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사의 재발견/겨례의 지도자

호남이 보는 박근혜

화이트보스 2010. 9. 2. 08:54

호남이 보는 박근혜
 
 
류중구 여수엑스포 시민포럼 공동대표는 한나라당 박근혜 전 대표에 대해 “나는 박 전 대표를 신뢰한다. 차기 대권주자로서 매력적이다”라고 말한다. 류중구 대표가 박근혜 의원을 만난 것은 2003년 초 여수 엑스포 유치를 위해 동분서주할 때였다. 여수지역 시민사회단체 대표 자격으로 다른 5명과 함께 당시 서울 여의도의 한나라당 천막 당사로 박 대표를 찾아갔다. 당시 류 대표는 ‘2010년 세계박람회 대안 마련을 위한 범시민 대책위 상임대표’였다.

그는 박 대표에게 “2012년 엑스포를 여수에 유치할 수 있도록 한나라당의 공식 정책으로 삼아달라”고 간곡하게 요청했다. 당시 여수는 그 전 해 12월에 결정된 ‘2010년 엑스포’ 유치에서 중국 상하이(上海)에 밀려 크게 실망한 분위기였다. 류 전 대표는 야당 대표인 박근혜 의원에게 “박람회 예정 부지로 계획하는 여수신항(新港)을 꼭 방문해 달라”고도 건의했다. 류 대표가 요청한 두 가지 모두 당시 박 대표가 “약속하겠다”고 했고 이후 실천했다. 류 대표는 2003년 5월 두 가지 약속을 지킨 박 대표에게 ‘조용한 카리스마를 지닌 박근혜 대표’라는 제목으로 감사의 이메일을 보냈다. “지역현안에 대해 경청하고 또 약속을 지켜주어 감사드린다”는 내용이었다. 지금 여수는 ‘2012년 엑스포’ 개최를 앞두고 준비가 한창이다.

“본인 스스로 잘 관리하는 것 같다”

류 대표가 바라보는 정치인 박근혜 전 대표는 ‘믿음의 정치인’이다. 최근까지 전국과 정국을 크게 흔들었던 행정복합도시 세종시 문제도 호남이 박 전 대표에게 점수를 더 주는 계기가 됐다. 수도권과 지방 등 전국적으로 보면 박 전 대표의 세종시를 둘러싼 원안 고수 입장은 그의 이미지에 긍정적·부정적 영향을 동시에 남겼다. 하지만 호남에서는 ‘원칙의 정치인’ 박근혜에 더 높은 평가를 했다. 호남에서는 이명박 대통령이 제기한 세종시 수정안보다는 노무현 대통령 당시 확정한 원안대로 가야한다는 분위기가 지배적이었다. 과거 ‘영남’ 정권하에서 ‘발전 축’으로부터 멀어진 호남을 발전시키려면, 그 논리는 ‘지역균형발전론’일 수밖에 없다고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전남 여수에서 건설사를 운영하는 50대 김모씨는 박근혜 전 대표에 대해 “답답하게 보일 정도로 원칙과 소신을 중요시하는 점은 강점”이라고 했다. 다른 40대 중반 직장인 권모씨도 “한나라당 내의 지탄을 받으면서도 세종시 원안을 지키는 모습을 보고 믿음이 갔다”고 말했다.

박 전 대표의 고집스러운 일면을 지적한 이들도 있다. 광주지역 40대 초반 여성 이모씨(생명보험사 근무)는 “여러 면에서 본인을 스스로 잘 관리하는 것 같다”며 “그러나 자기 희생이 필요할 때 나서지 않고 명분에 집착하는 면도 보인다”고 말했다. 한 시민사회단체 관계자는 “정치 지도자인데 전면에 나서지 않고 막후 정치만을 하는 것 같다. 현실 정치에 발을 붙이고 있는 것이 아니고, 살짝 떨어져 있는 것 같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어 “대권주자로서 매력이 없다. 치열한 점이 없기 때문이다. 이명박 대통령의 독주, 열악한 지방자치 등 어느 하나 치고나가거나 해결하려 들지 않는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하지만 여성 정치인 박 전 대표에 대한 기대도 있었다. “구태에 물들지 않았다” “섬세하다. 여성이기 때문에 정치적 술수는 덜 쓰는 것 같다”는 반응들이 그것이다. 그러면서도 “‘공주과’의 모습도 보이는 것 같다”고도 했다.

