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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준 기자의 ‘빨치산 루트’ ① 전남 광양 백운산

화이트보스 2010. 3. 26. 08:38

김홍준 기자의 ‘빨치산 루트’ ① 전남 광양 백운산 [중앙일보]

2010.03.26 00:03 입력

구름바다가 일었다, 입산자는 그 속에 묻혔다

여기, 감추려 해도 드러나는 역사가 있다. 건드리기만 해도 터지는 과거가 있다. 해서 실재의 역사요, 금기의 과거다. 빨치산. 혼란의 해방정국에서 선택의 갈림길에 선 사람들. 그들은 산에 드는 길을 선택했다. 그 후의 혼란은 역사가 기록하고, 그 와중에 살아남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 각인됐다. 6·25 전쟁 60주년. 이제 기억 속에 그 역사를 남겨둔 사람들도 세월을 따라 사라져 간다. 하지만 산은 남았고, 앞으로도 홀로 남을 것이다. 그러니 ‘기억엔 없는 역사’를 기억하는 후손은 그저 그 산을 따라가볼밖에…. 한때 빨치산의 해방구였고 수많은 전투가 벌어졌던 그곳. 우로 가는 길, 좌로 가는 길, 좌로 가다 우로 가고, 우로 가다 좌로 가는 길이 수천 갈래 나 있는 산에 들었다.

글·사진=김홍준 기자


구빨치

1 도솔봉 능선길. 구름 위를 걷는 느낌이었다. 백운산은 봉두난발한 듯한 풀과 아담하고 장쾌한 나무, 싱그러운 흙이 뒤섞인 능선코스가 이어진다.
1948년 10월, 여수에 주둔한 국군 14연대는 제주도로 출동 명령을 받는다. 사그라지지 않는 제주 4·3사건을 진압하라는 것이었다. 한데 19일 밤 이 연대의 지창수 상사를 중심으로 ‘반란’이 일어난다. 민간인이 합세했고, 이들은 여수 읍내로 진격했다. 경찰서 등 주요 기관을 점령하고 인공기를 내걸었다. 그리고 나선 순천으로 향했다. 순천에 주둔하고 있던 14연대 2개 중대, 4연대 1개 중대 등이 속속 합류했다. 남원·하동·곡성·구례·보성·광양까지 뻗어나갔다. 진압경찰은 중과부적이었다. 경찰과 우익인사들은 공포에 떨었다. 곳곳에서 즉결처분, 인민재판이 벌어졌다. 한편으로는 식량배급으로 민심을 잡는 노력도 했다. 광주에 여순사건 진압 작전지도부가 차려졌다. 진압군은 81mm 박격포와 L-4항공기로 압박을 가했다. 순천을 탈환했다. 여수 탈환 작전 중 진압군사령관 송호성이 철모에 총탄을 맞고 차에서 떨어져 후송됐다. 외신 기자 1명도 사망했다. 진압군 포위망이 무너져 반란군 주력은 지리산과 벌교 방면으로 탈출했다. 김지회(14연대 중대장)는 반란군 주력을 이끌고 섬진강을 건너 백운산에 입산한다. 남한 빨치산이 본격화되는 시점이다.

“입산하시오?”

구빨치의 본거지였던 백운산으로 드는 초입에 한 촌로가 물어본다. 인적 없는 산길에서 제일 무서운 건 사람이다. 그래서 공손히 대답한다.

“네, 이를테면…입산…이죠.”

빨치산. 그들은 스스로를 입산자(入山者)라고 불렀다. 생계가 막막해서, 혹은 이념 때문에 그들은 입산자가 되었다. 60여 년이 흐른 후 그런 고민이 없는 입산자가 또 산에 든다. 아무도 노려보지 않는 평화로운 산에서 단지 역사를 회상해 보기 위해서.

자연휴양림 임도를 벗어나 남도 제일봉 전남 광양 백운산(1218m)의 흙을 밟았다. 폭신하고 보드라웠다. 휴양림 산책로를 벗어나 등산지도에 표시되지 않은 길을 더듬었다. 도솔봉능선길이다.

