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1200만원 주고 용병을 쓰든지, 아니면…
해적이 선박에 오르는 데 15분
올 9월까지 해적사건 289건
우리나라 해운 물동량의 29%가 소말리아 해역 지나
지난 7월 네덜란드를 출발해 터키를 거쳐 수에즈 운하를 빠져나오던 국내 한 해운업체의 3만t급 벌크선이 바다 위에 멈춰 섰다. 곡물과 시멘트 등을 가득 실은 벌크선이 닻을 내리고 대기하자, 보트 한 대가 다가왔다. 이어 보트에 타고 있던 우락부락한 외모의 백인 3명이 벌크선에 올라탔다. 키가 190㎝는 족히 넘는 이들의 손에는 기관총과 작살이 들려 있었고, 허리춤에는 표창(��槍)이 달려 있었다.이들은 해운업체가 고용한 용병(傭兵). 용병 고용은 소말리아 해역에 해적의 출몰이 잦아지면서 선박회사가 짜낸 아이디어 중의 하나다. 우크라이나를 비롯한 동유럽과 중앙아시아 국가의 특수부대 출신인 용병들은 선박이 안전해역에 진입할 때까지 5일 동안 선박을 호위했다. "용병에게 돈을 얼마나 받는지 물었더니 일당이 1만 달러(약 1200만원)라고 하더라고요." 이 벌크선에 탔던 한 선원의 말이다.
영화에나 나왔던 해적이 활개치며 선박·선원 피랍 사건이 잇따르고 있다. 범죄는 더 뻔뻔해졌다. 선박업체와 보험회사 그리고 각국 정부가 해적의 노략질에 맞서 대응책을 고심하고 있다.
- ▲ 일러스트=오어진 기자 polpm@chosun.com
해적 피해 늘고 흉포화
전 세계적으로 해적 피해 사례는 해마다 증가하고 있다. 2007년 263건, 2008년 293건이던 해적 피해는 지난해 406건으로 급증했고, 올 상반기에만 196건이 발생했다. 특히 수에즈운하와 인도양을 잇는 길목으로 대형 화물선과 유조선의 통행이 많고, 원양어선의 조업이 많은 소말리아 해역에 해적의 활동이 집중되고 있다. 국토해양부에 따르면 11월 8일 현재 소말리아 인근 해역에서 총 25척의 선박, 약 519명의 선원이 억류된 상태다. 외교통상부에 따르면 소말리아 인근 해역에서 발생한 해적 사건은 2004년 10건에서 2008년 111건, 2009년엔 217건, 올 9월까지 289건이 발생하는 등 크게 늘고 있다. 우리나라 전체 해운 물동량의 29%가 소말리아 해역을 통과한다.
소말리아 해적들은 '생계형'에서 점차 '기업형'으로 몸집을 불려나가고 있다. 해적들은 뜯어낸 몸값으로 해적 장비를 첨단화해 위성전화와 GPS 장비로 약탈 대상을 쫓고, 기관총과 로켓포로 선박을 위협한다. 공해상에 모선을 띄워놓고 작은 어선으로 갈아타 선박을 사냥하는 소말리아 해적이 '사냥감'인 선박에 오르기까진 15분이 채 걸리지 않는다. 국토해양부에 따르면 올 상반기 발생한 해적 피해 사례 중 70% 이상이 무기(총기, 칼 등)를 사용했다.
거대화된 해적들은 거액의 몸값을 요구하고, 장기간 인질을 억류한다. 지난 10월 국제해사국(IMB)에 따르면 납치 선박의 억류기간은 지난해 2분기 77일에서 올해 같은 기간엔 106일로 크게 늘었다. 지난 4월 해적에 피랍됐던 삼호드림호 선원들은 217일간 억류 끝에 풀려났고, 지난 10월 석방된 영국인 챈들러 부부는 388일간 억류됐다. 국토해양부에 따르면 해적이 제시한 석방합의금은 2007년 40만 달러 수준에서 지난해엔 700만 달러 수준으로 올랐다. 영국 왕립국제문제연구소는 해적들이 몸값으로 챙기는 돈이 연간 1억5000만달러(약 1700억원) 정도라고 추산했다.
공포에 떠는 해운업체들…자구책 마련에 고심
피랍은 곧 막대한 금전 피해를 의미한다. 한 해운업체 관계자는 "중소업체의 경우 해적에 한번 피랍되면 곧바로 도산위기에 몰릴 정도로 절박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해적 피해를 막을 수 있는 최적의 방법은 위험 해역을 통과할 때 군함의 호송을 받는 것이다. 지난해 3월 소말리아 해역에 파병된 청해부대는 한 달에 4~5차례씩 아덴만(소말리아 해역 내)을 지나는 국내 선박들(10~12척 내외)을 호송하는 임무를 수행 중. 그러나 일정이 맞지 않아 독자적으로 항해해야 하는 선박이 압도적으로 많다. 지난해 3월부터 올 10월까지 한국 관련 선박 925척 중 청해부대의 호송을 받은 선박은 120척으로 약 13%에 불과했다.
