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공주의자면서 김일성 조문했던 '북한통'
"북 강경파, 김일성 사망당시 '수령 장례식 서울서 치르자' 움직임도…"
“김정운 시대 되면 북한 경직성 완화될 것”
<이 기사는 주간조선 2062호에 게재되었습니다.>
박보희(朴普熙·79)가 돌아왔다. 박씨는 리틀엔젤스예술단, 유니버설발레단, 선화예고, 뉴욕시티 트리뷴, 워싱턴타임스, 세계일보 등을 경영하며 문선명 총재에 이어 명실상부한 통일교 2인자로 군림했던 인물이다. 한동안 불미스러운 사건에 연루돼 모습을 감추었던 그가 최근 ‘UN군 한국전 참전 60주년 기념사업회’ 추진위원장을 맡으면서 활동을 재개한 것이다.
- ▲ photo 이상선 조선영상미디어 기자
박씨가 주도해 만든 기념사업회는 지난 6월 25일 서울 광진구 능동 유니버설아트센터(구 리틀엔젤스예술회관)에서 참전용사 400여명이 참가한 가운데 성대한 기념식을 갖기도 했다. 기념사업회 측은 “6·25전쟁 발발 60주년이 되는 내년에 리틀엔젤스예술단과 함께 한국전에 참전한 유엔군 16개국을 순방하며 참전용사와 가족들을 초청해 추모행사 및 기념공연을 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기념사업회 회장으로는 백선엽(89) 예비역 대장과 미 하원의장(1999년)을 역임한 데니스 해스터트(J. Dennis Hastert·67)씨가 공동으로 선임됐다.
박보희 위원장이 6·25전쟁에 지대한 관심을 쏟는 이유는 간단하다. 그 자신이 6·25 참전용사이기 때문이다. “1950년 6월 1일 육군사관학교에 들어간 지 채 한 달이 안 돼 전쟁이 발발했습니다. 당시 계급과 군번도 없는 일종의 학도병이었죠. 개전 직후 M-1 소총 한 자루와 실탄을 지급 받고 경기도 포천에 배치됐습니다. 사관학교를 졸업하기도 전에 사관생도가 참전한 전쟁은 아마 6·25가 처음일 겁니다.”
사관생도로 6·25 참전… 포천서 첫 전투
미국 군사유학 후 엘리트 군인으로 승승장구
그는 “개전 초기 최신예 소련제 탱크를 앞세우고 성난 파도처럼 진격하는 북한군을 당할 수 없었다”고 회고했다. 북한군은 변변한 무기도 갖추지 못한 풋내기 사관생도들을 무시하다시피 수도 서울로 밀고 내려왔다고 한다.
“사관학교 동기생 333명 가운데 79명이 포천전투에서 전사했습니다. 또 개전 3일 만에 수도 서울이 적에게 떨어졌습니다. 졸지에 적 후방에 갇혀 버린 거죠. 그래도 사관생도 자존심에 ‘후퇴는 없다’는 심정으로 그곳에서 3일을 버텼습니다. 후에 경기도 시흥에 있던 육군본부로부터 ‘서울이 적에게 함락됐으니 각개격파로 수원까지 내려오라’는 명령을 받고 할 수 없이 발길을 돌렸습니다. 적에게 발각될 염려가 있어 단체행동은 불가능했죠. 분대별로 나누어서 지금 광나루에서 통나무를 붙잡고 한강을 건넜습니다.”
충남 아산의 산골에서 태어나 수영을 전혀 못하는 그였지만 통나무를 붙잡고 죽기살기로 한강을 헤엄쳐 건넜다. 그는 “당시 한강은 지금과 달리 모래사장이 넓게 펴져 있었다”며 “강 가운데 깊은 부분을 지나갈 의지만 있으면 건널 수 있었다”고 회상했다. 현재 그가 통나무를 부여잡고 한강을 건넌 광나루(서울 광진구)에는 그가 창설한 리틀엔젤스예술단이 둥지를 틀었다.
그 후 그는 전쟁 와중에 임시로 꾸려진 육군종합학교를 수료하고 9사단(백마부대) 28연대 장교로 배속돼 강원도 동부전선 일대를 누볐다. 특히 “인해전술로 밀고 내려오는 중공군의 춘계 대공세(1951년 5월)를 막아낸 것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고 했다. 그는 “6·25는 두 개의 전쟁이었다”며 “하나는 북한군과의 전쟁, 또 하나는 중공군과의 전쟁”이라고 강조했다.
