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가 북송서 들여와 조선왕조도 보관해 온 『통전』 … 세조가 한글로 뜻 풀이 『주역전의구결』 확인
①왕세자책례도감의궤 조선시대 왕세자 책봉 행사가 어떻게 치러졌는가를 기술한 『왕세자책례도감의궤』.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훼손돼 있다. | |
조선시대 왕세자 책봉 시의 행사가 어떻게 치러졌는가를 기술한 『왕세자책례도감의궤』.
일본 왕실의 도서관인 ‘궁내청 서릉(書陵)부’에서 발견한 이 의궤는 고동색 표지가 거의 다 찢겨 나가고 너덜너덜한 상태였다<사진 1>. 너무나 훼손 상태가 심했다. 이 의궤를 열람케 해준 궁내청 서릉부 직원은 “책장을 넘길 때 조심하세요”라고 신신당부하기는 했다. 하지만 자칫하다 종이가 찢겨 나가거나 바스러질 것만 같아 차마 책장을 넘기질 못했다. 훼손이 일본에 의해 이뤄졌다고는 단언하기 힘들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너덜너덜해진 채 일본의 왕실도서관에서 잠자고 있는 조선의 사료를 보게 되니 만감이 교차했다.
의궤는 조선시대 국가나 왕실에서 거행한 주요 행사를 글과 그림으로 남긴 보고서 형식의 책이다. 2007년 『조선왕조실록』 등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조선왕실 기록문화의 정수다. 하지만 조선시대의 소중한 의궤는 우리 땅이 아닌 일본의 왕실 도서관에서 이처럼 남아 있었다. 도쿄 한복판에 위치한 둘레 5㎞의 거대한 황궁. 일왕(일본에서는 천황이라 함)이 사는 곳이다. 황궁 안에는 일왕 내외의 거처를 비롯, 일 왕실을 담당하는 행정부처인 ‘궁내청’이 있다. 그리고 그 안에 서릉부가 있다.
일 황궁 북쪽 ‘기타하네바시(北桔橋) 문’으로 궁내청에 들어간 것은 지난달 16일.
기타하네바시 문에서 출입허가증을 발부받은 뒤 걸어서 왼편으로 2~3분 들어가니 4층짜리 서릉부 건물이 나타났다. 1층 왼쪽 끝 방이 열람실이었다. 복도에 있는 사물함에 모든 소지품을 맡겨야 했다. 휴대전화나 카메라는 물론이고 볼펜·샤프·지우개도 금지였다. 신발도 슬리퍼로 갈아 신어야 했고 화장실에서 한 번, 열람실 안에서 또 한 번 손에 소독약으로 세척을 받아야 했다.
열람실에 들어가니 내부에는 4인용 테이블이 4개 놓여 있고, 서릉부 직원 4명가량이 열람자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하고 있었다.
②경연(經筵) 고려와 조선시대 임금님의 교양도서였던 『경연』. 현재 일 궁내청 서릉부에 3종 17책이 소장돼 있으며, 하단 우측에 ‘經筵(경연)’이란 도장이 찍혀 있다(붉은색 원 안). 일 궁내청 소장도서에서 경연 직인이 확인돼 공개되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左). ③통전(通典) 경연 도서 중 대표격인 『통전(通典)』. 고려시대 송나라에서 수입해 조선왕실까지 이어서 소장했던 책자로 두 왕실에서 내리 소장했던 책은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다고 한다. 국내에도 없고 일 궁내청에 소장돼 있는 것이 유일본이다. 권말에는 고려왕조 숙종 재위 6년인 신사(辛巳)년(1101년)에 송나라에서 수입했음을 보여주는 직인 ‘高麗國十四葉辛巳歲藏書大宋建中靖國元年大遼乾通元年’이 찍혀 있었다. 중국 송나라 연호 ‘건중정국 원년’과 요나라 연호 ‘건통원년’도 1101년에 해당한다. 18년째 해외 문화재 반환 조사를 해온 박상국 한국문화유산연구원 원장은 “‘十四葉’은 14대 왕임을 뜻하는 듯하나 숙종은15대 왕이므로 뭔가착오가 있었던 듯하다”며 “이런 숫자 착오는 옛 자료에선 많이 발견된다”고 말했다. 이 직인 또한 일 궁내청을 통해 처음으로 공개되는 것이다(右). | |
④주역전의구결(周易傳義口訣) 조선시대의 의학과 관습, 군의 역사 등을 소개한 제실도서(帝室圖書)의 대표격인 『주역전의구결(周易傳義口訣)』의 본문. 주역의 본문에 그 뜻을 쉽게 이해하도록 한글로 구결(口訣)을 달아놓은 책이다. ‘乾은 元코 亨코 利코 貞니라’란 문장이 보인다. 원형이정(元亨利貞)이란 봄·여름·가을·겨울의 덕을 나타내는 말로서, 세상 만물은 봄의 덕인 원(元)에 바탕하여 생겨나오며, 여름의 덕인 형(亨)으로 자라게 되고, 가을의 덕인이(利)로 결실을 거두어, 겨울의 덕인 정(貞)으로 갈무리되니 삼라만상의 생장수장이곧 하늘(乾)의 ‘원형이정’의 네 가지 덕에 말미암는다는 뜻이다. | |
조선의 의학과 관습, 군의 역사 등을 소개한 귀중한 유형문화재인 ‘제실도서(帝室圖書)’도 눈에 띄었다. 1910년 경술국치 이후 규장각과 대한제국 제실도서관에 있던 제실도서들이 고스란히 조선총독부로 넘어갔고, 이 중 일부가 일 궁내청에 기증 형식으로 넘어간 것이다.
