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번의 인연을 23년동안 이어간 마츠다씨…
한·일 지도자, 우호의 새 물길 거스르지 말기를
소년은 점퍼에 달린 모자를 눈썹께까지 눌러썼다. 두어 발치 옆에선 한 아저씨가 물통을 장작불 위에 올려놓고 어서 끓기를 기다리고 있다. 장작불의 벌건 불길과 점점이 내리는 무심한 눈발 때문에 컵라면을 움켜쥔 소년의 곱은 손이 더 춥고 시려 보였다. 아저씨의 애잔한 눈길에 실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소년은 물끄러미 쌓이는 눈만 바라보고 있다. 소년의 어머니·아버지는 어디 있을까. 또 형과 동생과 누이는 왜 보이지 않을까. 일본 역사상 최악의 지진과 해일이 일본 동북부 지방을 휩쓸고 간 며칠 후 미야기(宮城)현 어느 대피소에서 찍었다는 사진 속 소년은 이런 안타까운 궁금증을 불러일으켰다.
시간은 흘러가고 마음은 바빠졌다. 분명 서울에선 인터뷰 약속을 잡아놓았으니 만나러 가기만 하면 된다고 했다. 그것도 한국 기업인 가운데 일본 정계와 제일 큰 파이프를 가진 대기업 회장이 가운데 서서 어렵게 주선했다고 했다. 내일 지면(紙面)을 비워두고 기사를 기다리겠다는 통고(通告)도 덧붙였다. 그러나 나카소네(中曾根康弘) 전 총리 사무실 쪽 대답은 딴판이었다. 요청을 받긴 받았으나 밀린 해외 순방 일정 때문에 시간을 내기 힘들다는 자기네 사정을 분명하게 전했다는 것이다. 훗날 전해 들은 전말(顚末)은 이랬다. 서울의 무서운 회장님에게서 인터뷰 주선 지시를 받은 도쿄 자회사 사장이 "그것도 못하느냐"는 질책이 겁나 사실대로 보고를 못하고 어물쩍 넘어가려다 벌어진 일이었다. 하긴 전후(戰後) 세 번째 장수(長壽) 총리로 '대통령적(的) 총리'라는 이름을 얻고, 총리를 물러나면서 후임 총리를 지명한 최초의 기록까지 만들어가며 정치 인생의 정점(頂點)에 서 있던 그를 인터뷰하는 걸 너무 쉽게 생각한 이쪽도 허술했다.
'강(姜)상' 하며 마츠다(松田喬和)씨가 특파원실 문을 열고 들어선 것은 바로 그때였다. 우리는 반년 전 서울에서 딱 한 번 만났다. 그는 일본 마이니치(每日)신문 기자로 한·일 외교부 담당 기자들의 교환 방문 프로그램에 따라 서울에 왔었다. 특파원으로 가기 전 일본 언론계 사람과 인사라도 터놓는 게 낫지 않겠느냐는 누군가의 소개로 만난 우리는 압구정동에서 1차를, 근처 포장마차에서 2차를 했다. 기자는 적당히 주기(酒氣)가 오른 마츠다씨를 숙소까지 바래다주었고, 그러고선 도쿄에서 재회(再會)한 것이다.
동업자는 역시 동업자였다. 대뜸 "무슨 걱정이 있느냐"고 묻고선 딱한 처지를 듣더니 "잠깐만 기다려보라"며 나갔던 마츠다씨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 선물을 갖고 돌아왔다. "나카소네 전 총리와 내일 오전 11시에 약속을 잡았다. 시간은 20분 동안이라고 했지만 은근슬쩍 눙치면 1시간가량은 무난할 것"이라고 했다. 다음은 일본 정계 최고실력자를 인터뷰하면서 더듬더듬한 일본어로 무례(無禮)를 범하지 않도록 질문을 밤새 달달 외는 일만 남았다. 후일 누군가가 마츠다씨와 나카소네 전 총리와는 선대(先代)로 거슬러 올라가는 인연이라고 귀띔해 주었다. 그는 그후 23년 동안 조선일보 도쿄 특파원들의 든든한 울타리로서 특파원들이 난감한 처지에 놓일 때마다 어김없이 나타나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 요즘은 정치평론가로 신문 지면보다 TV 화면에 더 자주 얼굴을 내미는 마츠다씨는 작년인가 재작년인가 서울 유학을 보냈던 딸 하루카(春香)양이 대학에서 국제정치학을 강의하게 됐다는 소식을 전해오기도 했다.
한 나라를 새로 접(接)할 때 처음 어느 문(門)을 열고 들어가느냐에 따라 그 나라의 인상이 달라진다. 기자는 '마츠다라는 문'을 따고 일본에 첫발을 내디뎠기에 그만큼 다른 눈으로 일본을 보게 됐다고 느끼고 있다. 중국만이 '꽌시(關係)의 나라'가 아니라 진짜 '간케이(關係)의 나라'는 일본이란 사실도 그를 통해 현장에서 확인했다.
대지진으로 한반도와 일본의 지각(地殼)이 각각 몇㎝·몇m씩 동쪽으로 이동했다고 한다. 불행한 그 지진 이후 양국 국민 사이의 오래된 '마음의 벽'을 허무는 반가운 흐름이 새로 일고 있다. 한국과 일본의 정치 지도자들은 몇백년 만에 올까 말까 한 이번을 계기로 우호의 새 물길이 더 폭넓고 더 융융(融融)한 흐름을 이루며 흘러가도록 지혜를 발휘해야 한다. 해마다 이맘때면 역사 문제를 둘러싼 불편한 소식이 바람에 실려 바다를 건너 왔기에 올해만이라도 그걸 비켜갈 수 없을까 하는 생각에 더 조마조마하다. 무심히 내리는 눈발 속에서 곱은 손으로 컵라면을 쥐고 서 있는 선한 눈길의 사진 속 일본 소년도 언젠가는 한국 기자의 이런 마음을 알게 될 날이 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