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선 느릿느릿… 아이디어도 절로 떠오르죠"
강남구 청담동 한복판… 장독대·나무들 어우러져 소박한 시골 동네골목 모습
쉴땐 햇볕 쬐고 밤하늘 보고 꽃송이 볼땐 레이스 떠올려… "제겐 자연이 선생님이죠"
디자이너 지춘희의 집은 화려한 빌딩이 경쟁하듯 서 있는 서울 강남구 청담동 한복판에 있다. '미스지 컬렉션' 사무실에서 5분 거리에 있는 5층 주택 중 그녀는 1~2층을 쓴다. 그 외양은 사무실처럼 건조하지만 문을 삐걱 열면 반전(反轉)이 시작된다. 이 집 안에 그녀가 농담처럼 "바람구멍"이라 부르는 마당이 있기 때문이다.
왜 '바람구멍'이라고 하는지 마당에 들어서면 굳이 묻지 않아도 알 수 있다. 통유리가 붙어 있는 거실과 같은 레벨로 이어지는 마당은 딱 소박한 산골마을. 장독대와 나무들이 어우러진 정감 어린 모습은 시골 동네 어귀 골목을 연상시킨다. 숨통이 탁 트이는 풍경이다.
그녀가 도심 속에 이런 공간을 만든 건 '게으르게 살고 싶어서'다. "오래 고심해서 뽑아낸 디자인은 어딘지 거추장스런 구석이 있기 마련이니까. 단숨에 아이디어를 쏟아 작업을 완성하기 위해서라도 디자이너의 머릿속은 잡념 없이 말끔히 비어 있어야 한다." 그래서 그녀에게 물었다. "마음을 비울 수 있는 집을 꾸미는 법"에 대해.
◆"일부러 다듬은 듯한 정원보단 동네 어귀처럼 보이는 마당을 꾸며라"
지춘희의 마당은 'ㄱ'자다. 5월의 첫 주, 마당엔 이미 봄을 다 지낸 선홍색 겹벚꽃이 떨어져 내려 잔디 위 도톰한 양탄자처럼 가득 깔려 있었다.
- ▲ 도심 속‘깜짝 공간’이라고 불러도 좋을 디자이너 지춘희의 집 마당. 소파베드를 놓은 이곳엔 모란과 겹벚꽃, 연산홍과 수국이 앞다투어 피었다. 나란히 늘어선 장독대 세 개가 느슨하고 정겨운 멋을 풍긴다. /이준헌 객원기자 heon@chosun.com
6년 전 처음 이 마당을 만들 때만 해도 그녀는 사철 푸르게 잘 자라는 양잔디를 심었지만, 이듬해 모두 갈아엎고 우리나라 토종 잔디를 새로 심었다. "사철 새파랗게 잘 자라면 물론 좋겠지만, 자연스런 느낌이 없더라고요. 겨울엔 마당이 온통 누레진다 해도 그게 또 겨울의 맛이니까…."
마당에 사철나무를 심지 않은 것도 그래서다. 정원을 꾸밀 때 흔히들 '기품 있다'는 이유로 선호하는 소나무나 전나무 대신 때죽나무·자작나무·사과나무·겹벚꽃나무(만첩홍도)·박태기나무·배롱나무·박달나무·까마귀밥여름나무(목수국)처럼 "촌스럽지만 소박한 아름다움이 있는 나무"를 골라 심었다. 사시사철 변화무쌍한 자연의 아름다움을 느끼게 해줘서 좋다고.
영산홍, 모란, 작약 같은 소담한 꽃나무는 풍성한 숲의 느낌을 내기 위해 함께 심은 것. 그는 "나무에 매달린 탐스런 꽃송이를 보면 절로 여인의 부풀린 소매, 레이스 장식 같은 아이디어가 떠오른다"고 말했다.
마당 한가운데 놓인 장독대 세 개엔 그녀가 직접 담근 된장, 간장, 고추장이 들어 있다. 마당 입구에 있는 댓돌엔 검정 고무신이 여러 켤레. 그는 "질박한 그릇, 고무신이 편하고 소품 노릇도 톡톡히 해내서 좋다"고 했다.
◆"마당엔 큼직한 의자를 두세요. 의자가 비싸면 방석도 괜찮아요."
마당 오른쪽엔 외국 휴양지에서나 볼 법한 넓은 소파와 테이블이 있다.
흰 천을 드리워 그늘을 만들고 쿠션을 놓았다. 값비싸 보이지만, 본인이 직접 만든 것이다. 지춘희는 "쿠션을 사다 그 위 흰 천을 씌워서 꾸몄다. 거실 나무 티테이블도 직접 목수에게 부탁해 만든 제품"이라고 말했다.
지춘희는 의자를 살 돈이 없거나 둘 공간이 없다면, 아무렇게나 두고 쓸 수 있는 짚이나 라탄 소재 방석을 놔뒀다가 필요할 때 꺼내 써도 좋다고 했다.
