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 의사가 주창한 '동양평화론'은
칸트 '영구평화론'서 진일보한 구상"
철학·법학 등 '보편적 사상가'로 분석
국내 연구도 단편적 시각 벗어나야
안중근(1879~1910) 의사 순국 100주년을 맞아 일본 학계에서 독일 비판철학의 대가(大家) 칸트(1724~ 1804)와 안 의사의 사상을 비교하는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안 의사를 일본제국주의를 이끈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행동가로 이해하는 데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동양평화론(東洋平和論)을 주창한 보편적 사상가로 자리매김하려는 시도다. 철학자 마키노 에이지(牧野英二) 호세이(法政)대 교수가 안중근의 동양평화론과 칸트의 영구평화론의 유사성에 주목한 데 이어, 헌법학자인 사사가와 노리가쓰(笹川紀勝) 메이지(明治)대 교수가 두 사람의 사상을 법학적 측면에서 검토하고 나섰다.여순순국선열기념재단(이사장 홍일식)이 24일 백범기념관에서 개최하는 안중근 의사 순국 100주년 국제학술회의에서 '안중근의 재판―안중근과 칸트의 사상 비교연구'를 발표하는 사사가와 교수는 일본인들이 안중근을 이해할 수 있는 통로로 칸트를 주목한다. 사사가와 교수는 법학적 관점에서 칸트의 '영구평화론'의 핵심요소인 '공화제' '평화' '폭군(暴君)/참주(僭主)'를 안중근 사상과 비교분석한다. 칸트는 전쟁 방지를 위해 국가 간의 조약으로 '평화연맹'을 창설하자고 제안했는데, 안중근도 '모든 국가가 자주독립을 실현하는 것이 평화'(심문조서)라고 밝혀서 전쟁 방지의 작용을 한다고 사사가와 교수는 평가한다. 특히 안중근이 군사적·재정적 권력을 갖는 '평화회(會)'를 조직하고 뤼순(旅順)을 거점으로 삼으려 한 것은 칸트의 평화연맹보다 진일보한 구상으로 현재의 유럽연합(EU)과 가깝다는 것이다.
사사가와 교수에 따르면 칸트는 '폭군(暴君)'을 뒤엎는 혁명·저항에 이르지 않는 범위 안에서 점진적 개혁을 주장했다. 안중근도 조선정부의 부패와 타락을 비판하면서 개혁을 추구했다는 점에서 칸트의 개혁론과 겹친다. 흥미로운 것은 안중근이 '군주'가 아니라 '정부'를 폭군으로 봤다는 점이다. 고종이나 순종이 아니라 부패한 관리들이 타깃이었다는 얘기다. 이토 히로부미 처단은 외적(外敵)과의 전쟁이므로 '참주'에 대한 저항으로 정당화할 수 있다는 것이다.
- ▲ 그래픽=이철원 기자 burbuck@chosun.com
한편 일본 칸트협회 회장인 마키노 에이지 교수는 작년 10월 안 의사 의거 100주년을 맞아 열린 학술회의에서 안중근과 칸트 평화론의 유사성을 주장했다. 두 사람은 모두 무력에 의해서는 진정한 평화의 실현이 불가능하고, 평화의 실현을 위해서는 국가가 도덕적인 인간을 육성해야 한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마키노 교수의 주장은 한국 학계에도 영향을 미쳤다. 이태진 서울대 명예교수는 마키노 교수의 주장을 토대로 안중근이 칸트로부터 영향받았을 가능성을 추적했다. 칸트의 영구평화론이 청나라 지식인 양계초(梁啓超)의 '음빙실문집(飮氷室文集)'을 통해 국내에 소개됐으며, 안중근이 빌렘 조셉 신부에게 더 자세한 내용을 문의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일본 학계의 안중근과 칸트 비교 연구는 국내 학계의 안중근 연구가 일대기나 독립운동사 연구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는 것과 대비된다. 이태진 교수는 "일본 학자들의 안중근 연구가 국내에선 보지 못한, 새롭고 보편적인 시각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커다란 자극을 받았다"면서 "국내에서도 다양한 각도에서 폭넓게 안중근을 이해하는 연구가 나와야 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