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현장 르포] '차베스 포퓰리즘'에 신음하는 베네수엘라 [1]
석유 생산량 줄어도 車 휘발유 채우는데 1달러
부품없어 수력발전 못해도 전기값은 거의 공짜
지난 15일, 베네수엘라 카라카스 공항. 분침을 30분 뒤로 돌려 시계를 11시 30분에 맞췄다. 지난 2007년 베네수엘라의 우고 차베스 대통령은 "어린이들에게 더 많은 햇볕을 주기 위해 시간을 30분 늦춘다"고 밝혔다. 이 조치로 그의 표현에 따르면'유황(지옥)' 냄새를 풍기는 미국 동부와 다른 '그들만의' 시간대에 살게 됐다.한밤중 공항으로 들어가는 길, 양쪽으로 산꼭대기까지 가득 채운 빈민촌의 불빛이 크리스마스트리처럼 휘황찬란했다. 베네수엘라는 킬로와트(kw)당 원가가 20달러에 달하는 전력이 5센트에 공급된다. 휘발유를 자동차에 가득 넣어도 1달러면 된다. 모두 '가난한 자의 영웅' 차베스 대통령 덕분이다. 그나마도 이들은 전기료마저 내지 않는다. 아무도 돈을 내라는 말은 하지 않는다. 불빛은 빈곤의 참모습을 분식(粉飾)했다.
뜨거운 물도 잘 안 나오는 중저가 호텔을 예약했는데, 하루에 약 400볼리바르(공식 환율로 약 93달러)를 달라고 했다. 2003년부터 계속된 외환통제로 공식 환율은 달러당 4.3볼리바르에 바꿔야 하지만 누구도 이 비율로 환전하는 사람은 없다. 암시장에선 달러당 7~8볼리바르에 거래된다. 차베스 정권은 최근 달러를 파는 사람과 사는 사람 모두를 처벌하는 강력한 암시장 단속에 나섰다. 호텔 직원이 눈치를 보며 "일단 100달러의 보증금만 내라"고 했다. 재주껏 해결하라는 뜻이다. 한 암달러상은 기자에게 "이대로 가면 달러당 10볼리바르도 곧 도달할 것"이라고 말했다. 차베스가 반미(反美)를 외치며 외환통제를 강화하면 할수록 달러의 가치는 올라간다. 이곳은 미국식 신자유주의 대안을 꿈꾸는 '21세기 사회주의 혁명'의 나라, 베네수엘라다.
◆차베스 "참치도 자본주의와 사회주의가 있다"
16일 오전 11시, 매주 일요일마다 차베스 대통령이 직접 출연하는 '알로 프레지덴떼(Alo Presidente, 안녕 대통령)'가 시작됐다. 이 프로그램은 무려 5개 채널에서 동시 생중계된다. 그는 이날 저소득층을 위해 정부가 운영하는 식료품점인 '메르칼(Mercal)'을 방문했다. 그는 참치 통조림을 손에 들고 "이걸 자본주의 수퍼마켓에서 사려면 8.5볼리바르이지만, 이곳에선 5.5볼리바르만 주면 똑같은 품질의 제품을 살 수 있다"며 갑자기 "비바! 참치"를 외쳤다. '사회주의 참치'에 대한 자랑은 30분 가까이 이어졌다.
- ▲ 카라카스 시내의 한 빈민촌 아파트의 모습. 한 주민은“지은 지 5년밖에 안됐다”고 말했다. 빈민들에게 분양을 한 것이지만 입주민 대부분은 창문도 없는 이곳에서 아무런 희망이 없이 산다. 21세기 사회주의 혁명의 현실이다. /조의준 특파원 joyjune@chosun.com
외환부족이 심각해지자 지난 13일 차베스 대통령은 대통령령으로 당분간 식료품과 의료용품의 수입을 제외하고는 외환공급을 중단하도록 했다. 그는 이를 의식한 듯 "식료품 수입은 계속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말했다. 한 외국계 금융기관 직원은 "월급을 받으러 지난주에 파나마에 갔다 왔다"며 "이곳 외국계 회사 직원들은 달러로 월급을 받기 위해 매달 마이애미나 파나마로 출장을 간다"고 말했다.