2 백운산 상봉에 오르니 구름바다가 일었다. 그 구름 밑에서 억불봉(1008m)과 노랭이봉(804m)은 숨을 고르며 서 있었고 섬진강은 숨을 죽인 채 흐르고 있었다.
전남 광양 백운산은 빨치산에게 천혜의 요새였다. 민가가 가까워 ‘보급투쟁(식량을 구하는 행위)’이 비교적 쉬웠고, 바로 옆 섬진강에서 피어오르는 안개는 그들의 몸을 숨겨줬으며, 이어지는 봉우리는 ‘치고 빠져나오기’에 훌륭한 방어막이었다.

그 길은 여전히 천혜의 요새였다. 사위가 온통 하얗다. 구름 때문이다. 한줌 쥐면 물이 주르르 흘러내릴 것만 같다. 아침에 그쳤던 비가 다시 쏟아지기 시작했다. 체온이 떨어져 몸이 파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제비추리봉(593m)을 지나 능선의 오르막과 내리막을 반복하면 812봉에 이른다. 땅을 파고 돌을 축대처럼 쌓은, 참호로 보이는 곳이 몇 군데 있다. 어쩌면 빨치산의 ‘트’(아지트를 줄인 말)였을지도. 아니면 당시 군경의 초소터일지도.

구름에 가려졌던 오른편의 백운산 정상이 살짝 보일 듯한 기세다. 그러나 30분을 기다려도 백운산은 끝내 얼굴을 내밀지 않았다. 그저 하얀 구름에 휩싸여 있을 뿐이었다. 백운산과의 숨바꼭질이 이어졌다. 된비알(험한 비탈)에 허덕이느라 얼굴을 땅에 박을 때 백운산은 슬며시 고개를 내밀었을지도 모른다.

3 옥룡면 남산리에 있는 백운산 무장공비 토벌 전몰장병 위령비.
가만, 이 바위 희한하다. 의자가 있다. 바위 위에 의자. 의자바위다. 앉으니 앞은 도솔봉이요 왼편은 형제봉, 오른편은 백운산이다. 경치 구경하며 밥 한술, 술 한잔 하기 딱 좋다.

지도를 보고 주변을 살피고 다시 펴보고 둘러보고. 주변 지형지물이 쉽사리 눈에 들어오지 않아 내 위치가 어디인지를 모르겠다. 왼편으로 민가가 살짝 보이다가 사라지고 오른편에서는 물소리가 세차게 올라온다. 구름이 살짝 걷혔다. 앞에 우뚝한 봉우리. 분명 도솔봉이다. 오르고 내리길 다시 반복해 그 1123m 고지에 다다랐다. 바다가 가까운 산은 쉽지 않다는 걸 다시 느꼈다. 왼편으로는 호남정맥상의 형제봉(881m)이 이어지고, 오른편으로는 따리봉(1153m), 한재, 백운산 상봉(1218m)이 펼쳐져 있어야 했는데 구름 때문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거친 비바람과 질척한 땅바닥이 발목을 잡았다. 짙고 어두운 산길을 벗어나기로 했다. 고로쇠수액 채취가 한창인 논실로 내려섰다.

‘특각’ 백운산

백운산에서 지창수는 뿔뿔이 흩어진 14연대 반란군을 모았다. 김지회는 선발대를 이끌고 지리산으로 넘어갔다. 남로당 간부인 이현상이 지리산에 든다. 이현상은 14연대를 기반으로 지리산 유격대를 조직한다. ‘2병단’이다. 각 도에는 남로당 지도부가 있었는데, 광주에 있는 전남도당은 붕괴 직전에 있었다. 여순사건으로 인해 군경의 공세가 거세졌기 때문이다. 도당 지도부는 광주에서 유치산(승주읍 유흥리, 532m)으로 입산한다. 백운산은 전남도당이 아니라 이현상이 직접 관리했기에 ‘특각’이라고 불렸다. 49년 9월 16일, 특각의 유격대장 박종하는 광양 서국민학교에 주둔하던 15연대 대대본부를 섬멸하기도 했다. 그 직후 이현상은 박종하 부대를 지리산으로 데려갔다. 11월, 군경의 집중 공세 속에 도당은 유치산에서 백운산으로 거점을 옮겼다. 50년 11월에는 보급투쟁을 위해 간전면 제기암골에서 백운산 상봉을 뒤로 돌아 식량 확보에 성공했다. 그러나 군경 매복조에 걸려 60명 중 20명 만 귀환했다.