⑤역대장감박의(歷代將鑑博議) 제실도서의 하나인 『역대장감박의(歷代將鑑博議)』. 이 책은 전국시대의 손무(孫武)에서 당나라 곽숭도(郭崇韜)에 이르는 중국 역대 명장 94명에 대한 기록을 편찬한 것이다. 조선조 임금들이 교양으로 새겨두기 위해 소장하던 것이다. | |
주역의 본문에 1466년 세조가 한글로 구결을 달아 놓은 책이었다<사진 4>. 일 궁내청 왕실 도서관에서 한글로 돼 있는 자료를 보게 되다니, 억장이 무너졌다. 예컨대 ‘先면 迷고 後면 得리니 主利니라’이란 표기 뒤에는 뜻을 풀이해 ‘먼저 하면 미혹하고 뒤에 하면 얻으리니 이로움을 주로 한다’는 해석이 붙어 있었다. 이 책은 임진왜란(1592~98) 때 유출됐던 것이다. 그걸 증명하듯 이 책의 각 권 제일 앞부분에 ‘제실도서지장(帝室圖書之章)’이란 붉은 색 도장이 큼지막이 찍혀 있었다.
이뿐 아니었다. 『역대장감박의(歷代將鑑博議)』란 제실도서도 서릉부에 고스란히 놓여 있었다<사진 5>. 전국시대의 손무(孫武)에서 당나라 곽숭도(郭崇韜)에 이르는 94명의 중국 역대 명장의 인품과 행적, 그들에 대한 후인의 평가를 모아 편찬한 책이었다. 조선조 임금들이 교양으로 새겨 두기 위해 소장하던 것이었다.
다음으로 눈에 뜨인 건 명성황후 『국장도감의궤』였다. 처참하게 시해돼 주검조차 찾지 못한 채 1897년 2년2개월 만에 치러진 명성황후의 국장 모습을 기록한 자료다.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총격한 이유로 ‘명성황후 살해’를 꼽았듯 구한말 역사적으로 가장 중요한 사건과 맞물려 있는 가치 있는 사료다<사진 6>.
⑥명성황후『국장도감의궤』 일본에 의해 시해된 명성황후의 국장 모습을 기록한 『국장도감의궤』의 표지. ‘開國五百四年乙未十月(개국 504년 을미 10월)’은 명성황후가 시해된 1895년 10월을 뜻한다. ‘五臺山上(오대산상)’은 이 의궤가 오대산 사고(史庫)에 소장돼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 |
제2권에는 국장의 모습이 다양한 색채로 정교하게 묘사돼 있었다. 총을 메고 칼을 찬 병사들이 주변을 지키고, 상여 앞으론 곡(哭)을 담당하는 궁녀들이 말을 타고 지나가는 그림들이었다. 행렬의 왼쪽과 오른쪽 각각 둘씩 창과 방패를 든 방상시 4명이 그려져 있었다. 곰 가죽으로 든 붉은 색 가면을 쓰고 4개의 눈을 단 흉측한 얼굴이다. 잡귀의 위협 없이 편안히 잠드시라는 의미였다고 한다. 장례에 쓰일 가마 26가지의 각 형태와 색깔도 세밀하게 묘사돼 있었다. 당대 최고의 화원들이 일일이 손으로 그려내 그림으로 실록을 남겼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입체감이 대단했다. 말을 탄 중대장의 모습이나 말의 뒷모습을 그린 그림을 보는 순간 “어떻게 이렇게 정교할 수가 있나”란 감탄이 절로 나왔다<사진 8>.
⑦명성황후『국장도감의궤』의 권말에 찍혀 있는 주인(朱印) ‘大正11年5月 朝鮮總督府 寄贈(대정11년5월 조선총독부 기증)’이란 도장으로 미뤄 1922년에 이 의궤가 조선총독부에 의해 기증 형태로 일 왕실로 건너갔음을 확인할 수 있다. 왼쪽 원안은 직인 부분을 확대한 사진(左). ⑧『국장도감의궤』의 명성황후 국장 모습이 그려진 그림 국장 행렬 가운데 신하와 병사들이 큰 가마를 호위하며 걸어가는 장면. 당시 행렬엔 26대의 가마가 사용됐고 2035명이 참여한 것으로 알려졌다. 의궤는 여러 권을 만들어 분산 보관한다. 국내엔 서울대 규장각에 다섯 질이 남아 있다(右). | |
도쿄=김현기 특파원
◆의궤=왕비·세자 등의 책봉이나 책례·결혼 등 각종 비슷한 의례(儀禮)가 되풀이됐던 조선 왕실에서 의례의 본보기를 만들고 후대에 전하기 위해 체계적으로 정리한 기록 문건이다. 세밀한 시행절차를 상세한 천연색 그림을 통해 설명하고 있으며 행사에 들어간 물적·인적 자원까지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각종 국가 의식(儀式)의 모습을 이해하는 길잡이로서 사료가치가 대단히 높다.
◆제실도서=조선의 의학과 관습, 군의 역사 등을 소개한 유형문화재다. 규장각과 대한제국 제실도서관에 보관돼 있다 조선총독부 관리들에 의해 상당수가 일본 왕실로 흘러들어간 것으로 추정된다. 국내에는 남아 있지 않는 유일본들의 상당수가 일 궁내청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