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화하는 한옥의 재발견]<5>송인호의 서울 삼청동 한옥카페 ‘연’
골목안 작은 마당, 느림의 향기 머물다
상업주의서 한걸음 벗어나 다양한 크기 공간들 오밀조밀…도심속 전통과 현대 어우러져
《서울 종로구 삼청동은 언제부턴가 국적이 모호한 동네가 됐다. 기와지붕 아래 샹들리에를 밝히고 파스타를 먹거나 나무 마루 뒤 벽난로 앞에 앉아 와플과 아이스크림을 먹는다. 오가는 행인 옆으로 슬쩍 물러나 골목 뒤에 숨어 앉은 한옥카페 ‘연(緣)’은 이 동네를 관통하는 변화의 흐름에서 한 뼘쯤 떨어져 있다. 작은 아파트 실내면적보다 좁은 82m²의 용지. 실내공간이 차지한 건축면적은 52m²에 불과하다. 하지만 ‘손바닥만 한’ 이 건물 안에 들어가 앉은 이는 어느 위치에서건 좁거나 답답하다는 느낌을 받지 않는다. 오히려 다른 사용자들과 적절히 분리된 개별 공간을 넉넉히 차지하고 앉았다는 기분이 든다. 어느 누구도 평행한 위치에서 같은 곳에 시선을 두지 않도록, 다양한 크기의 아담한 공간을 오밀조밀 엮어 놓았기 때문이다.》
![]() 문간에서 바라본 서울 종로구 삼청동 카페 ‘연(緣)’. 마당에 평상과 사랑채까지 있을 것은 다 있지만 꾸역꾸역 몰아넣은 답답함은 어디서도 느껴지지 않는다. |
땅을 정한 다음 공간 디자인을 구상하기 시작할 때 보통 먼저 고민하는 것은 평면의 짜임이다. 하지만 이 건물의 설계자인 송인호 서울시립대 건축학부 교수(53)는 평면에 앞서 단면의 구성부터 스케치했다. 평평했던 땅을 대문 쪽으로 갈수록 점점 낮아지도록 단의 차이를 만들고 낮아진 부분에는 2개층의 나지막한 공간을 쌓아올렸다. 대문을 들어서서 왼쪽에 있는 문간방 아래에는 손님이 쉽게 알아챌 수 없는 지하 골방이 있다. 문간방에 들어앉아 고개를 들면 주방 위로 얹어진 다락 응접실이 보인다. 다락이지만 불편할 만큼 좁지 않고 오히려 오붓한 맛이 있다.
“삼청동길 동쪽 주택가 뒤로 길게 늘어선 축대는 이 지역에 한창 한옥이 세워지던 1940년대에 만들어졌다. 바로 옆 가회동과 달리 삼청동은 원래의 경사 지형을 거슬러 마련한 지역인 것이다. 나는 그것 역시 이 땅이 받아들인 하나의 흐름이라고 생각한다. 좁은 용지 때문에 2층 단면을 고려하는 과정에서 지형을 변화시키는 선택에 대한 부담을 조금은 덜 수 있었다.”
좁은 땅이지만 마당은 포기하지 않았다. 두 사람이 마주보고 딱 붙어 서면 가득 차는 넓이. 하지만 식탁보만 한 마당이 있기에 디귿 자로 다닥다닥 둘러붙어 앉은 공간 사이로 숨통이 트인다. 안채와 바깥채의 실제 거리는 두 걸음이 안 되는데 마당에 놓인 평상을 돌아 나가는 시간의 느낌은 결코 ‘한달음’이 아니다.
송 교수는 작(作)보다 학(學)에 기운 건축가다. 그가 설계 실무를 맡은 한옥은 카페 연과 종로구 원서동 궁중음식연구원 두 채뿐이다. 하지만 한옥 영역에 관심을 둔 건축가 가운데 송 교수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고 할 수 있는 사람은 드물다.
그가 처음 한옥에 관심을 둔 것은 서울대 대학원 건축학과 박사과정 중이던 1985년 가회동 11번지 한옥보존지구를 조사했을 때였다. 지도교수였던 이광노 교수가 주관한 실측조사보고서 작업을 진행하면서 한옥을 평생의 화두로 삼기로 결심했다. 송 교수도 그전까지는 한옥이라 하면 경북 안동시 하회마을이나 경북 경주시 양동마을 같은 곳의 고풍스러운 한옥만 생각했다.
![]() 대문 옆 골목을 내다보는 문간방 창은 길 건너 지붕의 풍광을 집 안으로 끌어 들인다. 외부와의 관계 맺음을 통해 사용자는 공간의 풍성한 표정을 경험한다. 사진 제공 서울시립대 |
“한옥은 계속 지어지고 있었는데, 사람 사는 한옥 공간이 분명 있는데 학문적 연구는 옛날 것에만 머물러 있다는 걸 알게 됐다. 특히 서울이라는 도시가 겪은 변화의 흐름과 한옥이라는 우리 전통의 건축양식이 만나온 방법에 대해 알아보고 싶었다. 다들 말렸다. ‘집장수가 늘어놓은 집을 왜 연구하려 하느냐’는 거였다.”
1990년 송 교수는 ‘도시형 한옥의 유형 연구’라는 주제의 박사논문을 내놓았다. 연구 대상은 1930∼60년대에 서울에 지어진 한옥들. 1935년 이후 부동산업자들이 땅을 사들여 100∼160m² 규모로 필지를 조각내 소규모 한옥을 지어 아파트처럼 분양한 건물이다. 송 교수는 이 집적 주택들이 전통한옥의 구조와 공간 미학을 상당 부분 이어내며 근대 도시생활의 수요에 적응한 건축 유형이라고 정리했다.
송 교수의 연구는 10년 뒤 북촌 한옥이 한꺼번에 허물어질 뻔한 상황을 수습하는 데 요긴하게 쓰였다. 1990년 1500여 채였던 이 지역의 한옥은 2000년에 900여 채만 남았다. 2000년에는 가회동 한옥 200여 채가 한꺼번에 헐리는 일도 있었다. 한옥보존지구가 해제되면서 다세대주택이 급속히 들어선 것이다. 송 교수는 뜻을 같이하는 이들과 함께 북촌 한옥이 가진 도시 경관으로서의 가치를 강조했다. 그 결과 2001년 서울시는 ‘북촌 가꾸기 기본계획’을 마련해 북촌 한옥 보수에 보조금을 지급하기 시작했다. 송 교수는 서울시정개발연구원과 함께 이 계획의 골자를 만들었다. 건물 외관은 되도록 옛 형태로 보존하되 내부는 쓰임과 취향에 따라 편리하게 바꿀 수 있게 했다.
“허물어짐을 늦추면서 형상은 외려 전보다 나아졌다. 전봇대가 없어지고 시멘트 길에는 흙이 덮였다. 거적으로 덮였던 처마도 다시 오롯이 솟았다. 하지만 북촌이 ‘사람 살기 좋은 동네’가 되고 있는 걸까. 상업건물의 파도에 밀려 커뮤니티는 훼손됐다. 올해 발효된 서울시 북촌지구단위계획은 지역별 건물용도 가이드라인에 초점을 맞췄다.”
카페 연은 한가운데 마당으로 인해 공간 전체의 숨통을 텄다. 삼청동은 작고 단단한 이 한옥 덕에 상업주의 밀물에서 작은 숨통을 텄다. 송 교수가 카페 연 안에 두고자 한 것은 외부와의 관계다. 한옥에 정답은 없으되 하나로 휩쓸려가서는 곤란하다고, 이 건물은 이야기한다.
손택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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