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사회문화/사회 , 경제

다시 태어나도 엄마 아들” 두 해군용사 어버이날 사모곡

화이트보스 2010. 5. 7. 11:30

다시 태어나도 엄마 아들” 두 해군용사 어버이날 사모곡

2010.05.07 01:19 입력 / 2010.05.07 02:11 수정

2010년 천안함, 2002년 연평해전서 숨진 21세 아들들이 두 엄마에게

프롤로그 “엄마…” 그 날 두 엄마의 아들이 거친 숨소리와 함께 남긴 마지막 말의 파편이었을 것이다. 이후 두 엄마에게 ‘5월 8일 어버이날’은 사라졌다. 3월 26일 천안함에서 숨진 서승원(21) 중사의 엄마 남봉님(45)씨. 8년 전인 2002년 6월 29일 참수리호에서 전사한 박동혁(당시 21세) 병장의 엄마 이경진(54)씨. 아들과 함께한 21년간 이승에서의 인연은 이미 파도에 휩쓸려버린 지 오래다. 하지만 눈물 같은 시간의 바다 위에 새겨진 아픔은 왜 이렇게 떠내려 보내기가 어려운 걸까. 어젯밤에도 아들의 목소리가 엄마를 깨웠다.

남봉님씨의 아들 고 서승원 중사

세상에 엄마와 나 둘뿐이었다.

엄마는 외로운 여자였다. 전북 고창에서 홀로 상경해 이른 나이에 결혼을 했다. 생활비를 벌기 위해 공장일, 식당일로 늘 고단했다. 아빠와도 자주 사이가 틀어졌다. 나는 엄마가 아플 때마다 발을 주물렀다. 초등학교 1학년 때, 엄마는 유산을 했다. 수퍼에서 깡통에 넣어 파는 깨죽을 사갔다. 엄마는 죽은 먹지 않고 고개만 숙였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엄마는 아빠와 별거를 시작했다. 우린 맨몸으로 집을 나왔다. 이모들의 도움으로 인천시 계양동에 셋방을 얻었다. 9.9㎡(3평) 원룸이었다. 중고 냉장고, 중고 행어, 중고 컴퓨터가 세간의 전부였다. 엄마는 내가 공부하는 데 불편하겠다며 미안해했다. 나는 엄마하고 한방에서 잘 수 있어 좋았다.

아들과 함께 살기 위해 새로 얻은 집에서 서승원 중사의 엄마 남봉님씨를 지난 4일 만났다. 남씨는 아들이 보낸 편지를 보며 눈물을 훔쳤다. [변선구 기자]

엄마는 건설현장의 간이식당에서 일을 시작했다. “남 여사, 밥 먹었어?” 나는 하루에도 5~6통 넘게 문자를 보냈다. 고생하는 엄마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이것밖에 없었다. 주말엔 용돈을 벌기 위해 엄마가 있는 건설현장에 나갔다. 내가 시멘트 포대를 나르면, 엄마는 직접 지은 쌀밥을 입에 넣어줬다. 친구들은 우리 사이를 ‘커플’이라며 “절대 떨어져선 안 되는 사이”라고 했다.

대학에 합격했지만 등록금을 낼 형편이 안 됐다. 때마침 해군 부사관을 뽑는 공고가 눈에 들어왔다. 나는 돈도 벌 수 있고 출퇴근도 가능하다며 엄마를 졸랐다.

2009년 3월 9일, 진해에서 임관식이 있었다. 저 멀리 가족 대기석에 엄마가 보였다. 엄마는 울고 있었다. “울지 마.” 나는 입 모양을 크게 만들었다. 20년 동안 떨어져 지낸 적이 없었다. 고작 8주였는데 엄마가 보고 싶었다. 식이 끝나자마자 부모들은 일제히 아들에게 달려왔다. “필승! 하사 서승원!” 경례를 하는 나를 와락 껴안았다. 다른 사람 몰래 엄마 볼에 뽀뽀를 했다. 엄마는 6개월 교육기간 동안 매주 면회를 왔다. 이모들은 지극정성이라고 했다. 6개월 후 나는 천안함에 부임했고 엄마는 나를 따라 평택으로 이사 왔다. 2월 13일은 첫 외박 날이었다. 4월부터는 출퇴근이 가능하니 외로워도 꼭 참고 있으라고 했다. 그날 새집에서 하룻밤을 잤다. 그것이 마지막 밤이었다.

