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최유식 베이징특파원
지난해 10월 중국 서부 최대도시인 충칭(重慶)에서 열린 한중 투자교류회 IT(정보기술) 분과회의에는 국내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중국 본사 임원과 실무자 40여명이 참석했다. 중국 정부의 역점 사업인 서부대개발에서 기회를 잡기 위해 대거 날아온 것이다.
충칭시측은 중국어 통역을 준비했지만, 개회 시작 10분도 못 돼 어색한 분위기를 감지했다. 중국어 설명 내용을 한국 기업인들이 이미 알아듣고 있어 통역이 필요 없었던 것이다. 한국측 발표 시간에는 U시티 등 첨단 IT프로젝트에 대한 세련된 중국어 프레젠테이션이 이어졌다. 중국측 참석자들 사이에 "정말 한국 사람들 맞느냐"는 감탄이 나왔다.
중국에 진출한 우리 기업들은 지난 한해 글로벌 금융위기 속에서도 사상 최대의 매출과 수익을 올렸다. 삼성그룹 중국 본사는 중국 내수시장에서만 130억달러, 수출을 포함하면 310억달러의 매출을 올렸다. LG디스플레이의 중국 매출은 2008년 60억달러 선에서 120억달러로 뛰었다. 사상 최대 실적을 거둔 베이징현대의 매출액도 70억달러 전후에 이르고 있다.
이런 약진(躍進)은 중국 정부의 과감한 경기 부양책이 밑바탕이 됐다. 하지만 중국 진출 15년이 넘어가면서 중국 시장을 이해하고 적응하는 우리 기업의 깊이와 노하우가 한 단계 도약한 것이 근본적인 동력(動力)이라고 할 수 있다.
2000년대 초·중반까지도 한국 기업 중엔 중국시장에 적응하지 못해 불필요한 수업료를 내는 곳이 속출했다. '관시(關係)' 중심의 낯선 비즈니스 문화, 복잡한 인·허가 절차, 중앙·지방 정부 간 역학(力學)관계에 대한 이해 부족이 우리 기업들의 발목을 잡았다. 이런 경험을 바탕으로 중국시장에 대해 눈을 뜨기 시작한 것이 최근 3~4년 사이의 일이다.
기업들은 현지 경제연구소를 대폭 확대 개편해 중국 시장에 대한 이해와 판단력을 높였고, 중국 경제계 전문가들과의 교류망을 넓혀 나갔다. 중국 본토와 홍콩 출신 석박사급 인력을 20명 가까이 고용한 중국삼성경제연구원이 대표적인 예다. 이 연구원의 고문진에는 중국 경제·경영학계의 내로라하는 인물들이 대거 포진해 있다.
철저한 현지화(現地化)도 한몫을 했다. 기존 아반떼보다 차량 내부를 넓히고 뒷모습의 볼륨감을 키운 현대차의 중국형 아반떼 '위에둥(悅動)'은 지난 한해 25만대 이상 팔리면서 중국 내 2위의 베스트셀링 카가 됐다. 현대차 중국 판매를 94%나 끌어올린 일등공신이었다.
주요 대기업은 그룹 최고 인재를 중국 시장에 투입하고 있다. LG전자는 지난 2008년 브라질 시장에서 LG를 1위 IT기업으로 키운 해외마케팅 전문가를 중국 시장에 투입했다. SK그룹도 지난해 말 중국 통합법인 총괄 사장에 그룹 지주회사인 SK㈜의 최고경영자(CEO)를 배치했다. 그룹의 핵심을 중국 시장에 보낸 것이다.
민간의 움직임과는 달리 관(官)은 여전히 제자리걸음이다. 베이징에 나와 있는 국책연구소는 대부분 1~2명의 연구 인력을 배치해 두고 있다. 중국 신문을 정리해 뉴스레터를 만들고, 한국에서 오는 손님을 안내하는 데만도 힘이 부친다. 자체 연구나 중국 정·관·학계와의 교류는 엄두도 못 낸다. '중량급' 류우익 전 청와대 비서실장이 주중 한국대사에 임명됐지만 민(民)의 변화를 따라잡으려면 관(官)이 가야 할 길은 아직도 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