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에게는 아직 전선 12척이…
노컷뉴스 | 입력 2011.04.27 16:57 | 누가 봤을까? 40대 남성, 경상
1597년 8월 3일(음력), 도원수 권율 밑에서 백의종군(白衣從軍)하던 이순신은 다시 전라좌수사겸 삼도 수군통제사로 재임명된다. 조선 수군이 경남 거제도앞 칠천량 해전에서 궤멸한 지 보름여만의 일이다.
선조는 "생각하건대 그대는 일찍이 수사책임을 맡던 그날 이름이 났고, 또 임진년 승첩이 있은 뒤부터 업적을 크게 떨쳐 군사들이 만리장성처럼 든든히 믿었는데, 지난번 그대의 직함을 갈고 그대로 하여금 백의종군하도록 했던 것은 역시 사람의 모책이 어질지 못함에서 생긴 일이었거니와 오늘 이와 같이 패전의 욕됨을 당하게 되니 무슨 할말이 있으리오, 무슨 할말이 있으리오…"라는 내용의 교지를 내렸다.
이순신 장군은 재임명 후 곧바로 군관 10여 명과 함께 길을 떠난다. 그러나 함선도 없고 군사도 없는 맨손의 장군일 뿐이었다. 장군의 수군재건 대장정은 경남 진주에서 시작해 구례∼압록∼곡성∼옥과∼석곡∼순천 부유창∼순천∼낙안∼벌교∼보성 조양창∼보성을 거쳐 장흥 회령포(회진)로 이어진다. 이를 통해 장군은 마지막 남은 수군 전선 12척을 인수하고 군사를 모아, 한 달 후 진도 울돌목에서 마침내 일본 수군과 일전을 벌여 극적으로 전세를 역전시키는 신화를 창조한다.
◇ 전선도, 군사도 없는 장군= 충무공의 대장정 코스를 따라 떠난 날은 일본 후쿠시마 원전사고 여파로 '방사능 비'가 내린 이튿날이었다. '섬진강 길'과 곁치는 구례∼압록∼곡성 구간을 건너뛰고 옥과에서 출발했다. 이순신장군 일행은 옥과에서 석곡으로 가는 도중 전라병사의 패잔병들을 만나 군마와 활, 화살 등을 얻는다. 하지만 400여년이 지난 지금은 곡성, 옥과, 석곡을 거치는 동안 흔적을 찾기 힘들다. 희미하게나마 옥과에서 35㎞ 떨어진 순천시 주암면 창촌리에서 임진왜란 당시 자취를 찾을 수 있었다.
이 마을은 국가의 양곡을 보관하던 '부유창'(富有倉)이 있던 곳으로, 장군이 도착했을 때는 이미 불타버린 후였다. 현재 '부유창'터는 밭으로 경작되고 있었다. 주민 박재식(80)씨와 이영주(65)씨는 "일제강점기에 국도가 놓이기 전까지만 해도 석곡에서 순천으로 가려면 마을 앞길로 지나다녔다"고 말했다. 장군은 부유창말고도 보성군 조성면 우천리 고내마을 '조양창'(兆陽倉)도 찾는다. 다행히 이곳은 봉인된 채 양곡이 무사해 많은 군량을 확보할 수 있었다. 동네 뒤편 야트막한 동산 꼭대기에 자리한 이곳 역시 묘 2기가 있을 뿐 아무런 흔적도 없었다.
김동균(68) 마을이장은 "조양창터는 어린 시절 놀이터였다. 수년 전까지 '조양성 축제'를 하며 첫날 이곳에서 제를 지내기도 했다. 새마을운동 당시 성 북문 흔적 등이 없어졌다"고 말했다. 낙안을 거쳐 보성에 이르는 동안 관리와 군사, 궁장 (弓匠) 등이 자발적으로 참여하며 장군 일행은 120여 명으로 늘어났다고 '난중일기'에 기록돼 있다.
◇ 신에게는 아직 전선 12척이= 보성을 지날 무렵 장군은 선조로부터 "수군의 전력이 너무 약하니 권율의 육군과 합류해 전쟁에 임하라"는 교지를 받았다. 이에 대해 장군은 "신에게는 아직 전선 12척이 남아 있습니다. 이것으로 죽을 힘을 다해 싸운다면 오히려 적을 이길 수 있습니다"라는 장계(狀啓)를 올렸다.
장군은 전선(戰船)이 있는 곳으로 곧장 가지않고 먼길을 돌아가는 대장정을 하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지용희 서강대 경영대 교수는 '경제전쟁시대 이순신을 만나다'라는 책을 통해 장군의 대장정 숨은 뜻을 5가지로 요약했다.
우선 장군은 민심을 수습했다. 또 군사를 모았으며, 행정력을 복원했고, 엄격한 군기를 세웠으며, 무기를 모았다는 것. 철저한 정보수집 덕분에 왜군의 이동상황을 먼저 파악, 적보다 한발 앞서 군량과 무기를 수습할 수 있었다고 한다.
