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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피라미드를 두려워한다

화이트보스 2010. 3. 3. 14:33

  • 시간은 피라미드를 두려워한다

    2010년 2월 27일 토요일, 7:30|허정도[원문보기]

     
    이야기 하나,
    내가 다녔던 고등학교는 지금 그 곳에 없다.
    이십여 년 전 봉암동 골짜기로 이전한 후 그곳에는 덩치 큰 판상형 아파트만 덩그러니 몇 채 있을 뿐이다.
    교복을 입은 채 까까머리 친구들과 함께 뛰놀던 운동장도 없어졌고 여름에는 그늘, 가을에는 낙엽청소를 시켰던 그 큰 활엽수와 그 아래 나무벤치도 사라졌다.
    봉암동에 새로 지은 학교에서 지금의 아이들이 40년 전 나보다 얼마나 좋은 교육을 받는지 모르지만 나의 추억이 녹아있는 공간이 없어졌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나의 고등학교는 생각 속에만 있고 찾아가볼 장소는 없다. 새로 지은 학교에 갈 일이 더러 있지만 행사만 있지 추억은 없어 여느 학교를 찾았을 때와 감흥이 다르지 않다.

                        <지금은 헐리고 없어진 회원동 구 창신학교 본관>

    이야기 둘,
    어릴 때 살던 집을 떠난 지 30년이 되었다.
    나는 좁은 골목길 끝의 낮은 양철지붕 조그만 집에서 27년 쯤 살았다. 흙 놀이에서 축구경기까지 가능했던 그 골목길은 내가 영원히 잊지 못할 회상 장치다. 전에는 컬러였는데 지금은 흑백으로 보인다.
    나는 일 년에 두어 번 쯤 그곳을 간다. 혼자가기도 하고 어떤 때는 아내와 함께 가기도 하는데 그때는 아내에게 어린 시절 이야기를 한 토막 해준다.
    내 어린 날의 흔적을 되새김질할 수 있는 그 작은 집과 좁은 골목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공간이다.
    재개발로 내 추억의 장소가 사라질 것이라 걱정이다.

    장소란 바로 이런 것이다.
    시간을 거슬러 오래 전의 추억을 만나게 되는 곳. 과거 속에서 지금의 나를 확인할 수 있는 곳이다.

    추억이 깃든 교정과 옛집 그리고 좁은 골목이 그럴 진데, 하물며 시민 전체가 기억하는 장소, 위대한 예술가의 흔적이 남아있는 그 역사와 문화의 현장은 얼마나 소중한 곳인가.

    ‘문화와 예술’로 도시공간이 활성화되기 위해서는 도시 곳곳에 역사와 문화가 담긴 장소가 있어야 한다.
    우리의 삶은 장소라고 하는 구체적인 공간에서 이루어진다. 인간의 모든 행위가 그렇다. 커피숍에서 나누는 연인의 속삭임도 서울시청 앞 광장의 정치집회도 장소를 전제하지 않은 행위란 없다.

    모든 것은 시간을 두려워하지만 시간은 피라미드를 두려워한다.
    유한한 인간에게 시간은 극복할 수 없는 초월적 영역이지만 ‘지나간 시간’이라는 그 절대적 영역을 피라미드가 붙잡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도시와 건축, 그리고 ‘장소’의 위대함이다.
    장소와 시설이 사라지면 기억과 역사는 결정적으로 훼손당한다. 시간을 담은 장소 앞에서 필요한 것은 당장의 개발이익이 아니라 장구한 역사적 문화적 가치다. 우리는 시간과 역사와 문화를 돈으로 대체할 만큼 빈곤하지 않다.

    이런 관점에서 마산의 자랑 '문신'을 볼 때, 예술의 흔적을 담고 있는 도시를 만들기 위해 가장 먼저 시도되어야 할 것은 문신에 대한 연구다. 이미 많이 이루어진 그의 예술세계 연구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예술세계와는 별도로 그의 생애사가 보다 깊이 보다 세밀히 연구되어야 한다.
    구술로 문신의 삶을 회고해 줄 수 있는 분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는 점에서 이 연구는 매우 시급하다.

    그가 어디를 걸었는지, 그가 즐겨 다닌 찻집과 식당은 어디며, 그가 지인들과 자주 찾았던 주점은 어디인지 알아야 한다.
    즐겨 불렀던 노래는 무엇이었는지, 어디에 서서 아름다운 마산만 정경을 그윽이 바라보았는지, 또 그의 어린 시절은 어떠했는지를 알아야 한다.
    그의 흔적이 녹아 있는 장소와 공간이 그를 도시문화산업과 연계시킬 수 있는 중요한 콘텐츠이기 때문이다.

    장소는 문신의 이름으로 이 도시를 부상시킬 수 있는 기회의 통로다.
    ‘노예처럼 작업하고 서민과 함께 생활하며 신처럼 창조한다’는 그의 신념을 느끼기 위해서 더욱 그렇다.
    단지 남긴 작품만으로 문화산업과의 연계를 모색하기에는 도시공간이라는 거대한 사이즈가 받아내기에 부족함이 많다.

    그런 점에서 경남도민일보가 세 명의 연구자에게 의뢰, 작년에 문신 생애사 『그리움의 바다 위에 영혼을 조각하다』를 낸 것은 반갑기 그지없는 일이다.
    문신의 생애사를 통해 그와 관련 있는 시설과 공간이 밝혀졌다면, 이제는 그것들을 어떻게 문화산업과 연관시킬 것인가라는 최종과제가 우리에게 다시 주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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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람재에서 만난 사이클리스트

    2010년 2월 23일 화요일, 8:00|허정도[원문보기]



    '하늘에 안창남, 땅에는 엄복동'

    암울했던 일제기에 자전거 한 대로 민족의 울분을 삭히고 자존심까지 살려주었던 전설적인 자전거 레이서 엄복동(1892∼1951).
    1913년 3월, 한·일 선수들이 함께 참가한 ‘전 조선자전차경기대회’를 우승하면서 민족의 스타로 떠오른 엄복동은 그후 계속되었던 한·일 사이클대회에서 일본을 눌러 나라 잃은 서러움을 달래주었다.
    10년 후인 1923년에는 마산에서도 엄복동의 자전거가 달렸다.
    4월 29일∼30일 이틀에 걸쳐 마산체육회가 주최한 '전 조선자전차경기대회'에서였다.

