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동아 '실용주의'가 나라 발전의 한 동력"
미디어 환경의 급변기에 한국 신문은 어디로 가야 하는가. 조선일보 창간 90주년을 기념하여 한국언론학회(회장 최현철 고려대교수)가 주최하고 조선일보가 후원하는 ‘한국 신문 저널리즘의 성찰 및 미래전략’ 세미나가 11일 한국프레스센터 20층에서 열렸다. ‘한국 신문 저널리즘의 실천에 대한 평가와 성찰’(1주제), ‘신문시장의 다양성과 이념적 분화’(2주제), ‘미디어시장의 다원화와 신문의 미래 생존전략’(3주제)으로 나눠 언론학자와 언론인들이 신문의 현재와 미래를 둘러싸고 머리를 맞댔다.
- ▲ 김민환 고려대 교수
● 김민환 고려대 교수 발표
日帝때 엘리트 육성 강조, 무장투쟁 대신 실력 양성
지금 세계 10대 경제대국…
민주화 운동·실용주의가 서로 존재가치 인정하게
주류 언론이 통합 힘써야…
“미국의 한국학 연구자인 마이클 로빈슨(Robin son) 인디애나대 교수가 나에게 ‘세계에서 가장 못살던 한국이 갑자기 성장한 비결이 뭔가라는 질문을 요즘 많이 받는다’고 말했어요. 한국자본주의의 모순이나 독재에 대해서는 답변할 준비가 돼 있는데, 한국의 성공 비결에 대해서는 답할 말이 별로 없어서 앞으로 이 문제에 연구를 집중해야겠다는 겁니다.”
중진 언론학자 김민환 고려대 교수는 ‘한국 언론 90년의 정신사적 이해’ 발표를 시작하면서 미국 학자 얘기를 꺼냈다. “우리가 이만큼 성장한 정신적 비결은 뭘까. 한국의 성장에 신문의 역할이 컸다면 1920년에 창간한 조선·동아일보가 그동안 강조한 언론의 정신은 무엇일까 하는 질문을 던져봤습니다.”
김 교수는 조선·동아일보 90년을 꿰뚫는 정신을 ‘실용주의’로 파악했다. 특히 “일제 강점기에 민중을 동원하는 ‘민중주도론’이 아니라 지식인과 유산자 유지(有志)에 의존하는 ‘엘리트 중심론’을 고수했으며, 무장 투쟁에 호소하는 폭력주의 대신에 실력을 강조하는 실력양성론을 견지했고, 사분오열하여 상잔(相殘)하기보다 좌우가 한데 모여 다양한 세력의 다양한 목소리를 하나로 엮는 대동단결론을 강조했다”는 것이다.
김 교수는 일제 강점기 두 신문의 ‘실용주의’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라는 문제를 던지면서 인도와 한국의 민족주의를 비교한 로빈슨 교수의 연구를 다시 소개했다. 인도 민족운동은 영국의 식민 지배를 거부하기 위해 자본주의나 근대화까지 부정하고 전통에 집착함으로써 정통성 확보에는 성공했지만, 이런 정통성에 치우친 민족운동이 독립 이후의 인도를 제약했다는 것이다. 또 세계 민족주의 가운데 가장 투쟁적이라는 평을 듣는 아랍민족주의는 정통성에서는 탁월하지만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를 위한 효용성 측면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 ▲ 신문 저널리즘의 활로는 어디서 찾아야 할까. 한국 언론학회 연구자들은“콘텐츠의 수준을 높이고, 독자의 신뢰를 끌어올려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이명원 기자 mwlee@chosun.com
김 교수는 “이제 조선·동아일보가 강조한 실용주의의 효용성을 다시 평가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라고 질문을 던졌다. 민족 해방이나 통일국가 건설, 민주주의 구축이라는 이상적 가치에 천착하면 실용주의에 대한 평가가 인색하지만 근대화나 성공·성장이라는 효용성 측면에서 보면 전혀 다른 해석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한국은 세계 10대 경제 대국의 문턱에 서 있고, 아시아의 어느 나라보다도 앞선 민주체제를 정착시켰습니다. 이젠 우리가 이룩한 것을 긍정적 시각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어요. 민주주의와 자본주의 가운데 민주주의에 더 큰 비중을 두고 살아온 이라면 실용주의자들이 우리 사회를 발전시키기 위해 흘린 땀의 가치를 인정하고, 자본주의에 역점을 두고 살아온 이라면 민주화를 위해 싸운 운동가들의 공을 재인식해야 합니다.”
