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마운드’에 선 가위손 형제
◇‘형제 헤어 디자이너’김민국·경록씨
5년 전 여름날 한밤중. 20대 중반의 사내 둘이 이대앞 한 건물의 옥상에서 만났다. 키 1m80㎝, 몸무게 100㎏쯤은 족히 돼 보이는 두 사람. 우람한 체격이 무슨 조직원을 연상시킨다. 손에는 가위까지 들었다. 한명이 팔짱을 낀 채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 눈짓으로 신호를 했다. 알았다는 듯 다른 사내가 가위질을 시작했다. 못마땅했던지 지켜보던 남자가 가위를 뺏어들었다.
“아니 형, 정말 이렇게밖에 못해!”
이들은 조폭이나 건달과는 거리가 먼 ‘가위손 형제’다. 형 김민국씨)
(32·사진 오른쪽)는 프로야구 쌍방울 레이더스의 투수로, 동생 경록씨(31는 동도공고 럭비선수로 활약했던 운동선수 출신. 그날은 옥상에서 동생이 형한테 미용 과외수업을 시키는 중이었다. 본디 미용 보조에서 전문 미용사가 되려면 보통 10년은 걸린다. 그런 어려움을 익히 알고 있는 경록씨. 형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덜어주기 위한 동생의 배려였다.
경록씨는 미용 실습용 마네킹 머리 1,000개를 준비했다. 밤마다 남들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마네킹의 머리카락 자르는 연습을 시켰다. 민국씨는 그런 동생이 고마우면서도 한편으론 얄밉기도 했다. ‘그래, 이참에 형의 능력을 보여주마’고 단단히 별렀다. 긴 머리카락의 끝 다듬기에서 짧은 커트, 삭발 등으로 가발이 잘려나간 마네킹이 차츰차츰 늘어났다. 민국씨는 6개월간 1,000개의 마네킹 머리카락을 다 자르고 나서야 미용실에서 가위를 잡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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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프로야구 선수 김민국’을 기억하는 이는 별로 없다. LG 트윈스의 유지현, 현대 유니콘스의 이숭용 등이 그의 동기생들. 입에서 단내가 나도록 훈련을 하는 까닭은 이름 석자를 알리기 위해서다. 그러고 보면 참 허무하기도 하다.
민국씨는 신생팀인 한서고 시절 졸업할 때까지 전 게임을 모두 던졌을 정도로 무쇠팔을 자랑했다. 건국대 졸업때 ‘방어율·승률·최다승·탈삼진·최우수선수’라는 5관왕을 거머쥐었다. 프로야구 신인 드래프트에서 레이더스에 지명돼 기대를 한몸에 안았다. 그러나 프로 첫해 다리 인대 부상으로 빛을 발하지 못했다.
“운동하다가 크게 성공하지 못하면 이것도 저것도 안됩니다.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힘만 믿고 자칫 ‘어깨’로 빠지곤 하죠”
초등학생 야구부 시절부터 15년 넘게 뒷바라지해 오신 부모님을 생각해서라도 빗나갈 순 없었다. 1998년 LG와 한화 구단에서 트레이드를 통한 재기를 권했지만 선수생활을 포기했다. 성동초교 감독을 맡아달라는 제의도 정중히 거절했다. 그 뒤 야구장에도 안나가고 선후배와도 연락을 끊었다. 전혀 다른 길을 가고 싶었다.
사실 이때까지도 미용 쪽에 발을 들여놓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미용은 어머니가 40년 동안 해온 일이다. 어깨 너머 배운 솜씨로 해외 전지훈련 때 동료·코치의 머리를 깎아준 적은 있다. 그런데 고교 졸업 후 미용일을 시작한 동생이 “서른을 넘기면 미용에 적응하기 어려울 것”이라며 권유를 해왔다.
경록씨는 일찌감치 17살에 미용수업을 받았다. 야구보다 훨씬 전망이 열악한 럭비를 한 탓에 일찍 전향한 것이다. 운이 좋았던지 서울시내 내로라 하는 미용실 원장 11명이 세운 학원에서 개인지도를 받다시피 배워 단기간에 뛰어난 실력을 갖췄다. 3개월 만에 초보에서 프로급으로 올라선 것이다. 졸업 후 곧바로 실력을 발휘했다. 불과 20살에 헤어숍을 열었다. 몸무게 120㎏의 거구가 앙증맞은 가위를 들고 머리를 자르는 것이 화제가 됐다. 방송에도 출연하는 등 명성을 쌓아 나갔다.
이런 동생의 모습에 형은 놀랐다. 민국씨는 순전히 동생 덕분에 글러브와 공 대신 가위와 빗을 잡았다. 그는 동생과의 옥상 합동훈련 덕분에 1년반 만에 손님 뒤에 섰다. 처음엔 머리 끝만 살짝 다듬으면 되는데도 긴장해서 허공에다 헛가위질을 수없이 했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도 영 어색했다. 혹시나 남들이 알아볼까봐 신경도 쓰였다.