    그 때 엄복동이 달렸던 코스가 지금 마산의 어디였는지 알 수 없는 점은 아쉽지만, 87년 전 마산에서 전국규모의 사이클 대회가 열렸다는 사실이 주는 도시적 의미는 크다.

    지난 일요일 오후,
    만날재와
    대산 사이의 ‘바람재’에서 열린 ‘마산프로사이클동호회’ 시산제에 참석하였다.
    경남도민일보 사장으로 있을 때 ‘자전거대행진’ 행사를 하며 알게 된 클럽이다.
    자전거 타는 분들이 웬 시산제냐 했더니, MTB(Mountain Terrain Bike, 산악자전거)를 이용해 산과 들을 누비기 때문에 음력 정월 좋은 날을 잡아 시산제를 지낸다고 했다.
    절을 하고 제문을 읽고 잔을 올리는 등의 제사 행위는 일반 시산제와 다를 바 없었지만 제단에 내건 현수막 옆에 자전거를 세워 놓은 점이 달랐다.

                         <시산제를 지내고 있는 마산프로사이클 회원들>
                                        <마산프로사이클 회원들>
                       <자전거도시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이태유 회장>

    제를 지낸 뒤 음식 나눌 때 자전거에 대한 이야기가 오갔다.

    클럽의 이태유 회장은 자전거 때문에 얻는 즐거움과 건강을 자랑하면서 마산도 자전거를 타기 좋은 도시가 되기를 원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이 회장은, MTB는 누구나 탈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일반시민들이 언제 어디서든 이용할 수 있는 생활자전거가 활성화되어야 된다고 힘주어 말했다. 생활자전거가 활성화되면 MTB동호인들은 자연스럽게 늘어날 것이라는 기대감도 보였다.

    여러 회원들이 입을 모아 주문한 말은 만날고개―밤밭고개―청량산으로 이어지는 자전거도로였다.
    “그렇게만 되면 산과 바다가 연결되는 환상적인 자전거도로가 될 텐데, 밤밭고개 도로 때문에 끊어지는 것이 안타깝다” 면서 오버브리지(overbridge)로 청량산까지 자전거길이 연결되면 좋겠다고 했다.

    - 도시를 살리는 자전거 -

    교통수단을 대중교통이나 자전거보다
     개인승용차에 의존하는 비율이 점점 높아지고있다. 도시정책이 이를 부추기기도 한다.
    반시대적이고 반환경적이고 반공공적인 추세다. 서구 선진국에서는 이미 오래전에 폐기시킨 도시정책이다.
    개인이 타는 승용차가 점점 많아진다는 것은 한 사람이 사용하는 도로의 면적과 에너지를 비롯한 각종 자원의 사용량이 많다는 뜻이다.

    우리나라의 국민 일인당 도로연장은 2미터 조금 넘는다. 일본의 1/4, 미국의1/10 밖에 되지 않는다. 이에 비해 연간 일인당 자동차 주행거리는 23,000킬로미터로 일본의 2배가 넘고 땅이 넓은 미국보다도 길다.
    우리 국민들이 이동수단으로 자동차에만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극명하게 드러내고 있는 통계다.
    출퇴근은 물론 주말, 휴가철, 명절 귀성 때, 어디라도 움직이기만 하면 우리는 자동차를 탄다. 도로정체로 한 두시간 길 위에서 보내는 것을 예사롭게 생각할 정도다.
    가까운 거리라도 걷기를 싫어하는 'door to door' 현상은 도시의 교통과 주차문제를 악화시키는 주범이기도 하다.

    이 대안으로도 자전거가 유효하다.

    자전거를 많이 이용하는 도시 중 대표적인 곳이 네덜란드의 그로닝겐이다.
    이 도시의 주민통행 분담률은 자전거가 53%이다. 그럼에도 그로닝겐에서는 자전거도로 지름길 건설과 기존 자전거 노선을 개선 등 완벽한 자전거도로망 구축을 위한 노력을 계속하고 있다.
    독일의 델프트(41%)와 뮌스터(41%), 코펜하겐(34%), 프라이부르그(27%)도 자전거를 많이 이용하기로 유명한 도시다.
    이 선진도시들은 지금도 자전거 이용률을 높이기 위해 다양한 정책을 내놓고 있다. 심지어 코펜하겐에서는 자전거 타는 사람들의 배타적 이용을 위해 자동차 차선과 가로변의 주차공간을 몰수하기도 했다.
    '좋은 점만 있을 뿐, 나쁜 건 하나도 없다'는 것이 그들의 자전거에 대한 생각이다.


                         <그로닝겐 시민들이 자전거를 타고 출근하고 있다>
               <계단을 오르면서도 자전거를 끌수 있도록 배려한 그로닝겐>

    자전거 타기에 마산의 도로사정이 좋지 않다고 불평하는 동호인들이 많았다. 자전거를 타고 나갔다가 당한 어처구니 없는 경험들도 하나둘 내어 놓았다.
    이미 자리잡아가고 있는 창원의 자전거정책을 축으로 마산과 진해에도 자전거 길을 연구 모색한다면 좋은 답을 얻을 것이라는 기대도 함께 나누었다.