전쟁이 막바지로 치닫던 1952년 그는 미 조지아주 포트 베닝에 있는 육군보병학교에 유학하는 기회를 잡았다. 6·25 전쟁 당시 고급 장교 양성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낀 이승만 대통령이 준비한 일종의 장교 양성 프로그램이었다. “시골마을에서 태어나 영어를 한마디도 못했습니다. 그래도 미국유학을 가야겠다는 결심을 하고 자기 전에 성냥개비 100개를 손에 움켜쥐고 영어책을 무조건 100번씩 읽었습니다. 한번 다 읽으면 성냥개비를 1개씩 손에서 내려놓는 식입니다. 밤을 새워 영어 책을 읽다 보면 성냥개비의 빨간 물이 녹아 손에 배어 들기도 했습니다.”
그에 따르면 이 같은 영어학습법은 ‘박보희의 백독(百讀)주의 학습법’으로 후일 육군사관생도들을 중심으로 널리 퍼졌다고 한다.
- ▲ (왼쪽부터)미 군사고문단장 메츄스 장군(왼쪽 세 번째) 전속 부관 시절의 박보희(왼쪽에서 두 번째). / 워싱턴 D.C.에 있는 주미 한국대사관 무관 보좌관 시절의 박보희.
미국에서 돌아온 직후에는 ‘6·25 전쟁 영웅’ 백선엽 장군도 처음으로 만났다. 그를 눈여겨본 백선엽 당시 참모총장이 그를 직접 불러 미 군사고문단장의 전속부관으로 추천한 것이다. 그는 6·25 때 미군보다 앞서 평양에 입성한 백 장군에 대해 지금도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이 있었다면 6·25 때는 백선엽 장군이 있었다”고 말할 만큼 높이 평가한다.
이후 그는 미 군사고문단장 전속부관을 거쳐 당시 최고의 엘리트 집단인 육군본부 정보참모부 전략정보과에서 근무했고 국방차관 보좌관, 주미 한국대사관 무관 보좌관을 거치며 엘리트 군인으로 승승장구하게 된다.
워싱턴타임스 창간, 레이건·부시 지원
대북사업 관여, 김일성과 2차례나 회담
6·25 전쟁은 그가 후일 ‘반공(反共)주의’ 노선을 걷게 된 계기가 됐다. “전쟁의 참화를 온몸으로 겪었기 때문”에 동족상잔의 전쟁을 일으킨 공산주의 집단에 대해 명확한 적대 의식을 갖게 됐다는 것이다. 특히 그의 반공노선은 1957년 통일교를 접하면서 더욱 적극적인 개념인 ‘승공(勝共)노선’으로 강화됐다. 실제 그의 승공노선은 현실 정치에도 영향을 끼쳤다. 후일 워싱턴 D.C.를 기반으로 하는 보수우익지 워싱턴타임스를 창간해 레이건, 부시 등 미국의 보수우파에 힘을 실어 주기도 했다.
특히 그는 “확고한 반공노선을 기반으로 대북문제에 대해 대한민국의 어느 누구보다 깊게 관여했다”고 자부한다. 반공주의자임에도 불구하고 북한과의 대면을 마다하지 않고 역사적인 대북 협상 현장을 지켜왔기 때문이다. 지난 1991년 문선명 총재의 방북과 김일성 주석과의 전격적인 회담도 그의 작품이다.
- ▲ 베이징의 중국대반점(호텔)에서 비밀리에 열린 4자 회동. 홍콩에 있는 대북사업가 박경윤이 김정일 당시 노동당 총비서의 측근으로 활동하던 박종근을 통해 주선했다. 이후 김달현 부총리가 박보희와 회담을 통해 1991년 1차 방북을 성사시켰다. 박씨는 “언론에 처음 공개하는 사진”이라고 했다.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박경윤, 박종근, 박보희, 김달현
“1991년 당시 홍콩에서 대북사업을 하고 있던 재미동포 박경윤(여)씨의 소개로 베이징에서 금강산 국제무역 개발총회사 사장 직함을 가지고 있던 박종근이란 자를 만나게 됐습니다. 박종근은 김정일의 최측근으로 당시 베이징에서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김일성이 살아있었지만 이미 아들 김정일이 사실상 모든 결정을 내리고 있었죠. 박종근을 만난 뒤 북한 김달현(2000년쯤 자살한 것으로 추정) 부총리와 베이징에 있는 중국 대반점(호텔)에서 만나게 됐습니다.”
하지만 북한은 ‘승공주의자’ ‘반공주의자’로 널리 알려진 그에게 우호적이지 않았다. 그에 따르면 당시 베이징에서 열린 4자 비밀회동자리에서 북한의 김달현 부총리는 “박보희씨는 승공운동을 하시는 분 아닙니까. 우리가 왜 만나야 합니까”라고 목소리를 높였다고 한다.
