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석 기획연재 여자들] <14> 오프라 윈프리
그녀는 불우했고 초라했으나 마침내 아메리칸 드림이 되었다
10대 부모… 가난… 강간… 미혼모… 모든 악조건 이겨내고 타고난 능력 발휘
대중문화 넘어 사회전반에 막강 영향력, 세계 최고의 톱 알파 여성 문화권력자로
객원논설위원 aromachi@hk.co.kr
지난해 연말 미국 캘리포니아 베벌리 힐스에서 열린 기자회견에 참석한 오프라 윈프리. 불우한 환경을 딛고 최고의 자리에 오른 그의 당당함이 엿보인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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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아프리카공화국에 2007년 문을 연 저소득층 교육기관 '오프라 윈프리 리더십 아카데미' 개원식에 참석한 오프라 윈프리가 현지 아동들과 테이프커팅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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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에 살핀 측천무후(624~705)는 남녀 통틀어 당대(當代) 세계 최고의 권력자(가운데 한 사람)였다. 그 시절 당나라의 상대적 힘이 오늘날 미국의 그것에 견주기엔 모자랐을지 모르나, 그녀가 다스린 나라는 군사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세계를 대표했다. 말하자면 측천무후는 오늘날의 미국 여성 대통령 자리에 버금가는 위세를 누렸다.
21세기의 첫 10년이 지나가고 있는 지금, 세계에서 가장 힘 있는 여자는 누구일까? 쉽게 대답하기 힘든 물음이다. 시장이 국가를 압도하고 있는 추세이므로, 오늘날 힘이 있다는 것은 꼭 정치권력이 있다는 것을 뜻하는 것만은 아니다.
그것은 정치권력일 수도 있지만, 경제권력일 수도 있고 문화권력일 수도 있다. 사실 이것들은 따로 놀지 않는다. 그 권력들은 흔히 서로 스며들어 복합체를 이룬다. 정치권력자가 경제에 영향을 끼치는 것만큼이나, 경제권력자가 정치의 향방을 결정한다.
그것을 감안하고 지금 세계에서 가장 힘 있는 여자는 누굴까? 만일 지난해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힐러리 클린턴이 집권했다면, 말할 나위 없이 그녀가 남녀 통틀어 세계에서 가장 힘 있는 사람일 것이다. 비록 대통령이 되진 못했지만, 힐러리 클린턴은 세계에서 가장 힘 있는 여자 후보에 오를 자격이 있다.
21세기의 첫 10년이 지나가고 있는 지금, 세계에서 가장 힘 있는 여자는 누구일까? 쉽게 대답하기 힘든 물음이다. 시장이 국가를 압도하고 있는 추세이므로, 오늘날 힘이 있다는 것은 꼭 정치권력이 있다는 것을 뜻하는 것만은 아니다.
그것은 정치권력일 수도 있지만, 경제권력일 수도 있고 문화권력일 수도 있다. 사실 이것들은 따로 놀지 않는다. 그 권력들은 흔히 서로 스며들어 복합체를 이룬다. 정치권력자가 경제에 영향을 끼치는 것만큼이나, 경제권력자가 정치의 향방을 결정한다.
그것을 감안하고 지금 세계에서 가장 힘 있는 여자는 누굴까? 만일 지난해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힐러리 클린턴이 집권했다면, 말할 나위 없이 그녀가 남녀 통틀어 세계에서 가장 힘 있는 사람일 것이다. 비록 대통령이 되진 못했지만, 힐러리 클린턴은 세계에서 가장 힘 있는 여자 후보에 오를 자격이 있다.
미국 국무장관 자리는 웬만한 나라 최고권력자 자리보다 훨씬 더 힘 있는 자리이니 말이다. 유럽 최강국이라 할 독일의 앙겔라 메르켈 총리도 후보군에 들 수 있겠다. 정치인이 아닌 사람 가운덴 없을까? 적지 않은 사람들이 미국의 방송인 겸 사업가 오프라 윈프리(55)를 꼽을 것이다.
오프라 윈프리라는 이름은 '아메리칸 드림'을 상징한다. 미시시피주의 코시우스코라는 시골에서, 결혼하지 않은 10대 흑인 청소년을 부모로 해 태어났을 때, 이 아이의 미래를 낙관한 이는 아무도 없었다.