    자전거를 타서 그런지 회원들 모두 장딴지가 실했고 표정도 밝았다.
    건강한 모습이 하도 좋아 '나도 곧 자전거를 타겠다'는, 지킬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약속까지 했다.

    엄복동이 힘차게 페달을 밟았을 마산 이 도시에 다시 자전거 전통을 세울 수 있는 길은 없을까?
    마산만이 훤히 내다보이는 바람재에서 산과 바다를 아우르는 통합도시의 자전거 길을 상상했다.<<<

     <추가 ; 바람재 한 구석에 쓰레기가 널려있었다. 아직도 이런가? 싶었다>

                                       <바람재의 쓰레기 더미>
                               <아무렇게 던져 놓은 쓰레기들>

                                 <등산객들이 식사하는 자린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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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도위의 지뢰 '볼라드', 개선이 시급하다.

    2010년 2월 20일 토요일, 7:30|류창현[원문보기]

    걷고 싶은 거리, 걷기 싫은 거리⑤  

    볼라드는 인도 차도사이에 설치하는 차량진입 억제용 말뚝으로 차량으로 부터 상대적으로 약자인 보행자를 보호하기 위한 시설물이다.

    하지만 규정에 맞지 않게 설치되어 보행자를 보호하기 위한 시설이 보행자, 특히 시각장애인에게 불편을 주고, 크고작은 안전사고를 유발하며, 도시미관도 저해시키고 있다.



     

    2006년 1월 28일 시행된 '교통약자의 이용편의 증진법'을 보면 볼라드는 보행자가 부딪쳤을 때 충격을 흡수할 수 있는 재질로 만들도록 규정되어 있다. 길을 다녀보면 알겠지만 이규정에 맞는 볼라드를 보기가 쉽지 않다.
    최근에 탄성을 가진 재료의 볼라드가 간혹 설치되기도 하지만 아직 대부분이 철재나 석재로 만들어져 있다. 보행자에 대한 배려보다 유지관리의 편리성이 먼저 반영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볼라드의 높이는 80~100센티미터로 규정되어 있는데, 이는 보행자의 눈에 잘 띄고 혹시 부딪쳤을 때 무릎이나 정강이가 모서리에 부딪치지 않도록 해 부상을 최소화 하기위한 조치이다. 하지만 이 또한 잘 지켜지지 않아 주의를 소홀히 하면 다치기 십상이다.
    또한 볼라드의 간격은 1.5미터 내외로 하여 보행자나 휠체어의 통행이 원활해야 하나 지나치게 좁은 간격으로 불편을 주는 곳이 많다.

    특히 시각장애인을 위해 밝은색의 반사도료등을 사용하여 쉽게 식별할수 있어야하고 전면에는 점자블록을 설치해 충돌을 예방해야 하지만 잘 지켜지지 않아 장애인에게는 더 큰 위협으로 다가온다.

    실제로 규정대로 설치되지 않은 볼라드에 큰 부상을 당한 시민이 소송을 제기해 지자체가 배상을 한 경우도 있다.
    지금도 알게모르게 크고 작은 안전사고가 빈번히 발생하고 있다.

    현재 우리도시의 부족한 주차공간 문제나 운전자가 보행자를 배려하는 의식수준등을 고려할 때 볼라드는 필요한 시설물이다.

    차량으로 부터 보행자를 보호하는 원래의 기능을 다하면서 보행에 방해를 최소화 하기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창원 용호상업지역. 볼라드를 대신해 나무를 심어 차량진입을 막고 미관도 향상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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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의 도시이야기, 마산, 볼라드
  • 도강언(都江堰)에 올라 이빙(李冰)을 흠모하다

    2010년 2월 16일 화요일, 9:35|허정도[원문보기]


    중국 사천성 일대를 여행하였다.
    십 수차례 드나든 중국이지만, 보면 볼수록 놀라운 것은 수천수만 겹 녹아있는 역사의 층위다. 대륙은 깊고 넓었으며 언제나 새로운 것을 보여 주었다.

    지구상에 유수한 역사를 가진 나라와 민족이 많지만 중국만큼 볼거리가 많은 나라도 없다. 기기형형한 자연은 물론이고 추측하기 조차 힘든 거석과 미금의 조형품에 이르기까지.
    하지만 천하제일이라는 만리장성도, 인간의 상상력을 뛰어 넘었다는 병마용도, 사천성 여행의 도강언처럼 가슴 요동치는 감동을 내게 주지는 못했다.

    근대의 힘으로도 상상하기 어려운 위대한 수리시설 도강언이 역사에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 250년대이다.
    지금으로부터 2천수백 년 전, 진시황이 만리장성을 쌓기 수십 년 전의 일이다.

    황무지였던 성도평원을 일거에 옥토로 만든 이 수리시설은 진(秦)나라의 지방 관료에 불과했던 촉군 태수 이빙(李冰)에 의해 건설되었다.

    도강언은 사천성 서북 고산지에서 발원하여 양자강 상류로 흐르는 민강의 물을 농업용수로 이용하기 위한 수리시설이다.
    사천을 일러 흔히 천부지국(天府之國)이라 부르지만 도강언이 만들어지기 전까지는 그런 말이 사용되지 않았다.

    사천지방은 서북이 높고 동남이 낮은 지리적 조건을 가지고 있다. 고산지대에서 시작되는 민강은 심산협곡을 지나면서 점차 수량이 증가해 사천의 성도분지에 이르러서는 물결이 세지면서 강의 규모도 커진다.
    포악해진 강물은 낮고 약한 제방을 무너뜨렸고 범람한 물은 성도 평원을 불모의 땅으로 만들었다. 상류로부터 내려 온 흙과 모래가 강 곬을 높인 탓에 강물이 제방을 넘었던 것이다.