난 엄마 아들인 게 좋았어

3월 26일 오후 9시22분 서해 해상에서 1200t급 초계함이 침몰했다. 엄마는 거실에서 훌라후프를 돌리며 TV를 보고 있었다. 드라마에 ‘천안함 침몰’이라는 자막이 떴다. 엄마는 뜬눈으로 밤을 새우고 부대로 달려갔다. 이미 여자 몇이 쓰러져 울고 있었다. 구조자 명단에 내 이름은 없었다. 나는 실종됐다. 엄마는 믿지 않았다.

실종자 46명의 가족이 속속 2함대로 모여들었다. 부대 내에 임시 숙소가 차려졌다. 엄마는 유령처럼 숙소를 돌아다녔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다. 모두 지쳐갔지만 엄마는 내가 살아 있을 거라고 믿었다. 천안함이 침몰한 지 21일째, 나는 함미에서 아홉 번째로 발견됐다.

“왼쪽 목 뒤에 나랑 똑같은 점이 있어요. 그걸 봐야겠어요.” 말리는 이모들을 뿌리치고 엄마는 검안실로 들어왔다. 눈앞에 내가 있었다. 엄마는 가슴을 부여잡았다. 의무관은 “물속에 오래 있어서 만지면 녹아내릴 수 있다”고 했다. 손을 뻗으면 닿을 곳에 아들이 있었지만 품에 안을 수 없었다. 엄마는 그대로 쓰러졌다.

다음 날 밤, 엄마는 얇은 운동복만 입고 맨발로 밖에 나왔다. 바닷바람이 찼다. 밤하늘에 내 얼굴이 있었다. 엄마는 시신 안치소로 걸어갔다. 빠른 걸음으로 걸어도 30분은 걸리는 거리였다. 울다가 걷다가 2시간이 걸렸다. 엄마는 안치소 앞 작은 말뚝에 야윈 몸을 기댔다. 그리고 목 놓아 울었다. “우리 강아지, 나도 따라갈래. 나 때문에 고생만 했는데….”

나를 모르는 사람들이 내 빈소를 찾았다. 서울시청 광장에도 영정 사진이 걸렸다. 신문과 TV엔 우리 이야기뿐이었다. 엄마는 여전히 울었다. 엄마는 내 비석 앞에서 “다음 생엔 좋은 부모 만나서 행복해라”고 했다. 엄마가 들을 수 있으면 좋겠다. 나는 다시 태어나도 엄마 아들로 태어날 거라고.

이경진씨의 아들 고 박동혁 병장

8년이 지났다. 엄마는 아직도 수면제를 먹고 나서야 잠이 드는 날이 그렇지 않은 날보다 많다. 비라도 내리는 날이면 항우울제를 찾는다. 지난 3월 26일, 이날도 엄마는 수면제를 찾았다. 밤 11시가 다가오고 있었다. 백령도 해상에서 천안함이 침몰했다는 뉴스가 TV에서 흘러나왔다. 참수리호를 타기 전 내가 탔던 배다. “아, 동혁아.” 엄마가 내 이름을 불렀다. 46명이 실종됐다고 TV 속 기자가 말했다. 엄마는 새벽까지 잠들지 못했다.

나를 묻어준 엄마의 손

2006년, 평택 2함대에서 열린 2차 연평해전 추모식에서 이경진씨가 아들 박동혁 병장의 부조상을 잡고 오열하고 있다. [연합뉴스]
2002년 6월 30일, 엄마는 울고 있었다. 전날 있었던 2차 연평해전에서 살아나온 나는 병상에 누워 있었다. 내가 타고 있던 참수리호는 침몰했다. “온몸에 포탄 파편 100여 개가 박혀 있습니다. 큰 부상만 수술했습니다. 몸이 좋아지면 다시….” 엄마가 의사의 말을 잘랐다. “살 수 있죠?” 의사는 대답하지 않았다.