국토해양부 관계자는 "청해부대와 외국 군함이 호송 활동을 하고 있지만 선박의 스케줄이 다양하고, 해적의 활동 범위가 점점 넓어져 한계가 있는 것이 사실"이라고 말했다. 해운업계 관계자는 "소말리아 해역을 지나는 물동량이나 국력에 비해 한국의 해적 퇴치에 대한 기여가 적다는 불만이 업계 내에 많다"고 말했다. 현재 소말리아 해역에서 퇴치 활동을 벌이고 있는 군함은 50여척. 미국이 가장 많이 파견했으며 아시아권에서는 중국이 3척, 태국이 2척을, 일본은 군함 2척과 초계기 2대를 파견했다. 이에 반해 한국은 청해부대 소속 군함 1척만 파견한 상태다.
해운업체가 용병을 고용하는 것도 이 같은 이유 때문. 해운업체 관계자는 "군함이 호송을 해주더라도 여러 척이 함께 움직이는데다 군함과의 거리가 2~8㎞ 정도 떨어져 100% 안전을 보장할 순 없다"며 "선원과 수백억~수천억원에 달하는 물품을 보호하기 위해 용병을 고용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문제는 비용. 소말리아 해역을 통과하는 약 일주일간 용병을 고용하려면 배 한척당 약 10만~50만 달러가 든다. 중소형 업체들은 엄두를 내기 힘든 금액이다. 국토해양부에 따르면 지난해 3월부터 지난 10월까지 925척 중 57척(6%)만이 용병을 고용했다. 지난 4월 피랍됐던 삼호드림호는 용병을 고용하지 않았다.
용병 고용이 어려운 해운업체는 다양한 대책을 마련하고 있지만 매우 소박한 수준이다. 해적을 경계하기 위해 선원들이 돌아가며 불침번을 서고, 어두운 밤 바다를 살피기 위해 탐조등을 설치한다. 또 밧줄이나 사다리를 이용해 배에 올라오는 해적을 막기 위해 선체 외부에 철조망을 설치하기도 한다. 침입한 해적을 피해 숨을 수 있는 선원대피처(citadel)도 마련하고 있다. 선원대피처 안에는 자체 공기정화기와 비상식량, 식수, 외부와의 통신수단, 엔진 비상 정지장치 등이 있다. 한 해운업체 관계자는 "최근에는 선박의 건조 단계부터 옵션으로 해적을 막을 수 있는 장치를 설치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보험회사들, 사설 해군 결성 추진 중
해적에 의한 피해가 잇따르며, 소말리아 해역을 통과하는 선박의 보험료는 10배가량 올랐다. 그러나 보험사들은 오히려 한숨을 쉬고 있다. 보험료는 올랐지만 해적에게 피랍된 선박과 선원의 몸값으로 더 큰 비용을 지급하고 있다는 것이다. 지난 2년 동안 보험사가 해적 관련 비용으로 지급한 돈은 약 3억 달러(약 3500억원)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졌다.
보험사들은 직접 해적을 퇴치하기 위해 '보험회사 해군'을 결성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세계 상선보험의 14%를 점유하고 있는 영국 자딘로이드톰슨(JLT)사는 쾌속선 20척과 무장 병력으로 무장, 사고가 잦은 해역에서 독자적인 작전을 펴겠다는 계획을 마련 중이다. 해군 창설 비용만 약 1000만 파운드(약 180억원)에 이르지만 동종 보험사와 해운업체를 통해 자금을 마련한다는 입장. 이미 영국 정부와 협의를 진행 중이다.
각국 정부 머리 맞대고 고민 중
우리 정부는 청해부대의 파견을 내년 말까지로 1년 연장했다. 또 분기별로 해적 동향을 분석한 자료를 배포하고, 각 해운업체에 긴급정보도 전달하고 있다. 더불어 해적공격 단계별로 구분해 대응하는 시나리오를 배포하고, 대응 매뉴얼인 '해적대응요령 A부터 Z까지'를 발간해 배포했다.
UN에선 2008년부터 외국 군함의 소말리아 영해 진입 및 무력 사용 허용 등의 안보리 결의를 채택했다. 이에 따라 우리나라를 비롯해 40여 개국 해군이 연합해군사령부(CMF) 지휘 아래 해적을 쫓고 선박을 보호·호송하고 있다. UN 산하의 국제협의체인 소말리아 해적퇴치 연락그룹(CGPCS)도 창설돼 매년 3~4회 전체회의를 개최하고 있다.
그럼에도 해적의 노략질은 중단되지 않고 있다. 소말리아 인근에 각국 군함이 파견되자 해적들은 인도양 등 먼 지역까지 활동 범위를 넓히고 있다. 풍선효과다. 이 때문에 최근엔 안보리 소속 강대국과 NATO(북대서양조약기구)를 포함한 다자안보기구가 직접 나서 해적을 소탕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나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