保守의 바탕은 이승만과 박정희의 역사적 선택
자랑스런 전통 없는 나라엔 보수 정당도 없다
오바마는 '모든 게 제 탓'이라고 고개를 떨궜다. 경제의 더딘 회복과 국민의 좌절감과 일자리 부족으로 어깨를 움츠리고 있는 젊은이들이 넘쳐나는 현실이 다 자기 탓이라고 했다. 경제위기 폭탄은 부시 정권 때 터졌다. 더구나 경제 정책의 효과가 전등(電燈)의 스위치를 켜듯 신속하게 나타날 리 없는데 왜 혼자 책임을 둘러쓰겠다는 것일까. 레이건 대통령은 첫 임기 4년 내내 높은 실업률로 고생했다. 전임자 시절 시작된 경기 후퇴 때문이었다. 아버지 부시 대통령은 취임 18개월 만에 밀려온 경기 침체로 재선(再選) 기회를 날려버렸다. 그런가 하면 클린턴 대통령은 경제정책의 시동도 채 걸지 않았는데 경제 엔진이 갑자기 붕붕거리며 돌아갔다. 이 덕분에 백악관 인턴 르윈스키와의 스캔들을 너끈하게 버텨냈다. 오바마는 이게 대통령의 팔자(八字) 소관이란 걸 깨닫고 현명하게 처신한 것이다. 가만 보면 그런 오바마도 정책의 바탕이 된 원칙에선 물러서지 않겠다는 고집은 끝내 꺾지 않은 듯했다.
오바마의 이런 모습을 당의 강령(綱領)을 바꿔 '개혁적 중도 보수 정당'으로 신장개업하겠다는 한나라의 요즘 움직임과 겹쳐 보면 여러 생각이 오간다. '집권당을 바꾸는 것이 좋겠다'가 61.6%, '한나라당이 한 번 더 집권하는 것이 좋겠다'가 38.4%로 나온 어느 여론조사가 한나라당을 몰아세웠다고 한다. 병이 도지고 나서 치료약을 구하러 다니느니 몸이 찌뿌듯할 때 서둘러 보신(補身)하는 게 낫다. 그렇다 해도 병명(病名)도 모른 채 약국 문을 두드려선 소용이 없다. 한나라당을 '부자정당' '병역 면제자 정당'이라 손가락질하는 모습은 늘 봐 왔다. 그러나 한나라당이 '보수병(保守病)'을 앓는다는 건 처음 듣는 소리다. 그것도 보수 정당이라고 제 입으로 말한 적도 없는 한나라당이 말이다.
몰라서 그렇지 보수 정당이란 게 아무 나라에나 있는것이 아니다. 지키고 이어 가야 할 전통이 있어야 보수 정당도 존재할 수 있다. 보수당이라는 당명(黨名)이나 보수의 정신을 내걸고 있는 정당은 선진국밖에 없다. 영국의 보수당(Conservative Party)은 대영제국이 세계를 호령하던 '영국에 의한 평화(Pax Britanica)' 시절을 재현(再現)·계승하려는 정신을 딛고 서 있다. 원래는 토리당(Tory Party)이던 걸 1830년 아예 이름을 바꿨다. 미국 공화당 등 뒤에도 '미국에 의한 평화(Pax Americana)' 시대의 병풍이 둘러쳐져 있다. 지켜나갈 가치 있는 전통도, 이어받아 물려줘야 할 자랑스런 정신도 없다고 생각하는 남미·아프리카·아시아 국가들의 정당 이름은 죄다 '무슨 무슨 혁명당(革命黨)' '무슨 무슨 개혁당(改革黨)'이다. 매년 혁명하고 매달 개혁한 나라의 모습이 어떤지는 우리 모두 보아왔다. 눈 씻고 찾아도 보수 정당은 없다.
한국에 보수 정당이 설 수 있는 터전이 마련된 것은 '공산주의냐 자본주의냐'의 갈림길에서 자본주의를 택한 정부 수립 과정의 첫 번째 선택과 '자급자족 경제냐 대외 개방형 수출 경제냐'의 진로를 놓고 대외 개방형 수출 경제의 길을 골랐던 5·16 이후의 두 번째 선택 덕분이다. 두 번 모두 반대편 길로 빠졌던 김일성 왕국의 오늘을 보면 대한민국의 그때 선택이 자랑스러울 수밖에 없다. 한나라당이 이 운명적 선택의 주역인 이승만과 박정희를 한 번도 정색하고 거론한 일이 없다. 두 시대 다 빛 못지않게 그늘 또한 짙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림자가 없으면 도깨비이지 사람이 아니다. 그런데도 한나라당은 좌파들이 이승만과 박정희의 업적을 지우려 나대도 못 본 체하며 행여 두 사람의 그림자에 갇힐까 봐 손사래만 쳐왔다. 며칠 후 G20 정상들이 서울을 찾는 것도 이승만의 자유를 향한 모험과 박정희의 빈곤 탈피를 향한 도전 위에 김영삼·김대중 시대의 민주화가 얹힌 덕택이다.
대한민국은 이승만·박정희 시대의 핵심이 무엇인가를 뚫어봐 계승할 것은 계승하고, 그림자의 원인을 정확히 가려내 도려낼 것은 도려내며 전진해야 한다. 한나라당이 울타리를 낮춰 더 많은 국민을 품으려고 마당을 넓히려는 것은 옳다. 그러려면 중도(中道)로 가기에 앞서 자기네 족보(族譜)부터 챙길 줄 알아야 한다. 그래야 도덕적으로 당당하고 약하고 가난한 사람에게 기회의 문(門)을 따주는 새로운 정당으로 거듭나는 길도 활짝 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