엄마는 매일 중환자실을 찾아왔다. 그리고 말해주었다. “동혁아, 넌 참 좋은 아들이었어.” 초등학교 3학년 방학 때, 아빠의 일터에 따라간 적이 있다. 아파트 건설현장에서 나는 아저씨들에게 못도 가져다 주고 안전모도 가져다 주는 심부름을 했다. 일당 3만원을 받았다. 아빠는 “이렇게 돈을 벌어 널 학교에 보낸다”고 했다. 1만원을 은행에 저금하고 1만원은 엄마에게 줬다. 그리고 1만원은 1000원짜리 9장과 100원짜리 10개로 바꿨다. 내 용돈이었다. 엄마는 그 일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동생 대학 간다고 자원 입대한 거 알아. 등록금 때문에 엄마 힘들까 봐 그랬지? 미안해, 엄마가.” 엄마는 또 울었다.

입원 후 한 달, 눈을 떴다. 오른쪽 다리가 보이지 않았다. “엄마, 내 다리 어디 있어?” 엄마는 울지 않았다. 대신 내 손을 잡아주었다. “총을 맞았어. 이제 엄마가 네 오른쪽 다리야.” 몸이 뜨거웠다. “엄마, 나 살 수 있어?” 눈물이 났다. “집에 가서 거실에 누워 TV 볼 수 있는 거야?” 엄마는 대답했다. “의사 선생님이 살 수 있대. 집에 같이 가자. 엄마가 데리고 갈게.” 나는 다시 의식을 잃었다.

아빠가 엄마를 부축하고 서 있었다. 엄마가 울부짖었다. “우리 아들은 나라를 위해 죽었는데 나라님은 어디 있어?” 내 장례식장엔 국방부 장관도 대통령도 오지 않았다. 나는 84일을 살아 있었다. 국립 대전현충원에 나를 묻으며 엄마가 말했다. “동혁아, 많이 아팠지? 이제 편히 쉬어.”

나는 나라를 , 엄마는 나를 지켰다

엄마는 내가 묻힌 곳을 매일 찾아왔다. 내게 오지 않는 날이면 내가 다니던 학교에 갔다. 가족여행을 갔던 정동진에 가기도 했다. 집에 있는 날이면 내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보다 못한 아빠가 엄마와 강원도로 내려갔다. 아빠는 소 4마리를 들였다. “이놈들 밥 먹이는 건 당신 몫이야.” 엄마의 ‘유랑병’이 잦아들었다.

2006년 봄, 엄마가 수화기를 든 채 소리를 질렀다. “NLL(북방한계선)이 영토가 아니라니? 그럼 우리 아들은 왜 죽었어? 지킬 필요도 없는 그거 지키려고 죽은 거야?” 어느 정치인이 “NLL은 영토 개념이 아니다”고 말하는 걸 TV에서 본 엄마가 정치인의 사무실로 전화를 건 것이었다. 서해교전은 그로부터 2년 후 승전을 뜻하는 해전으로 승격됐다. 전화를 끊은 엄마가 펜을 들었다. 얼마 후 엄마가 쓴 글은 ‘아들아, 누구를 위해 목숨을 바쳤니’란 제목으로 인터넷에 올려졌다. 사람들이 엄마의 글을 여기저기 퍼다 날랐다.

엄마의 화장대 서랍 속엔 편지 한 통이 있다. 서울의 어느 할머니가 손자 ‘박민제’군의 이름으로 20만원이 든 봉투를 보내온 적이 있다. ‘손자에게 아드님이 얼마나 고마운 분이지 이야기해주었다’는 편지도 들어 있었다. 엄마는 편지를 펼쳐놓고 “동혁이가 헛 죽은 건 아니야” 하고 다짐하듯 말하곤 했다.

천안함 침몰로 실종됐던 46명의 영결식이 열리던 지난달 29일, 엄마는 내 방에 있었다. 대전 국군군의학교에 세워진 내 흉상 조각 사진을 어루만졌다. “동혁아, 네가 묻힌 그 바다에서 죽는 사람이, 이제 없었으면 좋겠다.”

에필로그

지난달 28일, 동혁이 엄마 이경진씨는 천안함 46용사 빈소를 찾았다. 이씨는 유족들이 있는 테이블을 하나하나 돌며 위로했다. 승원이 엄마 남봉님씨도 그 자리에 있었다. 이씨가 남씨의 손을 잡았다. “우리 힘을 내요. 아들이 지켜보고 있으니….”

정선언·김효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