    아직 미개했던 백성들은, 민강에 탐욕스럽고 독한 용이 살고 있어서 수마가 생긴다고 믿었다.
    하여 독룡의 마음을 풀기 위해 매년 몸에 상처 나지 않은 깨끗한 처녀 둘을 산채로 물속에 떠밀어 희생시켰다.
    사천 백성들에게 민강의 홍수는 하늘이 내리는 재앙이었다.

                        <도강언으로 강물이 수백 갈래로 나누어지는 모습>

    천형(天刑)처럼 피할 수 없던 자연의 섭리, 그 숙명 앞에, 민강의 물길을 조절하여 수해를 막아 성도평원을 옥토로 만들겠다고 태수 이빙이 나섰다.
    백성들의 목숨과 재산을 송두리째 빼았던 거대한 폭류를 잘게잘게 갈래를 나눠 순하고 유익한 농업용수로 바꾸는 대(大) 토목공사.
    이것이 역사적인 도강언 프로젝트의 시작이었다.

    도강언의 시설은 분수제(分水堤)의 역할을 하는 어취(魚嘴)와 수량과 토사를 조절하는 비사언(飛沙堰), 암산을 뚫어 물길을 돌린 보병구(寶甁口)가 있다. 이 세 시설은 따로 있으나 서로 긴밀하게 연관되어 취수와 배수, 토사배출 등 강물의 곡류현상과 침식, 운반, 퇴적의 원리를 고스란히 적용하였다.

    물고기 주둥이를 닮은 어취에서 내강과 외강으로 나누어진 강물은 네 갈래 여덟 갈래 식으로 총 5백여 갈래의 인공 강으로 변했다. 물은 성도 대평원을 옥토로 관개하였으며 내륙수운용으로도 사용되었다.

    도강언 주변 일대는 성도나 인근 지역 사람들이 쉴 수 있는 아름다운 공원이기도 했다. 울창한 숲 속에서는 특유의 목소리를 내는 사천 매미가 왕왕거리며 울어댔고, 서북쪽의 산록에서는 시원한 고원 바람이 강을 따라 내려왔다.
    또한 경내에는 이 수리시설에 공을 세운 이빙에서부터 삼국시대 이곳을 지키기 위해 언졸(堰卒)을 두었던 제갈량을 비롯하여 현대의 인물, 예컨대 모택동, 등소평, 강택민 등도 자신의 자취를 남기고 있었다.
    도강언은 단지 수리시설만이 아니라 고대부터 현대까지의 중국역사가 압축된 현장이었다.

    한 공간 속에 자연과 역사와 과학이 공존한다는 점에서 도강언은 중화민족문화의 깊이는 물론, 인간과 자연이 조화롭게 공존해야 한다는 진리를 사실로서 증명해 주고 있었다.

    이 수리시설은 2천 2백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사천백성의 풍부한 농작물 생산을 가능케 해주고 있다. 실로 오늘에 이르기까지 도강언 때문에 얻은 사천성 민초들의 물질적 이익은 말로 헤아리기 어렵다.
    이곳 사천성을 이른바 천부지국(天府之國)으로 만든 것이다.

    이빙이 관운장과 더불어 신앙의 대상으로 까지 추앙받는 까닭은 바로 이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처럼 전대미문의 대 수리시설을 설계 시공한 이빙은 누구인가?

    그는 자신의 평생에 관한 어떤 자료도 남긴 바 없다. 단지 견고한 제방만 남겨두어 후세 사람들로 하여금 그의 삶을 추측케 할 뿐이다.
    2천 수백 년이 지난 지금, 이 위대한 수리시설은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문화유산으로까지 지정되었지만 정작 이를 만든 이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별로 없다.

    다만, 진(秦)이 촉(蜀)을 멸하여 이곳에 촉군(蜀郡)을 설치한지 60년 되던 해, 곧 기원전 256년 그가 촉군 태수로 임명되었으며 천문지리에 능하였고 실지 고찰을 중시하였다는 사실과 수맥에도 밝아 염정을 파서 촉군의 소금문제를 해결하였다는 정도가 알려져 있을 뿐이다.

    저명한 중국의 역사학자 위치우위(余秋雨)는 중국역사상 가장 감동적인 건축물은 만리장성이 아니라 도강언이라고 했다.
    도강언의 외관상 규모가 만리장성처럼 거대한 것은 아니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천년의 복락을 제공하고 있기 때문이다.
    만리장성이 드넓은 공간을 차지했다고 말한다면 이곳은 아득한 시간을 차지했다고 말할 수 있다. 만리장성은 이미 그 사회적 기능을 상실한지 오래되었지만 이곳은 지금까지도 수많은 민중을 위해 맑은 물을 보내주고 있다.
    이곳이 존재했기 때문에 가뭄과 장마가 끊일 새 없던 사천 평원은 천혜의 조건을 가진 땅이 될 수 있었다.

    중국민족에게 극심한 재난이 닥쳐올 때마다 이곳은 안온하게 민족을 보호하고 포근하게 적셔주었다. 그렇기 때문에 전혀 과장됨이 없이 이곳은 영원히 중국 민족에게 생명의 물을 대어 주는 원천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곳이 존재했기 때문에 제갈량과 유비의 지략이 꽃필 수 있었고 이백과 두보의 시문이 존재할 수 있었다.
    시기적으로 가깝게는 이곳으로 인해 중국이 항일전쟁의 와중에서도 안정된 후방을 지닐 수 있었다.

    이곳의 물줄기는 만리장성같이 화려하지 않지만 촉촉이 대지를 적시고 살며시 땅 속으로 스며들어 끝없이 이어진다. 따라서 그 길이로 보면 결코 만리장성보다 짧다고 할 수 없을 만큼 이어진다.
    만리장성의 문명이 딱딱하기 이를 데 없는 조소(彫塑)라고 한다면, 이곳 도강언의 문명은 살아 숨 쉬는 생활 그 자체이다.

