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故허원근 일병.
26년만에 '자살서 타살로' "지휘관 지시로 은폐 시도"
26년 전인 1984년 4월 2일 강원도 최전방부대 7사단 폐유류창고 뒤편. 머리에 한발, 가슴에 두발 총상을 입은 중대장 전령 허원근(당시 21세) 일병이 싸늘한 주검으로 누워 있었다.현장에서 수거된 M16소총 탄피는 2발. 헌병대의 조사 끝에 사인(死因)은 자살로 처리됐다.
이후 26년간 허 일병 유족은 "타살이 자살로 은폐됐다"고 했고, 2002년 재조사에 나선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와 군 당국의 결론은 각각 "타살"과 "자살"로 갈렸다. 이른바 허원근 일병 의문사 사건이다.
이 사건에 대해 3일 서울중앙지법 민사36부(재판장 김흥준)는 "타살"이라며 "국가는 허 일병 유족에게 9억 2000만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허 일병 유족이 2007년 낸 소송에 대해 2년 9개월 만에 내린 법원의 1차 결론이다.
재판부는 타살결론을 내리면서 "새롭게 증거를 수집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며 "상호모순되는 당시 중대본부 요원들의 진술도 배제했다"고 했다. 무려 26년이라는 시간의 벽(壁) 앞에선 진실 규명 노력도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재판부는 무엇을 근거로 '타살'이라고 결론지은 것일까. 재판부는 "객관성이 남아있는 (허 일병의) 사체와 이에 관한 법의학적 소견에서 실체파악을 출발했다"고 했다.
①사체는 옮겨졌다=재판부는 허 일병은 폐유류창고가 아니라 다른 곳(막사 안)에서 머리에 치명상을 입은 뒤, 폐유류창고로 옮겨졌을 가능성이 높다고 봤다. 법의학적 소견으론 가슴 부위에 입은 2발의 총상이 머리부위 총상 이후에 발생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사건 직후 헌병대가 현장에서 탄피를 2발밖에 수거하지 못한 것도 이를 뒷받침하는 방증이라고 재판부는 판단했다. 허 일병은 사고당일 새벽에 막사 안에서 머리에 치명상을 입은 뒤, 오전 11시쯤 누군가에 의해 폐유류창고로 옮겨져 가슴에 추가로 2발의 총격이 가해졌다는 것이다.
②부대원들의 '수상한' 행동=사건 당일 허 일병 부대 중대장 김모씨는 자신의 전령이던 허 일병이 아닌 다른 부하를 데리고, 전방철책 순찰에 나섰다. 중대장은 평소 철책순찰을 한 적이 없다는 것이 확보된 관련자들의 진술이다. 재판부는 때문에 "알리바이를 확보하기 위한 것으로 짐작된다"고 판단했다.
중대본부 요원들은 중대장이 철책 순찰을 하는 사이 막사 물청소를 실시했다. 헌병대 조사가 나오기 전에 증거를 인멸하려한 시도라는 것이 재판부 시각이다.
- ▲ 허원근 일병 사망사고에 대한 국방부 사고현장 조사반의 현장 검증.
◆허 일병을 죽인 사람은 누군가
의문사위는 2002년 조사에서 허 일병에게 총을 쏜 사람은 당시 부대원이던 A중사라고 지목했다. A중사는 사건 전날 벌어진 '진급축하연'때 술에 만취해 난동을 벌였다. 하지만 재판부는 "A중사가 허 일병에게 총을 쐈다고 보긴 어렵다"고만 밝혔다. 총을 쏜 사람에 관해선 "중대본부에 있던 누군가"라고만 언급해, 물음표로 남겨뒀다.
때문에 이 사건을 둘러싼 진실공방은 완전히 끝나지 않은 상황이다. 국방부도 항소하겠다고 밝혀, 항소심에서도 공방이 이어지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