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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부고속도로 개통 40년

화이트보스 2010. 7. 2. 17:09

연인원 900만 명, 투입 장비 165만 대 피·땀으로 이룬 ‘민족의 예술품’

2010.07.02 09:50 입력

대한민국 산업화의 상징, 경부고속도로 개통 40년

"중앙선데이, 디시전메이커를 위한 신문"



1970년 7월 7일은 대한민국 산업화의 기점으로 불린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총연장 428㎞의 경부고속도로가 착공(68년 2월 1일) 2년5개월 만에 개통됐다.
그때 당시로는 건국 이래 최대 역사로 305개의 교량, 12개의 터널, 19개의 인터체인지가 함께 건설됐다.
총 공사비는 당시 국가 예산의 23.6%에 달하는 429억7300만원이었다. 당시 1인당 국민소득이 142달러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적잖은 금액이다.
하지만 전 세계 고속도로 건설 사상 ㎞당 약 1억원의 공사비는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싼 가격이었다. 특히 외국의 원조나 차관 없이 전액 국민 세금으로 조달됐다.
그 즈음 건설된 일본의 도메이(東名) 고속도로(도쿄~나고야, 총연장 약 340㎞)의 공사비가 ㎞당 7억~10억원이고 공사기간은 7년이었다.
그만큼 경부고속도로는 초고속·저비용이었다. 공기 단축을 위해 겨울에는 언 땅에 짚을 깔고 휘발유 뿌리고 불을 질러 녹인 뒤 지반을 다졌다.

시공에는 16개 민간 건설사와 3개 건설공병단이 참여했다. 군 장비를 대거 동원, 군사작전처럼 진행했다. 연인원 892만8000명과 165만 대의 장비가 투입됐다. 전체 7개 공구 중에서 충북 청원군 옥산면에서 옥천군 청성면 묘금리까지 이어지는 대전공구 약 70㎞가 최악의 난공사 구간이었다. 그중 옥천 구간은 1.6㎞마다 터널을 뚫거나 다리를 세워야 했다. 하루 종일 수백 명이 달려들어도 30㎝밖에 뚫지 못하자 인부들이 공사를 포기하고 달아나는 일도 벌어졌다. 70년 6월 27일 옥천 구간의 당재터널 공사를 끝으로 경부고속도로는 완공됐다. 박정희 대통령은 대구공설운동장에서 열린 준공식 치사에서 “이 도로야말로 우리 민족의 피와 땀과 의지로써 이뤄진 하나의 민족적인 예술작품”이라고 말했다.

경부고속도로 개통으로 서울에서 부산까지 기차로 15시간 걸리던 것이 4시간에 갈 수 있게 됐다. 전국이 일일생활권이 되면서 국민의 생활 패턴이 바뀌었다. 자동차 산업이 발전하고 물류비용이 획기적으로 감소하면서 경제발전의 기폭제가 됐다. 개통 첫해 368만9000대의 차량이 이용했고 85년 3400만 대를 넘기면서 통행량이 10배가 됐다. 현재는 완공 당시의 100배가 넘는 3억4000만 대가 도로를 달리고 있다.

공기 단축의 후유증도 만만치 않았다. 개통 이후 부실시공이 드러나 보수공사를 해야 했다. 개통 1년 만에 덧씌우기 공사를 했다. 중앙분리대 등 안전시설 미비는 대형사고의 빌미가 됐다. 개통 후 10년간 유지보수 비용이 건설 비용보다 더 많았다고 한다.
서울·수원 토지수용 일주일 만에 완료

박 대통령이 경부고속도로 건설을 준비하던 67년 12월부터 3명의 군인과 1명의 건설부 공무원이 청와대로 출퇴근하며 그를 보좌했다. 육군본부 조달감실의 윤영호(85·당시 42세·사진) 대령과 1군사령부 박찬표(86·당시 43세) 중령, 육본 공병감실 방동식(80·당시 37세) 소령, 건설부 사무관 박종생(당시 50세·2007년 작고)씨가 그들이다. 이들은 박 대통령이 직접 만든 비공식 조직의 멤버였다.

박 대통령이 경부고속도로 건설 계획을 공개적으로 밝힌 것은 67년 4월 29일 제6대 대통령 선거 과정에서 선거공약으로서였다. 당선 직후 정부와 민간회사 등에 최저 건설비를 산출해 보라고 지시했다. 그해 11월 초 5개 기관이 보고한 내용은 천차만별이었다. 건설부 650억원, 육군 공병감 490억원, 재무부 330억원, 서울특별시 180억원이었고 유일한 민간 건설업체인 현대건설은 280억원이 들 것이라고 보고했다. 추정 공사비가 무려 3배까지 차이가 난 것이다. 박 대통령은 “이래 갖고는 감을 잡을 수가 없으니 내가 직접 산출해보겠다”고 선언했다. 그러곤 ‘태스크포스’로 구성한 것이 윤씨 팀이다. 이들은 특별한 명칭 없이 처음엔 ‘임시작업반’으로, 나중엔 ‘청와대 파견단’으로 불렸다. 당시 팀장 역할을 했던 윤씨는 1930년 군 생활을 마친 뒤 80년 예비역 준장으로 예편, 2년 뒤 토목회사를 차려 28년째 경영하고 있다. 지난 23일 경기도 과천의 신영기술개발㈜ 회장실에서 그를 만났다. 이 회사는 연 매출액이 100억원대이면서도 부채가 없는 알짜회사다.