    만리장성은 마치 오래된 자격증을 내걸고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는 듯한데, 이곳은 구석 한 모퉁이에 자리 잡아 마치 전혀 빛나지 않고 아무 것도 바라는 것이 없는 고향의 어머니처럼 그저 무엇인가를 베풀기만 할 뿐이다.
    이곳이 바로 도강언이다.

    자연의 법칙에 대한 해박한 지식, 물리적 원리를 응용하여 완벽한 수리시설을 만든 공학적 능력, 자연재난을 극복하기 위한 강인한 도전정신, 목민관으로서의 신념.

    귀국한 후 한참까지 이빙은 내 주위를 서성거렸다.
    새벽녘, 불모의 땅을 바라보며 한숨 토하는 이빙의 모습이 눈에 어른거렸다.
    어느덧 그는 내게 큰 스승이 되어 있었다.

    내 딴에는 눈 넓힌다고 이곳저곳을 다녀 보았지만 어떤 건축물 어떤 구조물에서도 이처럼 가슴 뛰는 경이로움을 맛보지는 못했다.
    얼굴도 모르는 한 인간에게 이만한 찬사를 보낸 적은 더더욱 없었다.
    소중한 경험이었다. 짧았지만 긴 여행이었다.

    누가 내게 ‘한 인간의 열정이 역사에 얼마만큼 기여할 수 있는가’ 라고 묻는다면, 나는 서슴없이 답할 것이다.
    ‘도강언에 올라 이빙을 보라’

                                    <첫 갈래의 시작점인 어취>
                          <도강언, 하나의 민강이 두 갈래로 나누어졌다>


    배우는 도시이야기, 강택민, 관운장, 농업용수, 도강언, 두보, 등소평, 만리장성, 모택동, 목민관, 민강, 민초, 사천성, 세계문화유산, 소금, 수리시설, 스승, 양자강, 어취, 옥토, 위치우위, 유네스코, 유비, 이백, 이빙, 재앙, 전대미문, 제갈량, 중국, 중국역사, 진나라, 천부지국, 천형, 태수, 프로젝트, 항일전쟁, 홍수
  • 이런 식이면 통합의 미래는 어둡다

    2010년 2월 11일 목요일, 7:00|허정도[원문보기]



    어이없는 주장이 마산시내 간선도로 한복판에 걸렸다.

    ‘통합시 명칭은 마산시, 청사는 (마산)종합운동장으로’






    마창진 통합이 눈앞에 왔고, 출범 전에 결정해야할 것도 많다.
    가장 먼저 등장한 것이 통합시의 명칭과 청사의 위치 문젠데 그 결정을 여론조사로 한다는 소문을 듣고 내건 현수막이다.
    현수막을 보는 순간 얼굴이 화끈했다. 마산사람인 내가 봐도 너무 염치없다 싶었다.
    시내 여기저기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이 걸렸다.
    현수막을 내건 단체명은 달랐지만  문구나 제작방법을 보니 어딘가에서 한꺼번에 의도적으로 제작한 것이었다.
    너무 심한 것 아닌가?
    여론조사용이니 이해할 수 있는 것 아니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이건 아니다.

    창원와 진해도 마산과 같은 상황인지는 모르겠으나, 만약 세 도시가 전부 이런 식이라면 이번 여론조사는 하나마나다.
    나아가 세 도시가 똑같이 이렇게 자기중심적이라면 통합은 차라리 하지 않는 것이 옳다.
    자기 것만 챙기는 형제들은 한 집에 살기보다 차라리 따로 사는 게 더 낫지 않은가?

    통합이 마치 다 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상 아직 첫 걸음도 못 내밀었다.
    통합시의 명칭과 청사의 위치 결정이 그 첫 걸음인 셈이다.

    첫걸음에서 이런 현수막을 도시한복판에 공개한다는 것, 생각해볼 일이다.
    이렇게 한다고 될 일이 아니다. 정당하지도 않다.
    타 도시 사람이 이 현수막을 보면 무슨 생각을 하겠는가?
    이런 자세라면, 될 통합도 안 되는 것 아닌가?

    좋아질 것이라 믿고 추진하는 통합이지만 실패한 사례도 많다.
    모든 통합이 다 성공한 것은 아니다. 성공을 기대하지만 실패할 수도 있다.
    실패는 대체로 자신을 내세울 때 생긴다.
    쉽지는 않겠지만 ‘지금부터 마산 창원 진해는 없다. 통합시만 있을 뿐이다’ 는 자세가 절대필요하다.

    여론조사 너무 좋아하는 것도 문제가 있다.
    도시명칭을 여론으로 결정하는 것은 이해가 되지만 청사의 경우는 다르다.
    청사의 위치는 통합시청의 업무와 역할 등이 결정되고 난 뒤 통합도시의 마스터플랜을 짜면서 다루어야할 문제다.
    만약 통합시에서는 통합시청의 권한을 줄이고 구청에서 업무 대부분을 처리하게된다고 치자. 그렇게 되면 통합시 청사는 클 필요도 없고 위치도 그리 중요하지 않게 될텐데 벌써 위치를 확정짓는 것은 옳은 순서가 아니란 말이다.
    과학적으로 접근할 문제지 여론으로 결정할 문제가 아니다.
    결정이 꼭 필요하다면 세 도시 중 어느 도시에 둘 것인지 합의해두는 정도에서 그쳐야 한다.