“우리가 방북해도 결국 이익을 보는 것은 오히려 북한이란 점을 설득했습니다. 특히 반공주의자 닉슨이 중공을 방문해 마오쩌둥과 마오타이주를 함께 마시면서 중공이 국제무대에 등장했다는 점을 예로 들었습니다. 또 임수경이나 문익환(1994년 사망)같이 그쪽에서 입맛에 맞는 사람만 데려다가 장난치지 말고 나 같은 반공주의자와 만나야 작품이 나올 것이라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그의 호기가 통했는지 그는 김달현으로부터 김정일의 방북 허가를 받아냈다. 그리고 1991년 11월 30일 문 총재와 함께 전격 방북을 감행했다. 당시는 중국과 수교가 안 된 상태라 그는 서울에서 홍콩과 베이징을 거쳐 평양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함경남도 흥남(2005년 함흥시에 흡수)에서 김일성을 만났다. 그는 지난 1994년 김일성 사망 6개월 전에도 김일성 주석과 ‘금강산 개발 건’을 두고 단독회담을 갖기도 했다. 때문에 그는 “국내에서 유일하게 살아생전의 김일성을 두 번 만난 사람”이라는 평을 듣는다.
그는 “당시 북한이 김일성을 만나는 대가로 따로 돈을 요구하지 않았느냐”는 질문에는 “일절 돈을 달라고 요구하지는 않았다”고 말했다. 다만 “김일성을 만난 이후 홍콩에서 의류와 러닝셔츠, 신발과 양말 등의 구호품을 몇 번 보낸 것이 전부”라고 답했다.
안기부 묵인 아래 김일성 조문 강행
“전쟁 막기 위해 누군가는 가야 했다”
최근 그가 활동을 재개하자 ‘개성공단’ ‘핵실험’ ‘미사일’ 등으로 악화된 남북 문제를 일거에 타결하기 위한 ‘대북특사설’ ‘대북밀사설’로 그가 적임자라는 관측도 조심스럽게 흘러나오고 있다. 실제 그는 세계일보 사장으로 있던 지난 1994년 7월 8일 김일성 주석이 갑작스럽게 사망하자 조문사절로 방북을 감행해 상주(喪主) 김정일과 단독회담을 진행하기도 했다. 당시 ‘6·25 전쟁의 전범(戰犯) 김일성’을 조문하는 문제로 남북관계가 극도로 경색됐지만 그는 사실상 당시 안기부의 묵인하에 북한으로 들어갔다.
“당시 안기부에서 나의 방북을 가장 환영했습니다. 안기부 요원들이 내게 와서 조문사절로 가거든 김정일의 건강상태를 알아봐 달라고 부탁을 하기도 했습니다. 후견인인 아버지(김일성)의 사망에 따라 김정일이 적지 않은 심신의 충격을 받았을 것이란 설이 파다하게 퍼졌기 때문입니다.”
당시 김일성의 갑작스런 사망원인과 함께 후계자 김정일의 건강상태는 국내외 정보기관들의 초미의 관심사였다.
- ▲ 1. 미국 조지 H.W.부시(아버지 부시) 대통령과 찍은 사진. 2. 1991년 12월 6일, 1차 방북 당시 함경남도 흥남(현재 함흥시)에 있는 마전 주석공관에서 김일성을 만났을 때. 3. 1994년 7월 20일, 김일성 사망 직후 추도식날 김정일(당시 노동당 총비서)과 함께 찍은 사진. 박씨에 따르면 그는 “김일성 사망 애도기간 중에 김정일이 만난 유일한 사람”이다. 사진 공개 후 김정일과 손을 꼭 잡고 있는 모습이 화제가 됐다.
“당시 북한 추도식장에서 무더운 여름 더위를 견디지 못하고 쓰러지는 사람들이 속출했었는데 김정일은 2시간가량을 꼿꼿이 서서 버티더군요. 그리고 추도식 이후에도 곧바로 김용순(2003년 사망)이 배석한 자리에서 나와 단독회담을 진행했습니다. 그때 김정일이 대단히 건강한 사람이란 것을 알았습니다.”
당시 그는 “‘지금 남한을 공격하여 일주일 안에 서울까지 밀어붙이고 위대한 수령의 장례식을 서울에서 치르자’는 북한 일부 강경파들의 움직임을 남한에 전하기도 했다”고 한다. 공식 통로가 막힌 극한적인 대치 상태에서 그의 막후 대북 소식통 역할은 지금도 값진 경험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는 당시 방북으로 실정법인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가 적용돼 3년간 원치 않는 해외 망명생활을 해야만 했다. 또 김일성 조문파동이 보수여론을 극도로 악화시켜 재향군인회에서 제명당하는 개인적인 아픔을 겪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당시 초긴장 상황에서 전쟁을 막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북으로 가야 했다”며 “후회는 없다”고 말했다. 또 “1994년 조문파동 이후로는 김정일을 만난 적이 없다”는 말도 덧붙였다.