그러나 예전의 영광과 좌절을 깎아내듯 가위질을 해댔다. 미용에 맛을 들이기 시작하니 밤낮이 따로 없었다. 낮에는 흔쾌히 미용사들을 보조했다. 그는 이제 더 이상 폼나는 에이스 투수가 아니었다. 인생의 마운드는 더 냉정하다는 걸 터득하고 있었다. 정해진 타순, 뻔히 아는 타자가 아니었다. 생판 낯선, 까다로운 손님이 언제 닥칠지 모르는 상황. 이들을 요리할 혼자만의 마구(魔球)를 준비해야 한다.
“한번은 실수를 했는데 정신이 하나도 없더라고요. 숱을 치는 칼 대신 가위로 싹뚝 잘라버렸으니…. 손님이 ‘이게 뭐야!’ 하며 벌컥 화를 내는데 다 그만두고 도망치고 싶더라니까요”
이화여대앞 ‘김경록 헤어숍’ 어디에도 형제의 선수적 사진 한장 걸려 있지 않다. 미용일에 최선을 다할 뿐 과거 선수 경험을 팔아먹고 싶지 않아서다. 운동에 대한 미련도 없다. 은퇴한 뒤 민국씨는 야구장을 딱 한번 갔다. 하지만 후배들을 위해 하고 싶은 일이 한가지 있다. 제주도에 한 10만평쯤 땅을 마련해 야구 훈련장과 펜션을 지을 계획이다.
“굳이 해외로 나가지 않고도 제주도에서 저렴하게 전지훈련을 할 수 있게끔 하고 싶습니다. 못다 펼친 야구에 대한 아쉬움을 달랠 수 있을 거 같아서요. 중·고생이나 대학생을 직접 가르칠 수 있으면 더 좋고요”
-고리 넣은 ‘붙임 머리’고안, 관련 국내 특허도 2개 따내-
김민국·경록 형제는 파마나 커트만 하는 미용사는 아니다. 새로운 미용기술을 개발하기 위해 끊임없이 아이디어를 내놓는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최근 큰 관심을 모으고 있는 새로운 방식의 ‘붙임머리’. 약 2년 전 항암치료를 받은 여자 손님이 미용실에 찾아왔다. 독한 항암제 탓에 머리숱이 너무 적었다.
당시의 붙임머리는 머리카락을 열처리로 녹여가며 실리콘으로 붙여야 했다. 시간이 많이 걸리고 머리가 당겨 원형 탈모가 생기는 단점이 있었다. 더구나 숱이 적은 그녀에게는 이런 방식이 여의치 못했다. 듬성듬성 남은 머리카락을 몇가닥씩 모아 낚시바늘 같은 고리로 엮었다. 서너시간이 걸려 간신히 완성할 수 있었다.
이날 겪은 생소한 경험을 토대로 손이 많이 가는 기존 제품 대신 고리를 넣은 새 붙임머리를 고안해냈다. 간편하고 빠른 방식 덕분에 반응이 가히 폭발적이었다. 붙임머리와 관련된 국내 특허를 2개나 따냈다. 앞으로 미국·일본 등지의 해외 특허도 추진할 계획이다. 올해 4월부터는 전국의 미용원장이나 기술강사를 상대로 강연을 하고 있다.
〈글 전병역기자 junby@kyunghyang.com〉
5년 전 여름날 한밤중. 20대 중반의 사내 둘이 이대앞 한 건물의 옥상에서 만났다. 키 1m80㎝, 몸무게 100㎏쯤은 족히 돼 보이는 두 사람. 우람한 체격이 무슨 조직원을 연상시킨다. 손에는 가위까지 들었다. 한명이 팔짱을 낀 채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 눈짓으로 신호를 했다. 알았다는 듯 다른 사내가 가위질을 시작했다. 못마땅했던지 지켜보던 남자가 가위를 뺏어들었다.
“아니 형, 정말 이렇게밖에 못해!”
이들은 조폭이나 건달과는 거리가 먼 ‘가위손 형제’다. 형 김민국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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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록씨는 미용 실습용 마네킹 머리 1,000개를 준비했다. 밤마다 남들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마네킹의 머리카락 자르는 연습을 시켰다. 민국씨는 그런 동생이 고마우면서도 한편으론 얄밉기도 했다. ‘그래, 이참에 형의 능력을 보여주마’고 단단히 별렀다. 긴 머리카락의 끝 다듬기에서 짧은 커트, 삭발 등으로 가발이 잘려나간 마네킹이 차츰차츰 늘어났다. 민국씨는 6개월간 1,000개의 마네킹 머리카락을 다 자르고 나서야 미용실에서 가위를 잡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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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국씨는 신생팀인 한서고 시절 졸업할 때까지 전 게임을 모두 던졌을 정도로 무쇠팔을 자랑했다. 건국대 졸업때 ‘방어율·승률·최다승·탈삼진·최우수선수’라는 5관왕을 거머쥐었다. 프로야구 신인 드래프트에서 레이더스에 지명돼 기대를 한몸에 안았다. 그러나 프로 첫해 다리 인대 부상으로 빛을 발하지 못했다.