부모가 곧 헤어졌으므로, 아이는 친척집을 전전하며 자랐다. 아홉살 때부터, 그녀는 그 친척들이나 이웃들로부터 지속적인 강간을 당했고, 14살 때 낳은 아들을 곧 잃었다.
그러나 그녀는 타고난 명석함과 성실함을 바탕으로 열심히 공부했고, 중고등학교 땐 교내에서 '가장 인기 있는 소녀'로 꼽혔으며, 등록금 전액 장학금을 받아 흑인대학인 테네시주립대학에 진학해 커뮤니케이션을 전공했다. 그녀의 타고난 말솜씨는 고등학교 때부터 지역 라디오방송사의 주목을 끌었고, 그래서 그녀의 방송인생은 이른 시기부터 시작되었다.
오늘날 그녀는 무엇인가? 미국 바깥에까지 널리 알려진 텔레비전 쇼 진행자이면서, 미디어 재력가이자 자선사업가다. 그녀가 달성한 기록은 여럿이다.
그녀가 진행한 '오프라 윈프리 쇼'는 미국 안팎에서 텔레비전 역사상 가장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고, 그녀가 벌어들인 돈은 아프리카계 미국인 가운데 가장 많으며, 그녀가 기부한 돈 역시 아프리카계 미국인으로선 가장 많다.
한 때 그녀는 흑인 유일의 억만장자이기도 했다. 지난해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에서 그녀가 버락 오바마 지지를 선언했을 때, 그 효과는 수백만 유권자를 오바마에게 끌어온 것으로 평가되었다.
오바마의 대통령 당선으로 공석이 된 일리노이주 상원의원 자리를 주지사 블래고제비치가 오프라 윈프리에게 제안하려 했던 것도 놀라운 일은 아니다. 윈프리는 자신이 직접 정치에 뛰어드는 일엔 전혀 관심이 없다고 이를 앞질러 거절했지만, 원하기만 한다면 연방 상원의원 일도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자신감을 보였다.
그녀의 현재를 만든 여러 요소의 첫 번째는 토크쇼 진행자로서의 자질이다. 오늘날 '오르라 윈프리 쇼'라고 불리는 토크쇼를 윈프리가 처음 맡은 것은 1984년 1월이었다. 그것은 시카고 WLS-TV의 인기 없는 30분짜리 아침 토크쇼에 지나지 않았다.
몇 개월이 지났을 때, 그녀 프로그램의 시청률은 대중토크쇼의 황제로 군림했던 필 도나휴의 토크쇼 시청률을 넘겼다. 방송사는 흥분했고, 두 해 뒤 쇼 이름을 '오프라 윈프리 쇼'로 고치고 전국 방영을 시작했다. 그 뒤로는 탄탄대로였다. 오프라 신화가 발동을 건 것이다.
그녀가 텔레비전 토크쇼 진행자로서 지닌 강점은 무엇이었을까? '타임'지의 평가를 들어보자. "오프라 윈프리가 가장 인기 있는 텔레비전 토크쇼 진행자로 그렇게 빨리 떠오르리라 예측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백인 남자들이 지배하고 있는 이 영역에서, 그녀는 덩치 큰 흑인 여자일 뿐이었다. 인터뷰어의 자질로 따진다면, 그녀는 이를테면 필 도나휴의 상대가 안 되었다. 그러나 그녀는 저널리즘적 안목에서 자신에게 부족한 점들을 노골적 호기심, 강인한 유머감각, 그리고 무엇보다도 진솔한 감정이입으로 보충했다.
게스트가 슬픈 이야기를 하면 오프라 눈에도 이슬이 비치기 일쑤였다. 그리 되면 게스트들은 자기들이 아무에게도 얘기하고 싶지 않았던 것들을, 특히 전국 텔레비전의 시청자들 앞에서는 결코 하고 싶지 않았던 얘기들을 어느새 털어놓게 되는 것이다. 오프라 윈프리 쇼는 일종의 집단치료모임이 돼 버린다."
필 도나휴가 연성 토크쇼를 창시했다면, 오프라 윈프리는 그것을 대중화하고 혁명했다. 오프라 윈프리 쇼는 그 때까지의 금기를 깨고 성소수자들(LGBT)을 과감히 출연시켰고, 문학, 자기개발, 영성, 명상 같은 여러 영역의 주제들을 한 그릇에 담았다.