그는 최근 북한의 후계 문제에 관해서도 나름대로 의견을 제시했다. 특히 김정일 후계자로 급부상한 셋째 아들 김정운에 관해서는 조심스러운 희망도 피력했다. “김정운은 아버지 김정일이 갖지 못한 것을 갖고 있습니다. 바로 중립국인 스위스에서 교육을 받았고 영어를 곧잘한다는 것입니다. 아버지 김정일보다는 국제성을 가진 인물로 보여집니다. 때문에 김일성·김정일 때보다는 북한의 경직성이 조금 누그러지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박보희를 세상에 알린 ‘美 프레이저 청문회’ 사건
‘박동선 게이트’ 연루, 스파이 몰려… 하원서 거침없는 영어 반론, 청문회 스타로
- ▲ 미 하원 프레이저 청문회
‘박보희’라는 이름 석 자가 세상에 널리 알려진 것은 지난 1978년 3월 미 하원 프레이저 청문회(위원장 민주당 도널드 프레이저 의원·8선)가 계기였다. 이 청문회는 박정희 정부의 대미 로비사건인 ‘박동선 게이트’를 조사하기 위해 열린 것이었다. 당시 한국 정부는 “로비스트 박동선에게 로비자금을 제공하고 미국 정치인들을 매수해 주한미군 철수를 막으려 한다”는 의혹을 받고 있었다. 당시 박정희 정권에서 중앙정보부장을 지냈던 김형욱씨마저 청문회에 나와 한국 정부에 불리한 증언을 했다. 더군다나 당시 미국은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공화당 닉슨 대통령이 사임(1974년)하고 베트남 패망(1975년)과 함께 좌파적 성향이 득세하던 시기라 미국의 ‘대 한반도 안보공약’ 자체가 송두리째 흔들리고 있었다.
게다가 이 청문회에는 미국 기득권 세력의 통일교에 대한 반감까지 가세됐다. 1965년부터 미국에 진출한 통일교는 1976년 9월 18일 워싱턴 D.C. 한복판인 모뉴먼트 광장에서 열린 종교집회에서 무려 30만명의 청중을 불러 모으며 급속히 세(勢)를 불려가고 있었다. 이는 마틴 루터킹(16만명), 빌리 그레이엄(24만명) 목사가 주최한 워싱턴 집회 기록을 능가하는 수치여서 적지 않은 충격을 줬다. 때문에 도널드 프레이저 위원장을 비롯한 미 의회인사들은 박정희 정부와 통일교를 싸잡아 “통일교는 한국 대통령 박정희의 지원 아래 초대 중앙정보부장 김종필이 만든 위장 종교집단”이라며 “문선명과 박보희는 중앙정보부(현 국정원·KCIA)의 거물급 스파이”라는 공세를 전개하고 있었다.
하지만 수세에 몰리던 한국은 박보희의 미 하원 프레이저 청문회 증언으로 상황을 일거에 역전시켰다. 그는 청문회에 증인으로 소환된 수세적 위치에도 불구하고 거침없는 영어로 “한국인은 매사에 혐의를 받고, 조롱 받고 있다. 하지만 나는 조금도 후퇴함이 없다. 누가 뭐라고 해도 자랑스런 한국인이기 때문이다. 프레이저 위원장, 귀하가 공산당이 아닌데 왜 한국을 파괴하려 하나”라고 말하며 프레이저 위원장을 도리어 ‘공산주의자’ ‘마귀의 앞잡이’로 몰아붙였다. 당시 그는 거침없는 영어 실력으로 청문회 스타로 떠오르며 ‘자랑스런 한국인’이란 별명을 얻기도 했다. 반면 프레이저 의원은 청문회의 여파로 다음 하원선거에서 낙선했다. 미 하원 프레이저 청문회에 관한 내용은 지난 2000년 그가 펴낸 자서전 ‘나는 자랑스러운 한국인(전 3권)’에도 잘 나와있다.
박 보 희
·1930년 충남 당진 출생
·육군사관학교 2기
·국방부 차관 보좌관
·주미 한국대사관 무관 보좌관
·리틀엔젤스ㆍ유니버설발레단 창설
·뉴욕시티트리뷴 사장
·워싱턴타임스 회장
·세계일보 사장
·현) UN군 한국전 참전 60주년 기념사업회 추진위원장
주간조선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