 식량지원 등이 이뤄지고 있는지 궁금했습니다. 한국군과 유엔군의 가장 큰 차이점은 유엔군은 업무의 범위와 책임이 매우 명확하게 분업화돼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아이티에서 일하는 한국 대표로 선발돼 유엔소속으로 다시 일할 수 있다는 건 제게 큰 영광입니다."
―지난 17일에는 아이티를 방문한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을 만났는데요. 기분이 어땠습니까?
"제가 근무하는 유엔군의 통수권자이기 때문에 '충성!'하고 거수경례를 했습니다. 반 총장께서 '잘 지내느냐, 아주 잘 하고 있다'고 칭찬을 해주셨습니다. 그 얘기를 들으니까 가슴이 뭉클하고…. 총장님을 보는 순간 꼭 아버지가 오신 것 같아 눈물이 날 것 같았습니다. 미누스타에서 함께 일하는 다른 동료들이 저를 무시 못 하고 존중하고 있는 건 반 총장님 덕분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앞으로 목표는 무엇입니까?
"제 좌우명은 불광불급(不狂不及·미치지 않으면 도달할 수 없다)입니다. 뭐든지 과감하게 덤벼들고 할 수 있을 때까지 열심히 해야죠. 아이티 근무에 최선을 다하는 게 현재 최고 목표입니다. 어디서든 쓸모있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가장 먹고 싶은 한국 음식은 무엇입니까?
"된장찌개가 먹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