인종과 계급이 그녀의 쇼에서 녹아내렸고, 유명인들과 일반인들이 대등하게 제 의견을 내놓았다. 1993년 그녀가 마이클 잭슨과 한 인터뷰는 텔레비전 프로그램 역사상 네 번째로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는데, 인터뷰 시청률 역사에서는 최고였다.
오프라 윈프리가 손을 댄 게 텔레비전 토크쇼만은 아니었다. 1985년 그녀는 스티븐 스필버그의 영화 '컬러 퍼플'에 출연해 이듬해 아카데미상 여우조연상 후보에 노미네이트되었고, 그녀 자신 하포 프로덕션이라는 회사를 차려 일반영화와 텔레비전영화를 제작했다.
그녀는 또 잡지를 발행하고, 웹사이트를 운영하며, 저술과 라디오 출연에도 관심을 가졌다. 한마디로 오프라 윈프리는 21세기 오디오-비주얼 시대의 만능인이라 할 수 있다.
틴에이저 부모에게서 태어나 틴에이저 때 아이를 낳은 적 있는 여자가 평범한 연애를 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수많은 로맨스 끝에, 그녀는 1986년부터 스테드먼 그레이엄이라는 파트너와 함께 살고 있다. 그들은 당초 1992년에 결혼한다고 공언했었으나, 결혼식을 치르지는 않았다.
그들 사이엔 아이가 없고, 앞으로도(이젠 나이 때문에도 그렇겠지만) 아이를 가질 계획이 없다 한다. 그러나 오프라 윈프리는 손 큰 자선사업을 통해 수많은 '딸'을 두었다. 특히 남아프리카에는 오프라 윈프리를 '어머니'로 여기는 소녀들이 수백 명이나 있다.
오프라 윈프리의 영향력은, 특히 미국에서는, 대중문화를 넘어서 산업에까지 끼치고 있다. 1996년, 광우병을 주제로 삼은 한 쇼에서 그녀가 "햄버거를 먹고 싶은 마음이 없어졌다"고 말하자, 텍사스 육우협회는 그녀의 발언이 쇠고기 생산자들에게 1,200만달러의 손해를 끼쳤다며 비방과 명예훼손 혐의를 걸어 법원으로 달려갔다.
잡지 '배니티 페어'는 "문화에 대한 오프라 윈프리의 영향력은 어떤 대학총장보다, 어떤 정치인보다, 교황을 제외한 어떤 종교지도자들보다 클지 모른다"고 썼고, 칼럼니스트 모린 다우드는 "오프라 윈프리는 이 나라의 톱 알파 여성이다. 그녀는 대통령보다도 더 신뢰를 받고 있다.
힐러리 클린턴이나 마사 스튜어트 같은 다른 성공한 여자들은 지금 자리에 오르기까지 대중적 비난을 많이 받았다. 콘돌리자 라이스조차 부시의 도움과 후원을 받아서야 힘 있는 저명인사가 될 수 있었다. 그런데 오프라에게는 이런 일이 없었다. 그녀의 성공 스토리는 '일로매진'(straight ahead)이었다"라고 썼다.
이 밖에도 오프라 윈프리에 대한 찬사는 무수하다. 그녀는 아마 여성 저명인사들 가운데 동료들이나 대중으로부터 질시나 미움을 별로 받지 않는, 거의 사랑만을 받는 매우 드문 인물일 것이다.
미시시피의 시골마을 코시우스코 빈민구역에서 출발해, 미국 곳곳에 소유한 고가 저택들까지, 오프라는 달리고 또 달려왔다. 불우한 어린 시절을 딛고 최고의 자리에 올랐다는 점에서,
그녀는 버락 오바마보다 차라리 빌 클린턴을 닮았다. 성공으로 가는 길에 큰 장애물이 없었다는 점도 비슷하다. '미국의 꿈'을 선전하는 데 오프라 윈프리만큼 적절한 예도 드물 것이다. 그런데 그 '미국의 꿈'은 공정한 것일까? 미국은 앞으로 또 다른 오프라 윈프리를, 수많은 오프라 윈프리를 낳을 수 있을까?
