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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해자는 가만있고, 피해자는 출구 찾고

화이트보스 2010. 9. 17. 10:59

가해자는 가만있고, 피해자는 출구 찾고

입력 : 2010.09.16 22:14

송영대 전 통일부 차관

천안함 가해자 북한은 사과할 기미도 없는데
피해자인 우리가 출구 전략 운운…
제2, 제3의 천안함 피격 스스로 불러들이는 꼴

천안함 피격사건에 대한 최종 합동조사 결과 보고서는 사건 범인인 북한에 대해 유죄 판결을 내리기에 충분한 객관적·과학적 증거를 제시했다. 그러나 가해자인 북한은 피해자인 우리에게 사과 한 마디 없이 6자회담 재개 주장에 이어 이산가족상봉이란 카드를 앞세우면서 대북제재 국면을 대화 국면으로 전환시키기 위한 유화전략을 본격화하고 있다. 이에 때맞춰 정부는 북한 수해 지원 발표에 이어 개성공단 체류인원을 천안함 사건 이전 상태로 늘림으로써 사실상 대북제재를 완화했다.

정치권은 단순히 수해지원용 쌀이 아니라 김대중·노무현 정부 시절 연간 30만~40만t씩 지원했던 것과 같은 대규모 쌀 지원 재개를 정부에 요구하고 있다. 북한이 천안함 사건에 대한 책임을 모면하기 위한 술책으로 유화 전략을 구사하는 것은 예견된 일이다. 그러나 북한의 사과를 받아내야 할 우리가 북한의 조치가 없는 상황에서 천안함 국면을 벗어나려고 안달하는 것은 참으로 괴이한 일이다.

통상 가해자와 피해자가 있는 사건에서 출구 전략이란 것은 가해자가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궁리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경우에는 피해자인 우리가 먼저 출구 전략을 모색하고 있다. 사실상 살인범에게 면죄부를 주는 것과도 같다.

왜 이런 현상이 벌어지는가. 여기에는 정치적·정략적·이념적 동기가 작용하고 있다. 여기에 대해선 긴 설명이 필요 없을 것이다. 다만 대규모 쌀 지원 주장 배경에 국내 쌀 재고량 처분으로 인한 농민 표를 의식했다면 이것은 통일문제를 이용한 포퓰리즘으로서 참으로 위험한 발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주장을 하는 정치인들은 나중에 그 책임을 져야 한다.

우리가 그동안 대북정책 추진 과정에서 잊어버린 중요한 원칙이 하나 있다. 그것은 북한을 정상국가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정상국가란 무엇인가. 지도자가 자기 백성을 위하고, 대외적으로 맺은 약속은 지키며, 평화를 애호하고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지키는 나라다. 북한은 정상국가가 되기는커녕 테러국가, 불량국가, 권력세습국가로서 국제사회에서 기피의 대상이 돼 있다. 우리가 이런 나라를 통일의 파트너로 끌고 가기 위해서는 죄를 지으면 벌을 받아야 하고, 도발에는 대가가 따르고, 그 책임을 져야 한다는 극히 당연한 법치(法治)의 원리를 깨닫도록 해줘야 한다.

그렇지 않고 나쁜 행동에 눈을 감아주거나 보상을 하면 그들은 제2의 천안함 사건도 반드시 일으킬 것이다. 또한 우리는 과거 대북정책에서 북한 당국과 주민을 혼동하고 정치적 지원을 인도적 지원으로 포장하는 우(愚)를 범해왔다. 우리가 통일에 성공하려면 북한 주민의 마음을 사야 하는 것은 사실이다. 이를 위해서는 그들이 어려울 때 도와줌으로써 통합 시 남한을 선택할 수 있게 해야 한다. 이번에 정부가 보내는 수재 지원물자는 수혜 대상을 북한 주민으로 해야 한다. 정치권에서 주장하는 40만t 정도의 쌀 지원은 인도적 지원이라기보다는 정치적 지원의 성격을 띨 수밖에 없다. 김정일 정권의 연명을 도와준다는 점에서 우리가 지향하는 북한의 정상국가화에 역행되는 처사라 할 수 있다.

천안함 폭침은 대한민국에 대한 북한의 공격일 뿐 아니라 동족에 대한 집단살인 행위였다. 이런 북한의 태도에 변화가 없음에도, 출구전략을 말하는 것은 46명의 죽음 앞에서 "이제 너희를 그만 잊고 가야겠다"고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것은 도발→대화→도발을 수없이 반복해온 그릇된 북한의 행태를 조장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출구전략 운운하는 사람들에게 묻고 싶다. 도대체 46명 희생의 의미는 무엇인가. 이제는 천안함을 잊어도 될 만큼 이들의 희생은 별 가치가 없어졌다는 말인가. 이것이 젊음을 나라에 바친 영혼들에 대한 산 자의 도리인가, 보훈인가. 이것이 요즘 유행한다는 정의인가. 왜 피해자가 출구를 찾으려 안절부절못하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햇볕정책의 과오 가운데 하나가 북한은 하나도 변하지 않은 가운데, 우리만 변했다는 사실이다. 이번 천안함 사건 이후 상황 전개가 바로 그런 모습을 정확히 보여주고 있다. 문제는 북한보다 우리 내부에 있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통일문제와 관련해 직면하고 있는 위기의 핵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