    작년 12월로 돌아가 보자.
    마산과 달리 창원과 진해시민들은 세 도시의 통합을 탐탁찮게 받아들였다.
    진통 끝에 시의회가 통과는 시켰지만 두 도시의 시민들 반응은 별로였다.
    하지만 마산시의회의 통합결정은 큰 잡음이 없었다.
    약간의 이견이 있었지만 축하 속에 일사천리로 통과되었다.
    통합에 대한 시민여론도 창원 진해는 50% 남짓했지만 마산은 90%에 육박했다.
    통합을 원하는 강도의 차이가 그만큼 컸다.
    이렇듯 통합을 가장 원했던 쪽이 마산시민이라면, 통합 후에 대한 기대도 마산시민이 가장 크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오히려 마산시민들이 먼저 마음을 비우고 대의를 바라보아야 한다.

    지금 시점에서 가장 중요하고 시급한 것은 ‘통합적 마인드’ 이다.
    자신을 강조하면 할수록 통합의 미래는 어두워진다.
    자칫 잘못하면 세 도시가 반목과 갈등의 수렁에 빠질 수도 있다.

    진정으로 성공한 통합을 바란다면,
    자기 자리에 서되 전체를 보아야 하고, 자신의 주장을 하되 상대를 배려해야 한다.

    오늘의 도시이야기, 마스터플랜, 마창진, 여론조사, 청사위치, 통합, 통합시명칭, 현수막
  • 통합 앞서 마산시민이 해야 할 일

    2010년 2월 8일 월요일, 7:00|허정도[원문보기]


    도시통합은 어제오늘의 일도 아니고 우리들만의 일도 아니다. 유익하고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합칠 수도 있고 나눌 수도 있는 것이 도시다.
    마창진 통합은 당위성도 있다. 역사적인 면과 경제적인 면, 그리고 도시경쟁력의 측면에서 통합해야 할 충분한 이유가 있다.

    통합통해 세 도시의 약점은 보완시키고 강점은 키울 것이다. 나아가 100만 도시의 위상에 맞는 새로운 발전 가능성도 제시될 것이다.
    오래 기다려온 만큼 통합이 가져올 미래에 대한 기대와 비전이 크다.



                                                     <마산 전경>

    하지만 창원 진해시민과 달리 마산시민들은 통합에 앞서 짚어 봐야할 것이 있다.
    진해 창원과 달리 90%에 달했던 마산시민의 통합 찬성률에 대해서이다.

    마산은 수백 년의 역사가 있는 도시다.
    3·15의거, 부마항쟁 등 현대사의 격랑을 몸소 겪은 만큼 어느 도시보다 애환의 농도가 짙은 도시다. 따라서 통합에 대한 기대도 크겠지만 서운한 생각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90%라는 높은 찬성률이 나왔다.

    왜 인가?
    도대체 왜 이 오래된 도시가 인근 도시와 통합되기를 이렇게 바랐는가?
    전국 어떤 도시에도 없었던 90% 찬성률을 두고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사람도 있지만 내 생각은 조금 다르다.
    ‘100만 통합도시’의 새로운 미래가 시작되는 중요한 시점이라, 진실한 눈으로 이 도시의 현실을 바라보고 싶다.

    답은 간단하다.
    그것은, 그만큼 이 도시의 사정이 어렵다는 말이었다.
    통합 외에 다른 희망 찾기가 어렵다는 뜻이었고, 도시경영의 실패를 시민다수가 인정한 결과였다.
    이 도시에 희망만 준다면 다른 건 묻지도 따지지도 않겠다 는 절박함의 표출이었다.
    적어도 내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따라서 마산시민은 통합시 출발에 앞서 물어야 한다, 왜 통합 외에는 이 도시에 희망이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는지.
    그것이 순서다.

    반성 없는 역사는 반복한다.
    국가도 기업도 개인도 그렇다. 도시 또한 마찬가지다.
    잘못 가버린 도시를 잘못 가게 된 원인도 찾지 않고 다시 새 길을 가게 하면, 그 잘못을 반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왜 이 전통 있는 도시가 스스로는 희망을 갖지 못하게 되었는가.
    무엇 때문인가? 책임이 있다면 누구인가?
    말없이 살아왔던 시민들인가?
    시정을 비판했던 시민단체인가?
    7대 도시를 꿈꾸었던 경제인인가?
    3․15 민주 성지를 자랑했던 정치인과 지도층인가?

    돌이켜보자.

    이 도시의 쇠락은 80년대 말부터 시작되었다.
    시대가 바뀌면서 산업구조가 개편되었고, 충분한 인프라를 구축한 창원공단의 기계 산업이 활발해지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기업들이 하나둘 마산을 떠나기 시작했고 사람들도 천천히 짐을 꾸렸다.
    마치 옅은 안개에 옷 젖듯이 조금씩 다가왔지만 눈으로 확연히 볼 수 있었던 변화였다.

    하지만 마산은 멀건이 구경만 하고 있었다. 아니, 구경만 하고 있지도 않았다. 오히려 부추겼다.
    떠날 날만 기다리던 한국철강의 공장 터를 주거지역으로 바꾸어 주었다.
    그 뿐 아니다.
    한일합섬 터는 아예 상업지역까지 끼워 주었다.
    공장 그만하고 땅 비싸게 팔아 챙기고 떠나라’고 부치긴 셈이다.
    그 서류에 시장이 관인을 찍었다. 이 도시 쇠락의 신호탄이었다.
    기업의 이전이야 자유로운 것이지만, 있는 공장을 마산처럼 내보낸 도시는 일찍이 없었다.

    앞 바다를 매립했다.
    사업권을 가진 건설회사는 매립한 토지를 잘게잘게 토막 내 팔고 돈만 챙겨 떠났다. 공공(公共)은 외면하고 쓸 만한 땅은 모조리 팔아 챙겼다.
    그 서류에도 시장의 관인이 찍혔다. 이 도시는 그렇게 허물어져 갔다.

