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에서 순국까지]
하얼빈역 들어온 이토에 '대한독립 방아쇠' 당겨
"독립전쟁 수행 중 적장 포살 日법정서 재판 받을 수 없다"
만국공법 따른 절차 요구해
"죽은 뒤에도 韓·日 양국 협력하길…" 유언 남기고 형장의 이슬로
"코레아 우라!" 1909년 10월 26일 오전 9시 30분 중국 하얼빈(哈爾濱)역에 '한국 만세'라는 뜻의 러시아 말이 울려퍼졌다. 일본 내각총리대신과 초대 조선통감을 지낸 68세의 노(老)정객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3발의 총성과 함께 플랫폼에 쓰러져 있었다. 역사(驛舍) 안을 가득 메우고 있던 러시아 의장대의 군악 소리, 일장기를 흔들던 환영인파의 함성이 일순 사그라졌다.거사의 주인공은 '대한국인(大韓國人)' 안중근(安重根)이었다. 일본제국주의의 조선 침략에 주도적 역할을 한 이토는 러시아 재무장관 코코프초프와의 회담을 위해 특별열차를 타고 하얼빈역에 들어온 직후였다. 안중근은 이토에 이어 그를 수행하던 가와카미 도시히코 하얼빈총영사, 모리 다이지로 궁내대신비서관, 다나카 세이타로 만철이사 등도 쓰러뜨렸다. 그리고 권총을 머리 위로 던진 뒤 '코레아 우라!'를 세 번 힘차게 외쳤다. 이토는 응급처치를 받았으나 가슴과 옆구리, 배에 관통상을 입고 30분 뒤 숨졌다. 11시 40분 특별열차는 이토의 시신을 싣고 떠났다.
- ▲ 1909년 10월 26일 의거 직전 러시아 병사들이 도열해 있는 하얼빈역.
거사 직후 안중근은 달려드는 러시아 헌병에게 현장에서 포박됐다. 역 구내 헌병대 파출소에서 취조받은 안중근은 오후 9시쯤 쇠사슬로 묶인 채 지금의 화위안가(花園街) 97호에 있던 일본 총영사관으로 이송됐고, 지하실 감옥 독방에 수감됐다. 이어 11월 1일 뤼순(旅順) 감옥으로 이송됐다.
- ▲ 안중근을 소재로 한 엽서.
- ▲ 1910년 3월 10일 안중근 의사와 두 동생 정근·공근(왼쪽), 빌렘 신부(등을 보이는 사람)의 옥중면회 장면.
하얼빈 의거로부터 꼭 다섯 달 후인 1910년 3월 26일 오전 10시 뤼순 감옥에서 안중근의 사형이 집행됐다. "나는 동양평화를 위해 한 일이니 내가 죽은 뒤에도 한·일 양국은 동양평화를 위하여 서로 협력해주기 바란다." 서른하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달리한 안중근의 마지막 유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