“운동하다가 크게 성공하지 못하면 이것도 저것도 안됩니다.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힘만 믿고 자칫 ‘어깨’로 빠지곤 하죠”
초등학생 야구부 시절부터 15년 넘게 뒷바라지해 오신 부모님을 생각해서라도 빗나갈 순 없었다. 1998년 LG와 한화 구단에서 트레이드를 통한 재기를 권했지만 선수생활을 포기했다. 성동초교 감독을 맡아달라는 제의도 정중히 거절했다. 그 뒤 야구장에도 안나가고 선후배와도 연락을 끊었다. 전혀 다른 길을 가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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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록씨는 일찌감치 17살에 미용수업을 받았다. 야구보다 훨씬 전망이 열악한 럭비를 한 탓에 일찍 전향한 것이다. 운이 좋았던지 서울시내 내로라 하는 미용실 원장 11명이 세운 학원에서 개인지도를 받다시피 배워 단기간에 뛰어난 실력을 갖췄다. 3개월 만에 초보에서 프로급으로 올라선 것이다. 졸업 후 곧바로 실력을 발휘했다. 불과 20살에 헤어숍을 열었다. 몸무게 120㎏의 거구가 앙증맞은 가위를 들고 머리를 자르는 것이 화제가 됐다. 방송에도 출연하는 등 명성을 쌓아 나갔다.
이런 동생의 모습에 형은 놀랐다. 민국씨는 순전히 동생 덕분에 글러브와 공 대신 가위와 빗을 잡았다. 그는 동생과의 옥상 합동훈련 덕분에 1년반 만에 손님 뒤에 섰다. 처음엔 머리 끝만 살짝 다듬으면 되는데도 긴장해서 허공에다 헛가위질을 수없이 했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도 영 어색했다. 혹시나 남들이 알아볼까봐 신경도 쓰였다.
그러나 예전의 영광과 좌절을 깎아내듯 가위질을 해댔다. 미용에 맛을 들이기 시작하니 밤낮이 따로 없었다. 낮에는 흔쾌히 미용사들을 보조했다. 그는 이제 더 이상 폼나는 에이스 투수가 아니었다. 인생의 마운드는 더 냉정하다는 걸 터득하고 있었다. 정해진 타순, 뻔히 아는 타자가 아니었다. 생판 낯선, 까다로운 손님이 언제 닥칠지 모르는 상황. 이들을 요리할 혼자만의 마구(魔球)를 준비해야 한다.
“한번은 실수를 했는데 정신이 하나도 없더라고요. 숱을 치는 칼 대신 가위로 싹뚝 잘라버렸으니…. 손님이 ‘이게 뭐야!’ 하며 벌컥 화를 내는데 다 그만두고 도망치고 싶더라니까요”
이화여대앞 ‘김경록 헤어숍’ 어디에도 형제의 선수적 사진 한장 걸려 있지 않다. 미용일에 최선을 다할 뿐 과거 선수 경험을 팔아먹고 싶지 않아서다. 운동에 대한 미련도 없다. 은퇴한 뒤 민국씨는 야구장을 딱 한번 갔다. 하지만 후배들을 위해 하고 싶은 일이 한가지 있다. 제주도에 한 10만평쯤 땅을 마련해 야구 훈련장과 펜션을 지을 계획이다.
“굳이 해외로 나가지 않고도 제주도에서 저렴하게 전지훈련을 할 수 있게끔 하고 싶습니다. 못다 펼친 야구에 대한 아쉬움을 달랠 수 있을 거 같아서요. 중·고생이나 대학생을 직접 가르칠 수 있으면 더 좋고요”
-고리 넣은 ‘붙임 머리’고안, 관련 국내 특허도 2개 따내-
김민국·경록 형제는 파마나 커트만 하는 미용사는 아니다. 새로운 미용기술을 개발하기 위해 끊임없이 아이디어를 내놓는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최근 큰 관심을 모으고 있는 새로운 방식의 ‘붙임머리’. 약 2년 전 항암치료를 받은 여자 손님이 미용실에 찾아왔다. 독한 항암제 탓에 머리숱이 너무 적었다.
당시의 붙임머리는 머리카락을 열처리로 녹여가며 실리콘으로 붙여야 했다. 시간이 많이 걸리고 머리가 당겨 원형 탈모가 생기는 단점이 있었다. 더구나 숱이 적은 그녀에게는 이런 방식이 여의치 못했다. 듬성듬성 남은 머리카락을 몇가닥씩 모아 낚시바늘 같은 고리로 엮었다. 서너시간이 걸려 간신히 완성할 수 있었다.
이날 겪은 생소한 경험을 토대로 손이 많이 가는 기존 제품 대신 고리를 넣은 새 붙임머리를 고안해냈다. 간편하고 빠른 방식 덕분에 반응이 가히 폭발적이었다. 붙임머리와 관련된 국내 특허를 2개나 따냈다. 앞으로 미국·일본 등지의 해외 특허도 추진할 계획이다. 올해 4월부터는 전국의 미용원장이나 기술강사를 상대로 강연을 하고 있다.
〈글 전병역기자 junby@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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