오프라 윈프리라는 이름은 '아메리칸 드림'을 상징한다. 미시시피주의 코시우스코라는 시골에서, 결혼하지 않은 10대 흑인 청소년을 부모로 해 태어났을 때, 이 아이의 미래를 낙관한 이는 아무도 없었다.
부모가 곧 헤어졌으므로, 아이는 친척집을 전전하며 자랐다. 아홉살 때부터, 그녀는 그 친척들이나 이웃들로부터 지속적인 강간을 당했고, 14살 때 낳은 아들을 곧 잃었다.
그러나 그녀는 타고난 명석함과 성실함을 바탕으로 열심히 공부했고, 중고등학교 땐 교내에서 '가장 인기 있는 소녀'로 꼽혔으며, 등록금 전액 장학금을 받아 흑인대학인 테네시주립대학에 진학해 커뮤니케이션을 전공했다. 그녀의 타고난 말솜씨는 고등학교 때부터 지역 라디오방송사의 주목을 끌었고, 그래서 그녀의 방송인생은 이른 시기부터 시작되었다.
오늘날 그녀는 무엇인가? 미국 바깥에까지 널리 알려진 텔레비전 쇼 진행자이면서, 미디어 재력가이자 자선사업가다. 그녀가 달성한 기록은 여럿이다.
그녀가 진행한 '오프라 윈프리 쇼'는 미국 안팎에서 텔레비전 역사상 가장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고, 그녀가 벌어들인 돈은 아프리카계 미국인 가운데 가장 많으며, 그녀가 기부한 돈 역시 아프리카계 미국인으로선 가장 많다.
한 때 그녀는 흑인 유일의 억만장자이기도 했다. 지난해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에서 그녀가 버락 오바마 지지를 선언했을 때, 그 효과는 수백만 유권자를 오바마에게 끌어온 것으로 평가되었다.
오바마의 대통령 당선으로 공석이 된 일리노이주 상원의원 자리를 주지사 블래고제비치가 오프라 윈프리에게 제안하려 했던 것도 놀라운 일은 아니다. 윈프리는 자신이 직접 정치에 뛰어드는 일엔 전혀 관심이 없다고 이를 앞질러 거절했지만, 원하기만 한다면 연방 상원의원 일도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자신감을 보였다.
그녀의 현재를 만든 여러 요소의 첫 번째는 토크쇼 진행자로서의 자질이다. 오늘날 '오르라 윈프리 쇼'라고 불리는 토크쇼를 윈프리가 처음 맡은 것은 1984년 1월이었다. 그것은 시카고 WLS-TV의 인기 없는 30분짜리 아침 토크쇼에 지나지 않았다.
몇 개월이 지났을 때, 그녀 프로그램의 시청률은 대중토크쇼의 황제로 군림했던 필 도나휴의 토크쇼 시청률을 넘겼다. 방송사는 흥분했고, 두 해 뒤 쇼 이름을 '오프라 윈프리 쇼'로 고치고 전국 방영을 시작했다. 그 뒤로는 탄탄대로였다. 오프라 신화가 발동을 건 것이다.
그녀가 텔레비전 토크쇼 진행자로서 지닌 강점은 무엇이었을까? '타임'지의 평가를 들어보자. "오프라 윈프리가 가장 인기 있는 텔레비전 토크쇼 진행자로 그렇게 빨리 떠오르리라 예측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백인 남자들이 지배하고 있는 이 영역에서, 그녀는 덩치 큰 흑인 여자일 뿐이었다. 인터뷰어의 자질로 따진다면, 그녀는 이를테면 필 도나휴의 상대가 안 되었다. 그러나 그녀는 저널리즘적 안목에서 자신에게 부족한 점들을 노골적 호기심, 강인한 유머감각, 그리고 무엇보다도 진솔한 감정이입으로 보충했다.
게스트가 슬픈 이야기를 하면 오프라 눈에도 이슬이 비치기 일쑤였다. 그리 되면 게스트들은 자기들이 아무에게도 얘기하고 싶지 않았던 것들을, 특히 전국 텔레비전의 시청자들 앞에서는 결코 하고 싶지 않았던 얘기들을 어느새 털어놓게 되는 것이다. 오프라 윈프리 쇼는 일종의 집단치료모임이 돼 버린다."