"마당은 하염없이 앉아 쉴 수 있는 곳이 좋아요. 그래야 쉬는 날엔 하릴없이 앉아 미처 못 누린 햇볕을 쬐고 나무도 쳐다보고, 어두워지는 밤하늘도 보죠. 똑같은 나무도 빛에 따라 표정이 달라지는 걸 보고 있으면 절로 영감이 떠올라요. 제겐 자연이 선생님인 거죠."
◆"고급 가죽소파보단 맘껏 빨아 쓸 수 있는 천 소파가 좋아요"
거실에 있는 소파나 마당에 놓인 소파는 모두 천을 씌워 만들었다. 옷을 만들 때 최고급 천연 소재를 고집하는 그가 정작 집 안 가구에 값비싼 가죽을 씌우지 않은 건 편하게 쉬고 싶은 마음 때문이다. "집에선 '이게 묻을까, 저게 닳을까' 걱정하면 힘 빠져요. 그런 생각 안 하고 뒹굴기엔 천이 제격이죠. 맘껏 빨아쓸 수 있고, 오래되면 갈아 끼워도 큰 부담 없고."
◆"자연을 닮은 색을 쓰세요. 연두, 노랑, 빨강, 보라…"
패션디자이너지만 2007년 삼성 래미안 아파트 인테리어 디자인을 지휘했을 만큼 남다른 인테리어 감각을 뽐내는 지춘희다. 당시 그는 풀색 세면대 등 여성스런 색감의 소품을 배치해 큰 호응을 얻었다.
그의 집 곳곳에도 남다른 색채 감각을 자랑하는 소품이 숨어 있다. 마당과 맞닿은 거실벽 한 귀퉁이엔 직접 갖가지 색깔을 칠해 이어 붙인 나무 패널 장식이 걸려 있었다. 빨강·연두·청록·노랑·벽돌색·보라…. 제각기 강렬한 빛을 내뿜는 색깔을 한데 모아놨는데도 제 짝을 만난 것처럼 잘 어울린다.
"쿠션 색깔을 저렇게 해도 예뻐요. 이게 다 자연에서 나온 색이거든. 디자인이건 인테리어건 모두 자연에 답이 있어요."
◆"그림이나 조각을 둘 땐 나를 닮은 작품을 찾으세요"
집을 꾸미는 그림이나 조각 같은 예술품은 비싼 것보다 신인 작가의 작품 위주로 고른다. 지춘희는 "기왕이면 평소 내 모습과 맞아떨어지는 작품이 더 오래간다"고 했다.
- ▲ 중국 출신 화가 데이비드 차우가 그린 모란꽃 그림이 걸려 있는 현관 입구. 지춘희 디자이너는“모란의 넉넉하고 풍요로운 자태가 좋다”고 말했다. /이준헌 객원기자
현관 입구에 걸려 있는 커다란 모란송이 그림은 중국 출신 화가 데이비드 차우(Chow)의 작품. 큼지막한 캔버스 위에는 초록빛 잎사귀와 하얀 꽃송이가 바람에 휘날리듯 거칠게 붓질한 흔적으로 남아 있다. "옷 하나를 만들어도 밥 먹고 난 뒤 숨 쉴 공간을 미리 생각해 만들고, 매일 꽃과 나무를 보지 않고는 답답증을 느끼는 나를 보여줄 수 있는 그림을 골랐다"는 설명이 돌아왔다.
지춘희는 "앞으로 좋아하는 사람과 어울려 느릿느릿 살 수 있는 작은 동네를 하나 꾸미는 게 나의 남은 꿈"이라고 말했다. "뭐든 완벽해지려고 하면 망쳐요. 무심하게 살고, 태평하게 일하는 게 좋죠. 그래야 오래 남는 디자이너가 될 수 있어요."
☞디자이너 지춘희는…
충북 충주 출생. 1976년 서울 명동에 작은 옷가게였던 ‘지 의상실’을 운영하다 1980년 서울 조선호텔에서 ‘미스지 컬렉션’이란 이름으로 패션쇼를 하면서 브랜드를 런칭했다.
자연에서 영감을 얻은 다채로운 색채, 정제된 선과 특유의 여성스러운 디테일을 지닌 옷을 만들어, 대중과 스타가 동시에 사랑하는 디자이너로도 꼽힌다.
‘청춘의 덫’의 심은하, ‘불꽃’의 이영애는 지춘희 의상을 입고 드라마에 출연해 ‘옷 잘입는 스타’로 등극한 대표적인 경우. “시상식에서 지춘희 옷을 입은 여배우는 반드시 상 받는다”는 속설(俗說)이 있을 정도다.
2010년 가을·겨울 서울패션위크에선 재즈 살롱을 연상시키는 대담하고 강렬한 옷으로 갈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