    역전의 기회가 없었던 것도 아니다.
    한일합섬 터에도 한국철강 터에도 기회가 있었고 새로 매립한 신포동 해변에 좋은 터를 잡을 기회도 있었다.
    하지만 기회를 기회로 보지 못했다. 오히려 위기를 결정지우고 말았다.
    쇠락해가는 도시를 빤히 바라보면서도 큰 고민을 하지 않았다.

    2-30년 전의 방식을 새로운 비전이라고, 거기에 미래를 걸어도 좋다고 믿었다. 이미 오래된 낡은 방식의 도시개발과 레드오션의 카드만 들고 있었다.
    바다가 있었지만 이용하지 않았고 천혜의 자연도 방치하고 말았다.
    관심은 그저 ‘뚫고 짓고 메우고 넓히는 것’ 뿐이었다.
    90%의 찬성률은 이에 대한 정직한 평가였다.

    통합 기뻐하기 전에 마산시민은 물어야 한다, 이 도시가 왜 이렇게 되었는지.
    자신에게도 묻고 상대에게도 물어야 한다.
    실패를 반복 않기 위해서 물어야 하고, 통합시의 앞날을 위해서도 물어야 한다.

    이 질문에 답하지 않고는 미래가 없다.
    통합이 되어도 희망이 없고, 100만 도시가 되어도 길이 어둡다.

    희망은 오직 이 질문의 답 속에 있다.
    '오늘 마산은 왜 이렇게 되었는가?'  <<<

    오늘의 도시이야기, 도시통합, 드림베이, 레드오션, 마산시민, 마창진, 매립, 역사, 통합찬성률, 한국철강, 한일합섬
  • 나도향, 김지하 그리고 '산장의 여인'

    2010년 2월 3일 수요일, 7:00|허정도[원문보기]


    '마산도시탐방대' 여덟 번째 길이다.
    1월 30일 오후 1시 반, 걷기 좋을 정도로 포근한 날씨였다.
    우리는 가포로 가기 위해 비움고개를 넘었다.

    마산도시의 끝자락인 가포(자복포, 율구미 포함)는 한 많은 땅이다.
    110년 전, 조선의 운명이 바람 앞의 등불처럼 위태로웠을 때 일본과 러시아가 서로 먹겠다고 각축을 벌인 ‘마산포 사건’의 현장이다.
    잊혀져가는 굴욕의 역사를 되새기면서 겨울 오후 바닷가를 4시간 쯤 걸었다.



    나라 뺏긴 설움만 있는 곳이 아니다.
    가포에는 마지막 꺼져가는 심지처럼 생명이 사그라진 가슴 아픈 현장도 있다. 바로 국립마산결핵병원이다.
    태평양 전쟁이 한창이던 1941년에 상이군인요양소라는 이름으로 세운 결핵전문병원이었지만 지금은 한국 최대의 국립특수의료기관이다.

    우리는 병원 건너편 숲 속에 있는 ‘산장병동’ 터를 찾아 들어갔다.
    이곳은 노래
    ‘산장의 여인’의 애절한 주인공이 마지막 생을 보낸 곳이다.
    세상에 버림받고 사랑마저 물리친 그 여인의 가슴 아픈 사연이 겨울 낙엽 밑 어딘가에 숨어 있기라도 하듯 기대를 안고 숲으로 들어갔다.



     <국립마산결핵병원입구(위)과 건너편 '산장병동'이 있던 숲으로 들어가는 길>

    울창한 숲 속에는 산장이었다는 것을 한 눈에 알 수 있는 작은 건물의 흔적을 여기저기에서 찾을 수 있었다.
    카테이지(cottage)라 불렀던 2인용 병사(病舍) 10동과 부속건물들의 흔적이었다. 일제 때 세웠지만 1950년대 후반에 모두 철거된 뒤 남은 잔해였다.
    썩을 것들은 이미 썩어 없어지고 수십 년 세월에 이긴 것들만 남아 있었다. 건물의 구조와 규모는 잔해만으로도 충분히 짐작이 가능하였다.
    사방에 콘크리트 기초가 둘러 진 것으로 보아 입원실이었음직한 자리에 한 아름드리 나무가 자라 서있었다. 병들어 쓰라린 가슴을 부여안고 외로이 살았던 여인이 떠난 뒤 긴 세월이 흘렀음을 말해주었다.


                                 <병사(病舍)와 부속건물의 잔해>

    지금은 OECD가입국까지 되었지만, 한 때 대한민국은 ‘결핵왕국’이라는 불명예스러운 별명이 있었다. 대부분 폐결핵이었다.
    결핵은 가난에 의한 비위생적인 생활관습이 주요 원인으로 선후진국을 구별 짓는 사회상징 중 하나였다.

    변변한 치료약조차 없었던 시절, 폐결핵에는 맑은 공기가 최고의 약이었다.
    하여 물 좋고 공기 좋기로 전국최고였던 마산과 인근에 결핵환자를 위한 시설들이 곳곳에 들어섰다. 6·25전쟁 시기에 절정을 이루었다.
    도립마산병원, 국립마산요양소, 마산교통요양원 외에 마산상고 교사(校舍)를 징발해 급히 세운 국립신생결핵요양원, 결핵전문 제36육군병원, 공군결핵요양소, 진해해군병원결핵병동 등이 그것이며 결핵을 전문으로 보는 개인병원도 많았다. 바야흐로 마산은 결핵치료의 메카였다.

    결핵은 ‘글쟁이들의 직업병’이라고 불릴 만큼 문인들 사이에 만연되었던 시기도 있었다. 마산결핵병원에도 수많은 문인들이 거쳤고 글자취도 남겼다. 마산문학관 학예사 한정호박사가 정리한 바 있다.

