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기/헤어 디자이너

따뜻한 가위손’ 엘리자 리

화이트보스 2010. 8. 24. 17:55

따뜻한 가위손’ 엘리자 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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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일후 2005년이 되면 미용인생 30년이다. 화장기 없는 얼굴, 캐주얼한 옷차림에 활기찬 표정이 30대라 해도 믿을텐데…

엘리자 리 원장(50·엘리자리 살롱 대표)은 오는 해를 맞으며 유난히 가슴이 설렌다. 지난 30년동안 자신의 꿈과 열정이 이끄는대로 살았다면 2005년은 자신보다는 후배들을 위해 일하며 본격적으로 지원하는 첫 해로 기록될 것이다. 한국의 대표적인 미용사에서 ‘젊은 미용인들의 후견인’으로. 또다른 출발선상에 서 있는 이원장. “잠도 못잘 정도로 바빠 요즘 부쩍 늙는 것 같다”고 말하면서도 그 어느때보다 활기차 보이는 이유이다.



#한국대표선수

1975년. 부업으로 미용실을 운영하던 언니가 “면허를 취득한 후 좀 도와달라”고 요청하는 바람에 손에 쥔 미용사 면허증. 미용을 하고 싶다는 열정도, 이 길이 좋겠다는 뚜렷한 주관도 없이 접어든 길이었다. 풍부한 상상력과 손재주로 인정은 받았지만 방황을 거듭하던 그에게 한 미용회보에서 봤던 비달사순의 작품은 ‘미용대회에 참가하고 싶다’는 꿈을 주었다.

그렇게 무작정 국내 대회를 거쳐 출전한 81년의 뉴욕 IBS대회. 25살 최연소 참가자로 금상을 받았다는 센세이션을 일으켰지만 정작 이원장의 가슴엔 상처만 남은 경험이었다. 약한 나라의 현실과 자신의 실력, 국내 미용의 열악한 위치에 대한 실망이었다. 이원장을 다시 일깨운 건 국제대회에서 본 외국 디자이너들의 열정. 무조건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에 94년부터는 한국에서 미용실을 운영하며 일년에 몇달씩은 유럽으로 가 유명선생님에게 교육받고 대회에 참가하는 생활을 계속했다. 그후 97년 그리스 아테네대회 2위 입상을 시작으로 10여차례의 국제대회 트로피를 거머쥐며 한국적인 모티브로 국제대회에 한국을 알리는 전령사의 자리에 우뚝 섰다.



#ICD 코리아-버팀목으로 서다

배우겠다고 끊임없이 찾아오는 후배들. 미용사로선 정상에 섰지만 주변을 빙빙 도는 후배들을 보며 이원장의 고민이 시작됐다. 결론은 나왔다. 젊은이들을 돕기 위한 실질적인 기구를 만들어 가진 것을 나눠주고 세계로 가는 다리 역할을 해 주자 다짐했다. 방법을 찾다 길을 찾았다. 재작년 국제적인 미용인들의 단체인 ‘ICD(L’Association Internationale des Maitres Coiffeurs de Dames)’의 문을 두드렸다. 2차 대전후 유럽 유명 미용아티스트들의 친목모임으로 시작된 ICD에는 현재 54개국에서 1,000여명의 회원이 활동하고 있다.

창립멤버 중 기욤 길리미는 헤어드레서이자 유명한 조각가로 미용의 위치를 한 차원 격상시킨 인물. ICD는 그의 사망후 유지에 따라 90년대초 ‘기욤재단’을 설립해 전세계의 청소년미용사를 발굴, 지원하는 일들을 해 오고 있다.

2002년 ‘ICD 코리아(www.icdkorea.net)’ 회장으로 선임된 이원장은 이달초 ‘ICD 코리아 퍼포먼스’를 열어 본격적인 첫발을 내디뎠다. 주니어 대회 7개 부문에서 뽑힌 34명의 유망주들에게 1년간 손수 무료교육을 시켜주고 있다. 앞으로도 매년 17~27세 사이의 유망주 수십명을 트레이닝시킬 예정이다.



#앞으로 10년의 꿈. 한국의 기욤재단

그의 딸 둘도 같은 길을 가는 동지이자 후배이다. 미용은 안하겠다며 경영학과를 졸업한 큰 딸(27)은 결국 영국 비달사순 아카데미와 토니앤가이 전문가 과정을 수료한 후 엄마의 일을 돕고 있다. 둘째딸(20)도 대학 미용학과 2학년에 재학중이다.

“옛날보다 미용인들의 위상은 높아졌어요. 그래도 아직은 그리 안정적이지도, 자부심을 가지기도 힘든 직업이죠. 나라마다 다르긴 하지만 우리만큼 위상이 떨어지는 곳이 없는 것 같아요. 중국, 일본만 해도 인식이 열려 있는데…”

딸들이 가는길. 국제대회 참가 후 우리나라의 열악한 현실에 눈뜨며 상처받고 돌아왔던 일, 출산후 다시 일하려 했을 때 이미지가 좋지 않다고 집안에서 말렸던 경험을 딸들과 후배들에게 반복시킬 수 없다는 생각이 이원장을 거듭 채찍질한다.

“구체적인 기술보다는 어려서부터 기본적인 자질과 창의성을 높이고 프라이드를 가질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싶어요. 또 같이 모이면서 우정과 자신감, 아이디어를 공유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고 싶어요.”

숍이 몇개냐, 경제적으로 얼만큼 성공했느냐, 어떤 유명스타의 머리를 손질하느냐는 그의 관심사가 아니다. 앞으로 정말 하고 싶은 일은 10년 안에 국내 미용인들을 위한 재단을 만드는 것. 이제까지 불가능해 보였던 꿈을 늘 현실로 바꿔왔듯 그 꿈도 곧 이뤄지지 않을까. 한국 미용은 그를 만나 행복하다.

〈글 송현숙기자 song@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