◆뿌리부터 썩어가는 '사회주의 천국'
베네수엘라는 세계 3대 석유 생산국으로 석유 수출에 정부 수입의 대부분을 의존하고 있다. 유가가 고공행진을 시작하던 지난 2004년 베네수엘라의 경제성장률은 무려 17.9%에 달했고, 2007년까지 10% 안팎의 초(超)고성장을 달성했다. 하지만 경제위기로 원자재값이 폭락하면서 2008년 경제성장률이 4.6%로 떨어진 데 이어 지난해엔 -3.3%로 급락했고, 올해는 -5%를 기록할 것으로 보인다.
- ▲ 생필품 사재기… 카라카스 수퍼마켓의 식품코너가 텅 비어 있다. 생필품을 사재기하려는 사람들이 몰리면서 빚어진 현상이다. 차베스의 외환통제는 오히려 물가만 폭등시키고 있다. /조의준 특파원 joyjune@chosun.com
베네수엘라의 석유 생산량은 2001년에 비해 30%나 줄었다. 차베스를 피해 고급 기술자들이 대거 미국과 파나마로 이민을 갔기 때문이다. 미국의 뉴스위크지는 1990년부터 2007년까지 베네수엘라의 고급 숙련노동자의 해외 이민이 217%나 급증했다고 밝혔다. 실제로 베네수엘라의 석유개발 인력을 적극 받아들인 콜롬비아의 석유 생산량은 최근 2배로 늘었다.
일부에서는 베네수엘라에서 해외로 빠져나간 돈이 최대 2000억달러에 달할 것으로 추산한다. 인근 파나마는 베네수엘라 자금이 몰리면서 세계 경제위기 중에도 2007년 이후 최대 호황을 기록하고 있다.
지난 17일 카라카스 인근 '필라데 마리체' 공단지역. 플라스틱 가공업체를 운영하는 마르셀로 후안(가명·52)씨는 "지난주엔 화요일과 목요일 오후에 전기가 끊겨 일을 못했다"며 "요즘엔 전력 부족이 심각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차베스 정부는 전기가 부족한 이유를 가뭄으로 수력발전을 제대로 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는 "하도 답답해 내가 직접 수력발전소에 가봤다"며 "물이 부족한 게 아니라 부품이 없어 발전기 터빈을 고치지 못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차베스 정부는 지난 5월 국민의 성원에 보답한다며 임금 10%를 올려주라고 명령했지만, 그 직전 정부가 공급하는 원자재 가격을 45%나 올려버렸다"고 분통을 터트렸다. 가격을 올린 뒤에도 원자재 공급마저 원활하지 않아 그의 공장 매출은 최근 약 30% 이상 떨어졌다.
◆물가폭등, 차베스 지지율도 흔들
지난 16일 오후 4시, 최근 국유화한 비센테나리오(Bicentenario) 수퍼마켓. 고기와 빵을 파는 코너가 약탈당한 듯 비어 있었다. 장을 보러 온 나타냐(48)씨는 "물건이 자주 나오지 않아 있을 때 모두 사 버리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더군다나 차베스 정부는 베네수엘라가 주로 농산물과 소고기를 수입하던 이웃 콜롬비아에서의 수입을 갑자기 끊어버렸다. 미국 공군기지 건설을 허용했다는 것이 이유다. 베네수엘라는 올 1~4월 사이에만 무려 11.3%의 물가상승률을 기록했다.
상점에선 '생필품'의 개념이 헷갈렸다. 작은 생수 한 병에 4.3볼리바르인데 반해 맥주가 3.54볼리바르로 더 쌌다. 고기와 설탕, 밀가루는 없는데 와인과 맥주는 쌓아놓고 팔았다. 경기침체와 물가폭등으로 올 들어 차베스의 지지율이 사상 처음으로 50% 아래로 떨어졌다. 뉴스위크는 올해 베네수엘라에 쿠데타가 날 것으로 예상하기도 했다.
천국의 끝은 오고 있는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