    결핵을 앓다 죽은 대표적 문인들로는 최승구, 나도향, 이상, 이광수, 김유정, 임화, 권환, 이용악, 오장환, 현진건, 채만식, 권태웅 등이고,
    한 때 결핵을 앓았던 문인들로는 백석, 구상, 박철석, 남윤철, 고은, 이형기, 김지하, 김혜순, 천양희, 박정만, 성찬경 등이다.

    일제기에 요양 차 이곳 마산에 왔던 문인은 나도향, 임화, 지하련이었고 광복 후에는 권환, 이영도, 김상옥, 구상, 김지하 등이 이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다.
    이밖에도 함석헌, 김춘수, 서정주 등 유명 문인들이 결핵을 매개로 마산을 오갔다.
    「이름모를 소녀」로 70년대를 풍미하다 요절한 가수 김정호도 이곳에서 생을 마쳤다.

    나도향은 가난과 방랑으로 떠돌다 1925년 요양 차 마산에 와서 3개월 동안 노산 이은상의 집에서 식객노릇을 하며 염상섭에게 보내는 편지형식의 단편 소설 「피 묻은 편지 몇 쪽」을 남겼다. 그 해는 그의 대표작「물레방아」「뽕」「벙어리 삼룡이」를 발표한 나도향 소설의 절정기였다.
    다음 해 그는 스무 넷의 젊은 나이에 폐결핵으로 요절했다.

    엄혹했던 시절,
    김지하는 폐결핵으로 서울시립 서대문요양원과 인천 적십자병원을 거친후 장편 시 비어(蜚語)을 발표, 체포되었는데 폐결핵 때문에 기소되지 않고 마산결핵병원에 강제 연금 당했다.
    그 시절 발표한 글이다.

    벗들
    병든 나를 찾지 마라
    나를 찾지 마라
    펄펄 내리는 눈 속에 갇힌

    머물려거든
    매화 봉우리
    아조아조 향그럽게 머물고
    피우려거든
    더욱더 새빨갛게 꽃피워라
    동백이여
    펄펄 내리는 눈 속에 갇힌

    따뜻한 춘삼월에 만나자 벗들
    눈겨울 외로움 속에
    맑은 향기로 머물었다
    매운 꽃으로 들에 홀로 피어났다
    춘삼월 그 흔한 바람 속에 흐드러져
    수월히 만나자 벗들
    어렵게 수소문하여
    나를 찾지 마라
    병든 나를 찾지 마라
    펄펄 내리는 눈 속에 갇힌          -김지하, 「편지」 전문-


    마리아가 내게 은단을 보내왔다. 마치 사약을 내리듯이, 독한 느낌에 나는 고개를 돌렸다.
    내가 해야 할 일, 그것은 쓰는 일이다. 연필 한 자루와 한 뭉치의 종이, 그것이면 족하다. 나머지는 모두 여기, 그리고 저기에 가득하다.  
                                               
    -김지하, 「가포일기」중-


    사랑도 친구도 가족도 결핵 때문에 잃어야 했던 그 시절,
    가수 권혜경이 부른 ‘산장의 여인’은 전 국민의 심경을 녹아내리게했다.
    애절한 노랫말을 쓴 이는 마산사람 반야월이었다. 그는 진방남이란 이름으로 가수로도 활동했다.
    그가 가수 진방남으로 불렀던 곡은 ‘불효자는 웁니다’이고,
    작사자 반야월로 쓴 노래는 ‘울고 넘는 박달재’ ‘단장의 미아리고개’ ‘소양강처녀’ 등이다.

    6·25 직후 반야월은 고향 마산에서 위문단을 만들어 다양한 활동을 했다.
    한번은 그가 마산결핵병원 환자위문공연에서 자신의 대표곡 ‘불효자는 웁니다’를 한 곡 뽑았는데, 객석 맨 뒤편에서 하얀 옷을 입은 창백한 얼굴의 젊고 아름다운 여인이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이상하다 싶어서 공연 후 사연을 물었더니, 그녀는 병원 건너편 숲속 ‘산장병동’에서 요양 중인 폐결핵환자였다.

    꺼져가는 생명의 끈을 부여잡고 쓸쓸히 살아가는 미모의 젊은 여인에 끌려 작사자 반야월은 가사 한편을 남긴다.
    이 글을 뒷날 마산결핵병원에서 요양하기도 했고 결국 한쪽 폐를 잘라내기까지 했던 「나그네 설움」「번지 없는 주막」의 작곡가 이재호에게 넘겼다.
    「산장의 여인」은 그렇게 세상에 나왔다.

    아무도 날 찾는 이 없는 외로운 이 산장에
    단풍잎만 채곡채곡 떨어져 쌓여있네
    세상에 버림받고 사랑마저 물리친 몸
    병들어 쓰라린 가슴을 부여안고
    나 홀로 재생의 길 찾으며 외로이 살아가네

    아무도 날 찾는 이 없는 외로운 이 산장에
    풀벌레만 애처로이 밤새워 울고 있네
    행운의 별을 보고 속삭이던 지난날의
    추억을 더듬어 적막한 이 한밤에
    임 뵈올 그날을 생각하며 쓸쓸히 살아가


    나이가 들어 울창하게 숲을 이룬 키 큰 나무들,
    가포만에서 불어드는 청량한 바람,
    뚜렷이 남아 있는 병사(病舍)들의 잔해,
    외롭게 살아갔던 여인이 남긴 애절하고 낭만적인 스토리텔링,
    그리고 '산장의 여인'·······.

    이만한 볼거리가 없다 싶었다.
    애처로이 밤 새워 울었던 풀벌레와 행운의 별을 보며 속삭였던 그날 밤의 추억까지 느낄 수 있는 살아있는 숲이었다.

    마산을 찾는 사람에게,
    아니 마산을 찾고 싶도록 만들 수 있는 최고의 근대낭만유산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