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 지방선거 앞두고 벌써부터 충성 맹세·대리 홍보
'민심 대응 문건' 만들고 "몰표 주자" 여론몰이…
문자 메시지·소식지로 단체장 업적 홍보하기도
부인 보내 선거운동 지원… 살아남기 위해 '혼'을 팔아
지난 1월 8일 경남 진주시청 대회의실에서 열린 읍·면·동장 회의에서는 '지역민심 적극 대응조치'라는 제목의 3쪽짜리 별도 문건이 배부됐다. 앞에는 '숙지 후 즉시 파기'라고 적혀 있었다. 문건에는 "'나이도 많은 사람이 두 번 했으면 됐지 3선은 욕심이다'라는 비판에는 '법상 3연임이 가능할 뿐 아니라 60세 이상 시장·군수가 전체의 52%에 달한다'는 논리로 대응하라"는 등 현직 진주시장과 관련된 부정적 여론에 대처하는 방안이 담겨 있었다.이 문건을 만들어 배포한 진주시 신모(55) 과장과 강모(48) 계장은 현직 단체장을 위한 불법 선거운동을 한 혐의로 22일 경찰에 불구속 입건됐다. 진주시 성모(58) 국장은 같은 회의에서 "가장(家長)이 출마한다고 생각하라"며 불법 선거운동을 지시한 혐의로, 이모(55) 동장은 지난 1월 관변단체 월례회에서 "우리 동에서 몰표가 나와야 내 어깨에 힘이 실린다"며 현 시장을 홍보한 혐의로 이날 함께 입건됐다.
경찰 수사가 본격화하자 정영석(64) 진주시장은 지난 19일 3선 불출마를 선언했다. 경찰은 그러나 정 시장과 시 간부들이 조직적으로 관권 선거운동을 한 혐의를 잡고 수사를 확대하고 있다.
- ▲ 이철원 기자 burbuck@chosun.com
6·2지방선거를 70일 정도 남겨놓고 공직 사회의 줄서기가 극성을 부리고 있다. 공직선거법상 공무원 선거개입 금지 조항(60조·85조·86조)은 공무원이 특정 후보 당선이나 낙선을 위해 활동하지 못하도록 하고 있지만, 2006년 6월부터 최근까지 43건이 적발됐다. 선관위는 "음성적으로 벌어지는 공무원 줄서기는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라며 "후보 등록과 함께 선거운동이 본격화되면 공무원 선거 개입이 노골화될 것"이라고 말했다.
선관위에 적발된 '공무원 줄서기'는 휴대전화 문자메시지나 소식지 등을 통해 시장·군수·구청장 업적을 홍보하는 경우가 많다. 작년 8월 부산 사하구청장 비서실장 김모씨는 '제2과학고 유치 확정' 내용의 문자메시지를 구청장 이름과 함께 관내 학교장 등 213명에게 보낸 혐의로 선관위 경고를 받았다.
노골적으로 충성맹세를 하거나, 유권자 앞에서 지지를 호소한 경우도 있다. 경남 밀양시 가곡동장 직무대리 도모(57·6급)씨는 지난 1월 '총력을 다해 2000명 정도를 시장님 편으로 끌어들이겠습니다. 혼신을 다해 목숨을 걸고 일하겠습니다'란 내용의 충성맹세 이메일을 현직 시장에게 보냈다가 이달초 불법 선거운동 혐의로 구속됐다. 작년 5월 충북 괴산군 읍장 안모씨는 지역 축제 행사장에서 "괴산군 인구가 늘고, 상점들이 들어오고, 젊은 사람들이 거리를 활보하는 건 군수님 치적"이라 말해 선관위 경고를 받았다.
◆부인 보내 '대리' 지원
선거운동을 위해 개인 정보가 담긴 단체 명부와 연락처를 비롯, 자치단체 내부 자료를 요구하는 불법 사례도 많아, 공무원들의 문서 유출 가능성도 커지고 있다. 서울 송파구의 한 직원은 "구청장 출마 후보자들이 지역 사정을 잘 아는 새마을운동중앙회나 부녀회, 바르게살기운동협의회 같은 단체 회원 명부와 연락처를 요구한다"며 "각 후보자가 그 명단을 직접 작성하려면 아마 몇 달씩 걸릴 것"이라고 말했다. 심지어 자치단체의 장기 투자사업과 업무 계획, 예산 등을 요구하는 경우도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최동윤 서울시 감사관은 "선거전이 치열해질수록 일부 공무원들이 내부 전자문서 시스템을 통해 비공개 내부 문건을 유출하는 것이 가장 우려된다"고 말했다.
공무원들은 자신이 직접 나서기 어려울 경우 부인을 '대리' 운동원으로 지원하기도 한다. 서울시의 한 국장은 "구청장들의 선거 운동 상당 부분은 구청 직원 부인들이 한다고 보면 된다"고 말했다. 경우에 따라서는 치열한 경합으로 누가 당선될지 모를 때 부인을 상대방 진영으로 보내 '양다리'를 걸치는 경우도 있다. 자신이 밀지 않는 후보가 당선됐을 때 '후환'을 두려워한 일종의 '보험'이다.
◆"승진·좋은 보직 위해 사활 건다"
공무원들이 선거철 줄서기를 하는 것은 자치단체장이 승진과 보직 등 인사의 전권을 행사하기 때문이다. 서울의 한 구청 관계자는 "구청장이 바뀌면 직원 1000~1200명(동사무소 포함) 중 70~80명이 한꺼번에 물갈이되는데, 주요 보직인 총무·감사·기획·공보팀은 거의 예외 없이 바뀐다"고 말했다. 현 단체장이 불출마 선언을 했거나 3선 연임 제한으로 '무주공산(無主空山)'이 된 곳일수록 공무원들이 차기 유력 후보로 누가 거론되는지 지역 정가 동향에 촉각을 곤두세우는 것도 이 때문이다.
정부는 최근 행정 효율성을 떨어뜨리는 공무원 줄서기를 막기 위해 특별 단속에 나서겠다는 방침을 밝혔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자치단체장이 바뀌면 자신을 지지하지 않은 직원들에게 '보복성' 인사를 하는 시스템이 바뀌지 않는 한 공무원들의 고질적 줄서기 관행은 근절되기 어려울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