필 도나휴가 연성 토크쇼를 창시했다면, 오프라 윈프리는 그것을 대중화하고 혁명했다. 오프라 윈프리 쇼는 그 때까지의 금기를 깨고 성소수자들(LGBT)을 과감히 출연시켰고, 문학, 자기개발, 영성, 명상 같은 여러 영역의 주제들을 한 그릇에 담았다.
인종과 계급이 그녀의 쇼에서 녹아내렸고, 유명인들과 일반인들이 대등하게 제 의견을 내놓았다. 1993년 그녀가 마이클 잭슨과 한 인터뷰는 텔레비전 프로그램 역사상 네 번째로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는데, 인터뷰 시청률 역사에서는 최고였다.
오프라 윈프리가 손을 댄 게 텔레비전 토크쇼만은 아니었다. 1985년 그녀는 스티븐 스필버그의 영화 '컬러 퍼플'에 출연해 이듬해 아카데미상 여우조연상 후보에 노미네이트되었고, 그녀 자신 하포 프로덕션이라는 회사를 차려 일반영화와 텔레비전영화를 제작했다.
그녀는 또 잡지를 발행하고, 웹사이트를 운영하며, 저술과 라디오 출연에도 관심을 가졌다. 한마디로 오프라 윈프리는 21세기 오디오-비주얼 시대의 만능인이라 할 수 있다.
틴에이저 부모에게서 태어나 틴에이저 때 아이를 낳은 적 있는 여자가 평범한 연애를 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수많은 로맨스 끝에, 그녀는 1986년부터 스테드먼 그레이엄이라는 파트너와 함께 살고 있다. 그들은 당초 1992년에 결혼한다고 공언했었으나, 결혼식을 치르지는 않았다.
그들 사이엔 아이가 없고, 앞으로도(이젠 나이 때문에도 그렇겠지만) 아이를 가질 계획이 없다 한다. 그러나 오프라 윈프리는 손 큰 자선사업을 통해 수많은 '딸'을 두었다. 특히 남아프리카에는 오프라 윈프리를 '어머니'로 여기는 소녀들이 수백 명이나 있다.
오프라 윈프리의 영향력은, 특히 미국에서는, 대중문화를 넘어서 산업에까지 끼치고 있다. 1996년, 광우병을 주제로 삼은 한 쇼에서 그녀가 "햄버거를 먹고 싶은 마음이 없어졌다"고 말하자, 텍사스 육우협회는 그녀의 발언이 쇠고기 생산자들에게 1,200만달러의 손해를 끼쳤다며 비방과 명예훼손 혐의를 걸어 법원으로 달려갔다.
잡지 '배니티 페어'는 "문화에 대한 오프라 윈프리의 영향력은 어떤 대학총장보다, 어떤 정치인보다, 교황을 제외한 어떤 종교지도자들보다 클지 모른다"고 썼고, 칼럼니스트 모린 다우드는 "오프라 윈프리는 이 나라의 톱 알파 여성이다. 그녀는 대통령보다도 더 신뢰를 받고 있다.
힐러리 클린턴이나 마사 스튜어트 같은 다른 성공한 여자들은 지금 자리에 오르기까지 대중적 비난을 많이 받았다. 콘돌리자 라이스조차 부시의 도움과 후원을 받아서야 힘 있는 저명인사가 될 수 있었다. 그런데 오프라에게는 이런 일이 없었다. 그녀의 성공 스토리는 '일로매진'(straight ahead)이었다"라고 썼다.
이 밖에도 오프라 윈프리에 대한 찬사는 무수하다. 그녀는 아마 여성 저명인사들 가운데 동료들이나 대중으로부터 질시나 미움을 별로 받지 않는, 거의 사랑만을 받는 매우 드문 인물일 것이다.
미시시피의 시골마을 코시우스코 빈민구역에서 출발해, 미국 곳곳에 소유한 고가 저택들까지, 오프라는 달리고 또 달려왔다. 불우한 어린 시절을 딛고 최고의 자리에 올랐다는 점에서,
그녀는 버락 오바마보다 차라리 빌 클린턴을 닮았다. 성공으로 가는 길에 큰 장애물이 없었다는 점도 비슷하다. '미국의 꿈'을 선전하는 데 오프라 윈프리만큼 적절한 예도 드물 것이다. 그런데 그 '미국의 꿈'은 공정한 것일까? 미국은 앞으로 또 다른 오프라 윈프리를, 수많은 오프라 윈프리를 낳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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