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산대첩 승리의 숨겨진 비밀
KBS1 '역사스페셜' 밤 10시
조선일보 | 박세미 기자 | 입력 2011.04.28 03:21 | 누가 봤을까? 40대 남성, 충청
1592년 7월 8일, 한산도 앞바다에 '학의 날개'가 펼쳐졌다. 이름하여 '학익진(鶴翼陣)'. 이순신 장군이 고안한 이 작전에서 왜선 59척이 침몰했고 왜군 9000여명이 전사했다. 임진왜란 초기 수세에 몰렸던 전세를 단번에 뒤집어버린 한산대첩의 성공 요인은 무엇이었을까. 28일 밤 10시 방송될 KBS 1TV '역사스페셜―철저분석 한산대첩'에서 알아봤다.
당시 최정예 일본 수군이 정박했던 견내량은 좁고 암초가 많아 전투에 적합한 바다가 아니다. 이순신 장군은 '넓은 바다로 적을 이끌어낸 뒤 잡아버린다(인출전포지계·引出全捕之計)'는 목표를 세운다. 이순신은 일본 함대를 유인하기 위해 6척의 유인함선을 출동시켰다. 왜군은 학의 날개처럼 포위해 오는 조선 수군의 포격에 의해 순식간에 격파됐다. 이순신은 이날 전투를 '화살과 포탄의 형세가 마치 폭풍과 같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렇다면 학익진은 완벽한 전술이었을까? 학익진은 적군의 배를 향해 이동하는 동안 측면의 포를 쏠 수 없기 때문에 화력 집중에 어려움이 있었다고 한다. 게다가 우리 수군의 화포는 재장전하는 시간이 적지 않게 걸렸다. 제작진은 "바닥이 평평했던 우리 수군의 '판옥선'이 한산대첩 승리의 비결이었다"고 말한다. 판옥선의 탁월한 선회 능력으로 재장전 시간 동안 공격력을 잃지 않았다는 것이다.
↑ [조선일보]
그렇다면 학익진은 완벽한 전술이었을까? 학익진은 적군의 배를 향해 이동하는 동안 측면의 포를 쏠 수 없기 때문에 화력 집중에 어려움이 있었다고 한다. 게다가 우리 수군의 화포는 재장전하는 시간이 적지 않게 걸렸다. 제작진은 "바닥이 평평했던 우리 수군의 '판옥선'이 한산대첩 승리의 비결이었다"고 말한다. 판옥선의 탁월한 선회 능력으로 재장전 시간 동안 공격력을 잃지 않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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