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사회문화/사회 , 경제

46용사의 통곡과 김정일의 미소

화이트보스 2010. 5. 2. 08:36

46용사의 통곡과 김정일의 미소

2010.05.02 03:02 입력

"중앙선데이, 디시전메이커를 위한 신문"

베이징에 있는 영국 친구가 느닷없이 e-메일을 보내왔다. ‘천안함 46용사’의 영결식을 하루 앞둔 지난달 28일이었다. 영국 일간지의 베이징특파원으로 일하는 그 친구는 짤막한 안부 인사 뒤 몇 가지 질문을 던졌다. 천안함 이후 남북 관계는 위험해질 것인가, 이명박 대통령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총격전(shooting match) 가능성은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천안함 사태가 북한의 소행이라는 잠정 결론을 전제로 한 것이었다.

요즘 영국에선 ‘천안함 이후 한국이 보복 공격을 가할 것’이라는 관측이 많은 모양이다. 1982년 포클랜드 전쟁을 치른 경험 때문이다. 아르헨티나 군사독재정권은 전쟁 초기 포클랜드 제도(諸島)를 점령하고 영국군 수십 명을 포로로 잡아 기세를 올렸다. 하지만 마거릿 대처 정부의 단호한 반격에 밀려 군사독재정권은 2개월 만에 사실상 항복을 선언한 뒤 몰락의 길을 걸었다. 외부 공격을 받을 때 영국인에겐 ‘해가 지지 않는 제국(帝國)’을 경영해본 DNA가 작동하는 것 같다.

천안함 침몰 이후 충격의 다섯 주(週)가 흘렀다. 슬픔과 울분과 분노를 가슴에 남긴 채 국내외 관심은 이제 이명박 정부가 ‘유력한 용의자’ 북한을 어떻게 응징하느냐에 쏠리고 있다.

2600년 전 춘추전국시대를 살았던 손자(孫子)는 “전쟁은 국가의 대사이자 생사의 땅이고 존망의 길이니 살피지 않을 수 없다(兵者, 國之大事, 死生之地, 存亡之道, 不可不察也)”고 갈파했다. 김대중(DJ)·노무현 정부의 햇볕정책 이후 무감각해진 대북 경각심을 일깨우는 경구(驚句)가 아닐 수 없다. 천안함은 한반도의 불안한 평화와 김정일 체제의 호전성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그럼에도 삶과 번영의 기반인 안보를 얘기하면 ‘꼴통 보수’로 몰리는 현실이다. 60년 전 겪었던 6·25전쟁의 아픔은 언제든지 재발될 수 있다.

천안함 이후 김정일의 북한은 햇볕정책 자체를 봉쇄했다. 금강산 지역의 남측 부동산을 몰수·동결한 데 이어 개성공단에도 같은 조치를 취할 것처럼 을러댄다. 우리 정부는 속수무책이다. 북한을 제재할 힘을 갖추지 못한 포용정책의 한계다.

DJ·노무현 정부의 핵심 인사들은 햇볕정책의 성과를 강조할 때마다 금강산과 개성공단을 들먹였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군부 강경파를 누르고 통 큰 결단을 내렸다”며 “휴전선이 사실상 북상한 거나 마찬가지”라고 큰소리쳤다. 반면 김정일 체제의 계산은 완전히 달랐다. 금강산과 개성으로 현금과 물자와 설비를 빨아들인 뒤 여차하면 몰수할 수 있는 공성계(空城計)를 펼친 데 불과했다. 성을 비워놓고 적을 유인하는 계책이다. 겉으론 화해협력을 내세우며 속으론 사(詐:속임)와 위(僞:거짓)의 병법을 구사한 것이다.

김정일 체제는 앞으로도 속임과 거짓이라는 두 기둥 아래서 ‘규칙 없는 전쟁’을 도발할 것이다. 경제난과 대외적 고립이 심화되면서 국방자원이 바닥나고 있기 때문이다. 상황에 따라 강한 척하거나 약한 척하는 것은 기본이다. 대결정책과 대화정책을 오가고 ‘우리 민족끼리’와 ‘사회주의 혈맹’ 사이를 넘나드는 현란한 전략전술을 구사할 가능성이 크다. 육지·바다·하늘을 넘나드는 국지적 도발로 남측의 공전증(恐戰症:전쟁공포증)을 자극하고 남남 갈등을 부추기는 반간계(反間計:이간책)를 강화할 것이다.

천안함은 우리에게 ‘힘 있는 안보’를 새삼 일깨워줬다. 천안함의 가해자가 드러났을 때 대한민국의 국격(國格)은 실험대에 오른다. 이명박 대통령은 진실의 무게에 따라 적절히, 단호히 대응해야 한다. 대북 견제에 뜨뜻미지근한 중국도 끌어들여야 한다. 김정일 체제의 난폭성은 중국 역시 잘 알고 있다. 북한의 권력층에는 빨치산 출신과 직간접 관계를 가진 70∼80대 노인들이 폭넓게 포진해 있다. 3대(代) 세습의 충성 경쟁을 벌이는 그들이 무력도발을 일으킬 가능성은 상존한다. 그런 엉뚱한 의욕을 꺾을 군사적 실력은 한반도 평화의 절대요소다.

그와 함께 해야 할 일이 또 있다. 바로 김정일 체제와 북한을 어떻게 다뤄나갈지 국가적 합의를 도출해내는 것이다. 정권과 정당에 따라 대북정책이 달라진다면 김정일 체제에 ‘꽃놀이패’를 안겨줄 뿐이다. 민주화 이후 한국 사회가 지불해온 뼈아픈 비용이다. 벌써 민주노동당 강기갑 대표는 "천안함 사건을 북풍 선거로 몰아가려는 의도가 엿보인다"고 주장했다. 6·2 지방선거에서 벌어질 남남 갈등을 예고한다. ‘46용사’들은 통곡하고 김정일은 미소를 지을 일이다.

이양수 국제 에디터 yaslee@joongang.co.kr

중앙SUNDAY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