4 도솔봉 능선상의 아지트로 사용됐음직한 터. 세월이 흘러 나무가 뿌리를 내리고 굳건하게 자라고 있다. 5 의자바위. 도솔봉 능선상에 있는데, 등산로를 살짝 벗어나야 하는 수고가 필요하다. 이 의자는 1인용이다. 6 고로쇠 수액 채취 모습. 드릴로 구멍을 뚫고 대롱을 박은 뒤 호스에 연결시켰다. 이 호스는 다른 고로쇠 수액을 ‘합승’시키며 산 입구의 보관통까지 이어진다.
이튿날 일찍 나섰다. 전날 백운산 상봉을 오른편에 두고 올랐다. 이번엔 전날 오른 능선을 왼편에 두고 산행을 했다. 용문동을 들머리로, 백운사 방향으로 올랐다. 고불고불, 참 긴 임도다. 이 임도만 따라가면 금세 해발 900m다. 그러나 그곳은 또다시 백색지대였다. 여기저기에서 등산객들의 말소리만 울려 퍼질 뿐이다. 연일 내린 비로 계곡은 찰랑찰랑했다. 그러나 고진감래. 능선에 오르니 사방이 트였다. 엎어지고 고꾸라지며 가장 높은 곳으로 달렸다.

“여기 10년 올랐는데, 오늘 같은 날 처음이네요. 저기 보이지요? 지리산입니다. 지리산. 저쪽이 노고단, 저쪽이 천왕봉.”

한 중년의 여인은 이곳 지리에 꽤 밝은 듯했다. 그의 손끝을 따라 노고단과 천왕봉을 눈으로 쫓았다. 문득 섬진강이 궁금했다.

“저, 섬진강은 어디죠?”

그러나 그 중년 여인은 아무 말 없이 지리산을 향해 합장을 하고 있었다. 지리산은 구름 위에 떠 있었다. 하늘과 하나가 된 듯이. 구름에 묻힌 섬진강과 이웃하며 오늘은 어디로 흘러가려나. 구름이 백운산 자락을 휘감고 넘어온다. 구름인 듯 바다고, 바다인 듯 구름이다. 그래서 운해다. 그래서 백운산(白雲山)이다.

‘옷깃을 촉촉하게 적시며 계곡 가득히 깔렸던 안개가 걷히자 아름드리 고로쇠나무가 하늘을 찌를 듯이 모습을 드러냈다. 힘들었지만 머리는 더욱 맑게 개어 왔다.’(정지아 『빨치산의 딸』에서)

많고 많은 백운 중에 광양 백운은…

백운이란 이름을 가진 봉우리는 한반도 남쪽에만 50여 개에 이른다. 광양 백운산은 내장산·무등산을 타고 내려온 호남정맥의 끝자락이다. 이곳에는 봉황·여우·돼지의 정기가 서려 있다고 한다. 온대에서 한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식물종이 분포해 1993년에는 자연생태계보호구역으로 지정되기도 했다. 남쪽의 동곡계곡과 서쪽 성불계곡, 북쪽 금천계곡, 동쪽 어치계곡은 여름철 피서지로 인기다. 백운산은 바다를 지척에 두고서도 꽤 높은 봉우리를 자랑한다. 높은 만큼 섬진강과 지리산 조망이 일품이다. 봄이면 동백꽃, 매화가 만발하며 고로쇠수액으로 유명하다. 교통이 편한 옥룡면 동곡리 쪽으로 등산로가 많이 나 있다. 서울에서 광양까지는 동서울터미널에서 1시간마다 버스가 운행한다. 백운산자연휴양림(061-763-8615)에는 오토캠핑장 시설도 갖추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