“육군본부 조달감실 검사과장으로 근무할 땐데 직속상관의 지시로 67년 11월 24일 청와대로 갔어요. 박 대통령을 뵀더니 ‘윤 대령, 나와 함께 고속도로 한번 만들어 보지 않겠나?’라는 겁니다. 그때 깜짝 놀랐는데 집무실 한쪽 벽에 갖가지 지도들이 빼곡히 걸려 있는 겁니다. 나더러 서울~수원 지도를 100만 분의 1부터 1200분의 1까지 1부씩 구해오라고 해요. 청와대를 나와 지프에 트레일러를 달고 당시 영등포 6관구에 있던 지도보관소에 가서 지도를 구해 다시 청와대로 갔죠. 그날부터 지도를 옆구리에 끼고 살았죠.”

윤씨의 첫 임무는 5개 기관의 안을 비교 분석한 뒤 적정 공사비가 얼마인지를 산출하는 것이었다. 그는 종합 검토 후 360억원이 적정선이라고 보고했다. 박 대통령은 “330억은 어떤가?”라며 웃었다. 그리고는 이후락 당시 비서실장을 불러 “비용을 절감하려면 난공사 구간에는 육군 공병대를 투입해야겠다”며 미군 측과의 협의를 지시했다. 고속도로가 완공되면 미군들은 무료통행하게 해 준다는 조건을 제시해 공병 동원을 허락 받았다. 군대를 동원해 비용을 절감한 것이다.

박 대통령 “전쟁 안 나는 한 추진” 강행
현장을 답사한 뒤 공사계획 노선도를 그리는 일도 주요 업무였다.
“그해 12월 25일 크리스마스 때였는데 박 대통령이 지도상의 말죽거리를 가리키며 거길 가보래요. 수원까지의 노선을 확정해야 한다면서요. 지금 한남대교가 놓여 있는 곳까지 갔는데 강을 건널 재간이 있나. 간신히 배를 한 척 빌려서 지프차를 싣고 건너갔죠. 배에서 내리니 모래사장이고 논과 밭 뿐이에요. 현장을 다 확인하고 나서 청와대에 보고하러 갔죠. 도착하니 캄캄한 밤이었는데 박 대통령이 퇴근하지 않고 기다리고 있다가 보고를 받고는 이후락 비서실장에게 ‘내일 관계 장관 회의를 소집하라’고 지시하는 겁니다. 혹시 정보가 새면 땅값이 오를 수 있으니 신속히 땅을 매입해야 한다면서요.”

다음 날 관계 장관회의에서 박 대통령은 서울~수원 간 32㎞의 예정 노선에 대해 설명한 뒤 서울시장과 경기도지사에게 용지 매입을 일주일 안에 마치라고 지시했다. 그는 “도지사는 가서 해당 군수를 부르고 군수는 면장을, 면장은 이장을 불러 동의를 받으면 되는 것 아니냐”고 다그쳤다.

경부고속도로 건설을 실질적으로 추진한 곳은 국가기간고속도로 추진위원회 산하의 건설계획조사단이었다. 단장은 안경모 전 교통부 장관이었고 윤씨는 기술위원으로서, 고속도로 노선 관련 책임을 맡았다. 서울에서 수원·천안·대전, 그리고 다시 대구·부산으로 이어지는 노선을 수없이 오가며 현장을 확인하는 일이었다. 경부고속도로는 기존 국도가 아닌, 새로운 노선을 택했다. 대전에서 추풍령까지의 험준한 산악지대를 L-19 경비행기를 타고 답사를 하다가 악천후로 추락할 뻔하기도 했단다. “마치 고산자 김정호가 된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고 그는 말했다. 고속도로 기공식을 며칠 앞둔 68년 1월 21일에는 북한의 김신조가 이끄는 124군 특수부대가 청와대 뒷산까지 침투하는 사건이 벌어졌고 한반도에 긴장이 고조됐다. 하지만 박 대통령은 전쟁이 발발하지 않는 한 예정대로 간다며 그대로 밀어붙였다.

69년 2월 원대 복귀한 윤씨는 국방부 조달본부 건설국장으로 근무하던 74년 박 대통령을 다시 만났다. 그해 광복절 행사 때 문세광의 저격으로 숨진 육영수 여사의 묘지 조성 공사를 맡으면서였다.

윤씨는 “가까이서 본 박 대통령은 옛날 구닥다리 시계를 차고 국산 담배를 피우는, 시골 농부 같은 모습이었다”며 “내가 지도를 그리고 있으면 어깨를 툭 치면서 ‘창문에 대고 하면 비쳐서 잘 그려진다’고 비법을 전수하기도 했다”고 회고했다. 그는 “1인당 국민소득이 남한이 북한보다 적을 때, 야당의 거센 반대를 무릅쓰고 진행한 경부고속도로 건설은 우리 국민에게 ‘하면 된다’는 자신감을 심어준 일대 사건이었다”고 말했다.

한편 윤씨 외에 박 중령은 당시 경부고속도로 황간공구 소장을 맡았고 방 소령은 나중에 도로공사 기술본부장을 지냈다. 현재 고속도로 건설 주역들의 모임인 ‘77회’ 회장이다. 71년 결성 당시 128명이었던 회원은 사망·이민 등의 사유로 79명으로 줄었다.

조강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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