‘아버지 박정희’ 넘어야

대권주자로서 박 전 대표가 호남에서 넘어야 할 산이 있다. 다름 아닌 ‘아버지 박정희’이다. 그 ‘아버지’는 박 전 대표에게는 양지와 음지를 동시에 선사하고 있다. 최근 흥미로운 보도가 있었다. 최근 ‘김대중 자서전’이 발간된 직후였다. 호남의 대표적인 일간지 광주일보는 자서전의 내용을 1면에 이어 2개 면에 걸쳐 상세하게 보도했다. 그런데 그중 한 면의 제목이 “박근혜 사과, 박정희가 환생 화해 청한 것 같았다”였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박정희 전 대통령 치하에서 오랫동안 정치적으로 탄압을 받았다. 목숨을 잃을 뻔한 일도 있었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 두 사람은 모두 고인이 됐고, 그들이 사라진 시대에서 두 사람이 역사적인 화해를 하는 듯한 모습에 호남 언론은 주목했다. 호남 언론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딸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를 주목하고 있다는 방증으로 김 전 대통령과 박 전 대표가 악수하는 사진을 크게 실었다.

호남사람들은 과거 영남과 호남, 박정희와 김대중을 대척점에 놓고 보았다. 그런 정서가 흐르는 가운데 김대중 전 대통령이 ‘아버지 시절에 여러 가지로 피해를 입힌 점’에 대한 박 전 대표의 사과를 진심으로 받아들였다는 것은 호남사람들이 화해의 시각에서 박 전 대표를 볼 수 있는 계기를 던져주었다고 할 수 있다.

아버지의 그늘이 ‘그늘’이 아니라는 면을 강조하는 이도 있었다. 한나라당 광주지역당직자는 “새마을운동을 비롯해 농촌을 살기 좋게 하기 위해서 (박 전 대통령이) 얼마나 고심했느냐. 그 시기를 경험한 노년세대들은 (박 전 대표를) 좋게 생각하는 이들이 많다”고 했다. 그는 “호남에서 박 전 대표의 지지도가 다른 지역과 같은 비율로 나오고 있다”고 말했다.

호남에서의 지지도 타지역만큼 나와

지역의 기류도 변하고 있다. 광주와 전남·전북은 지난 6월 2일 치러진 지방선거 때 광역자치단체장 한나라당 후보들이 10% 중후반대의 지지율을 보여주었다. 한나라당으로선 대단한 약진이었다. 특히 지난 6·28 보선의 경우 광주에서 반(反)·비(非)민주당 세력을 결집하기 위해 시민사회단체들이 연합하기도 했다. ‘지역의 여당’인 민주당이 지역에서 비판받은 게 원인(遠因)으로 작용한 점도 있었다. 민주당의 ‘독식’ 시대는 저물고 있다는 방증이었다. ‘변화의 시기’에서 호남인들이 박 전 대표에게 기대하거나 물음표를 던진다는 것은 그의 위상을 받아들이고 있다는 증표임에 틀림없다.

권경안 조선일보 호남취재본부장 

출처 : http://weekly.chosun.com/client/news/viw.asp?nNewsNumb=002118100003&ctcd=C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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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 취임 후 1년간 6번 방문, 5·18 묘역 참배 등 줄기찬 러브콜
박근혜와 호남

 
“세월이 흘러 그의 맏딸 박근혜가 나를 찾아왔다. 박정희가 세상을 떠난 지 25년 만이었다. 박 대표는 ‘아버지 시절에 여러 가지로 피해를 입고 고생하신 데 대해 딸로서 사과 말씀을 드립니다’라고 말했다. 박정희가 환생해 내게 화해의 악수를 청하는 것 같아 기뻤다. 사과는 독재자의 딸이 했지만 정작 내가 구원을 받는 것 같았다.”

지난 7월 29일 출간된 ‘김대중 자서전’에는 2004년 8월 박근혜 당시 한나라당 대표가 김대중 전 대통령을 찾아와 사과했다는 대목이 들어있다. 김 전 대통령은 자서전에서 “그 말이 참 고마웠다, 세상에 이런 일도 있구나 했다”고 당시 심경을 밝혔다.

사과가 있었던 2004년 8월 28일은 한나라당 내부에서 호남 민심 공략을 의미하는 ‘서진(西進)정책’이 거론되던 때였다. 당시 야당이던 한나라당 일부에선 “DJP(DJ+ JP의 줄임말·DJ는 김대중 전 대통령, JP는 김종필 전 자민련 총재) 연합과 비슷한 권력 분점을 해야만 정권교체와 동서화합을 이룰 수 있다”며 민주당과의 연합론까지 거론되고 있었다. 박 전 대표의 사과는 이런 분위기와 맞물려 ‘호남을 향한 화해’로 해석되면서 ‘한나라당이 본격적으로 호남 껴안기에 나섰다’는 관측으로 이어졌다.