김민환 교수는 “이 시점에서 주류 언론에 필요한 것은 사회 통합을 위해 다른 사람들의 존재 가치를 인정하고, 서로 타협과 공존이 가능한 지점을 찾으려는 노력”이라고 했다. 토론에 나선 이연 선문대 교수는 “조선·동아일보가 일제 강점기 투쟁에 주력해서 신문사 문을 닫는 게 바람직한지, 독립을 위해 역량을 키우는 것이 바람직한지 묻는다면 후자를 택할 수밖에 없다”며 발표에 공감의 뜻을 나타냈다.
- ▲ 이재경 이화여대 교수
● 이재경 이화여대 교수 발표
"97년 換亂후 언론계 전반에 '政派 저널리즘' 심화"
표현의 자유 확장됐지만 권력 감시 기능은 쇠퇴
"미국은 1990년대 중반부터 새로운 매체의 등장과 통합, 거대 기업의 언론사 합병, 상업주의 확산으로 저널리즘의 수준이 심각하게 저하됐습니다. LA타임스 존 캐롤(Carrol) 편집인은 2004년 미국 전역에 사이비 저널리즘이 창궐하고 있다고 경고했습니다."
'저널리즘의 패러다임 변화'를 발표한 이재경 이화여대 교수는 "1990년대 중반 이후 한국과 미국 언론에 불어닥친 변화는 저널리즘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요구할 만큼 급격하다"고 했다. 미국 언론계는 이에 다각도로 대응했다. 엘리트 기자들을 중심으로 1997년 저널리즘의 기본 원칙을 다시 세우는 '저널리즘을 염려하는 언론인 위원회'(Committee of Concerned Journalists)가 생겼다. 뉴욕타임스는 최고의 저널리즘 수준을 추구하기 위해 갖고 있던 지역 방송사들을 매각했다. 독자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 인터넷을 통해 담당 에디터와 독자의 쌍방향 소통을 시도하는 '편집국과의 대화'를 신설했고, 옴부즈맨제도인 '시민편집인'을 임명했다.
한국 언론은 1997년 외환위기로 구조조정이 이뤄지고, 온라인 뉴스의 정파적 저널리즘이 심화되면서 패러다임 변화가 진행됐다. 이 교수는 그 결과 표현 자유의 확장, 의제 설정 능력의 다원화, 게이트 키핑의 과점(寡占) 해제 등 긍정적 현상도 있지만 경영 우선 추세, 경영 압박과 정파성에 따른 권력 감시 능력의 쇠퇴, 사실의 상대화, 기사 품질 저하, 정치의 덫에 빠진 방송저널리즘 등 부정적 현상이 발생했다고 지적했다. 이 교수는 저널리즘의 기본 가치에 대한 사회적 합의, 저널리즘 중심의 의사 결정체제 회복, 감시자로서의 기능 회복, 저널리즘의 수준을 높이는 기자 교육 등을 대안으로 제안했다.
토론을 맡은 임영호 부산대 교수는 "신문이 갈 길은 좀 더 특화된 고급 매체로 가는 것"이라면서 "다양한 미디어를 채울 콘텐츠는 결국 신문이 제공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임 교수는 "신문이 살아남으려면 신뢰나 도덕성 같은 브랜드 가치를 쌓는 데도 집중해야 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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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일보 창간 90주년을 기념하여 한국언론학회(회장 최현철 고려대교수)가 주최하고 조선일보가 후원하는 ‘한국 신문 저널리즘의 성찰 및 미래전략’ 세미나가 11일 한국프레스센터 20층에서 열렸다. /민봉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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