박 전 대표가 ‘호남 민심을 얻지 못하면 대권을 쥐기 어렵다’는 인식을 하고 호남 구애에 적극적으로 나서기 시작한 것은 이 시기를 전후해서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2004년 3월 한나라당 대표가 된 그는 취임 직후인 3월 28일, 첫 지역 방문지로 광주를 택했다. 5·18 묘역을 참배한 그는 시민들과 자리를 갖고 “호남에 비례대표 3석을 배정키로 한 약속을 지키겠다”고 말했다. 그로부터 1주일 뒤인 그해 4월 4일, 한나라당이 첫 대의원대회 장소로 택한 곳도 광주였다. 박 전 대표는 이날 호남뿐 아니라 영남지역 대의원들까지 광주로 불러모아 대규모 대회를 개최했다. 그리고 한 달 뒤인 5월 18일 다시 광주를 찾아 민주화운동 기념식에 참석하고 망월동 국립묘지에 참배했다. 두 달 뒤인 7월엔 이례적으로 최고위원 경선 첫 합동유세를 역시 광주에서 가졌다. 

“호남 고속철 조기 착공” 주문

박 전 대표가 취임 넉 달 만에 김대중 전 대통령을 찾아가 사과 발언을 한 것은 이같은 맥락에서 이뤄진 일이다. 그런데 그의 ‘호남 공략’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김 전 대통령을 만난 지 보름 뒤인 8월 28일 박 전 대표는 한나라당 의원 전원을 대동해 전남 곡성에서 연찬회를 가졌다. 한나라당이 당내 주요 행사를 호남서 개최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그것도 2박3일 일정이었다. 당시 한나라당은 이에 대해 “영·호남 화합에 대한 의지의 표현”이라 말했다. 박 전 대표는 영·호남 화합을 상징하는 의미에서 의원들과 섬진강을 순례하고 5·18 묘역을 참배했다.

박 전 대표는 대표 취임 후 1년간 여섯 번이나 호남을 찾았다. 취임 만 1년이 되던 2005년 3월에도 그랬다. 그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고향인 전남 신안을 방문해 “호남을 발전시키고 서남해안을 관광벨트로 만들기 위해서는 호남고속철 조기 착공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지역 현안에 앞장서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한 것이다. 박 전 대표는 이어 “신안군은 큰 정치인이 두 분(김대중·한화갑)이나 나온 곳이라 늘 와보고 싶었고, 여러분의 긍지도 높으실 것”이라며 “그렇기에 지역발전을 위해 두 분과 함께 노력하겠다”고 했다. 박 전 대표는 이 자리에서 “갑자기 호남분들로부터 많은 지지를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며 하지만 “진실한 마음으로 꾸준히 노력한다면 한나라당도 호남에서 신뢰를 받고 사랑받는 정당이 될 것”이라며 속마음을 드러냈다.

박 전 대표가 1년 이상 줄기차게 호남에 러브콜을 보내자 비판적 시각도 뒤따랐다. ‘표를 의식한 계산된 행동 아니냐’는 것이었다. 그러자 박 전 대표는 신안 방문 직후 기자간담회를 갖고 “‘서진정책’ 같은 표현은 적절하지 않다”고 전제한 뒤 “전국정당화 차원에서 호남 주민들께 사랑받기 위해 꾸준히 노력하고 있다”며 “호남 주민들도 우리를 사랑해 줄 것”이라고 말했다. 이 기자간담회를 가진 자리 역시 호남, 그것도 김대중 전 대통령의 정치 무대였던 목포였다.

박 전 대표의 호남 러브콜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목포에서 올라온 그는 이튿날인 3월 30일 최고위원·중진 연석회의를 주재하면서 “또 하나의 지역구란 점을 떠나 ‘마음의 벗이 있는 곳, 호남’이란 식으로 자연스럽게 마음의 차이를 좁히자”고 했다. 그리고 6개월 뒤인 그해 9월 김대중 전 대통령이 세균성 폐렴으로 입원하자 병 문안을 시도했다. ‘휴식이 필요하다’는 이유로 김 전 대통령과의 만남이 이뤄지지는 못했지만 두 사람은 두 달 뒤인 그해 11월 두 번째 자리를 가졌다. 이 만남은 김 전 대통령 측에서 연락을 취해 동교동에서 이뤄졌다. 박 전 대표의 러브콜에 대한 화답의 의미였다. 박 전 대표는 이날 극복해야 할 최우선 과제로 동서화합의 중요성을 강조한 뒤 “자주 찾아뵙고 좋은 말씀 듣겠다”고 말해 또 한번 주목을 받았다.

러브콜은 이듬해인 2006년에도 계속됐다. 박 전 대표는 “지역과 지역을 나누고 너와 나를 갈라 일부를 대변하는 정치는 안된다”며 “호남 주민들이 마음을 열어주실 때까지 노력하고 또 노력할 것”이라 말했다. 5·31 지방선거를 한 달 앞둔 4월 27일 전북학생종합회관에서 열렸던 전북도당 필승결의대회장에서였다. 이 자리에서 박 전 대표는 “한나라당이 호남을 대표하는 당이 되겠다”고도 했다. 그리고 첫 지방유세를 광주에서 시작했다.

[...후략...]

이범진 차장대우, 안정민 인턴기자·연세대 4년  

 

출처 : http://weekly.chosun.com/client/news/viw.asp?nNewsNumb=002118100004&ctcd=C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