마침내 장군은 칠천량 해전에서 패한 지 한 달, 통제사에 재임명돼 대장정에 나선지 보름만인 8월 19일(음력) 장흥 회령포(회진)에서 전선 12척을 인수한다. 경상우수사 배설이 칠천량 전투초기 전장에서 도망하는 바람에 역설적으로 살아남은 전선들이었다.
회진읍에 들어서게 되면 오른편 산에 쌓여진 성벽이 시선을 잡아끈다. 최근 복원된 '회령진성'(도 문화재자료 144호)이다. 포구를 내려다보는 높은 위치에 조성돼 있어 마을과 바다가 한눈에 시원스레 보였다. 회령포에서 배를 인수한 장군은 해남 이진(梨津)→해남 어란포→진도 벽파진으로 진영을 옮긴후 9월 16일(음력) 해남∼진도사이 '울돌목'에서 서해로 진출하려던 일본 수군을 격파한다.
◇ 대장정 '스토리텔링'화 기대= 장군의 대장정은 경남 진주에서 시작해 장흥 회진항에서 끝난다. 서울 옥에서 풀려나 권율 대원수의 진영까지 갔던 '백의종군로'는 전남과 경남도에서 걷기 길로 조성하고 있지만, 수군재건을 위한 전남지역 행로(行路)는 아직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다. 이 길은 워낙 긴데다 갓길마저 없는 곳이 많아 걷기에는 무리이고, 차량을 이용한다 해도 만만치 않은 거리이다.
하지만 이순신 장군의 대장정과 순천 왜성(倭城) 등 남해안에 군데군데 흩어져 있는 임진왜란 유적들을 연결해 '스토리텔링'화한다면 색다른 길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윤수옥(74) 전 장흥문화원장은 "회령진은 고흥 녹도, 강진 마량과 함께 만호(萬戶·종 4품 무관)가 주둔하던 곳"이라며 "회령진에 도착했을때 군사가 얼마나 됐는지 '난중일기'에 기록은 없지만, 남도를 돌며 군사와 무기, 12척의 전선을 수습해 불과 한달후 '울돌목'에서 대승을 거두는 밑바탕이 됐다"고 평가했다.
(대한민국 중심언론 CBS 뉴스FM98.1 / 음악FM93
이순신 장군은 재임명 후 곧바로 군관 10여 명과 함께 길을 떠난다. 그러나 함선도 없고 군사도 없는 맨손의 장군일 뿐이었다. 장군의 수군재건 대장정은 경남 진주에서 시작해 구례∼압록∼곡성∼옥과∼석곡∼순천 부유창∼순천∼낙안∼벌교∼보성 조양창∼보성을 거쳐 장흥 회령포(회진)로 이어진다. 이를 통해 장군은 마지막 남은 수군 전선 12척을 인수하고 군사를 모아, 한 달 후 진도 울돌목에서 마침내 일본 수군과 일전을 벌여 극적으로 전세를 역전시키는 신화를 창조한다.
◇ 전선도, 군사도 없는 장군= 충무공의 대장정 코스를 따라 떠난 날은 일본 후쿠시마 원전사고 여파로 '방사능 비'가 내린 이튿날이었다. '섬진강 길'과 곁치는 구례∼압록∼곡성 구간을 건너뛰고 옥과에서 출발했다. 이순신장군 일행은 옥과에서 석곡으로 가는 도중 전라병사의 패잔병들을 만나 군마와 활, 화살 등을 얻는다. 하지만 400여년이 지난 지금은 곡성, 옥과, 석곡을 거치는 동안 흔적을 찾기 힘들다. 희미하게나마 옥과에서 35㎞ 떨어진 순천시 주암면 창촌리에서 임진왜란 당시 자취를 찾을 수 있었다.
이 마을은 국가의 양곡을 보관하던 '부유창'(富有倉)이 있던 곳으로, 장군이 도착했을 때는 이미 불타버린 후였다. 현재 '부유창'터는 밭으로 경작되고 있었다. 주민 박재식(80)씨와 이영주(65)씨는 "일제강점기에 국도가 놓이기 전까지만 해도 석곡에서 순천으로 가려면 마을 앞길로 지나다녔다"고 말했다. 장군은 부유창말고도 보성군 조성면 우천리 고내마을 '조양창'(兆陽倉)도 찾는다. 다행히 이곳은 봉인된 채 양곡이 무사해 많은 군량을 확보할 수 있었다. 동네 뒤편 야트막한 동산 꼭대기에 자리한 이곳 역시 묘 2기가 있을 뿐 아무런 흔적도 없었다.
김동균(68) 마을이장은 "조양창터는 어린 시절 놀이터였다. 수년 전까지 '조양성 축제'를 하며 첫날 이곳에서 제를 지내기도 했다. 새마을운동 당시 성 북문 흔적 등이 없어졌다"고 말했다. 낙안을 거쳐 보성에 이르는 동안 관리와 군사, 궁장 (弓匠) 등이 자발적으로 참여하며 장군 일행은 120여 명으로 늘어났다고 '난중일기'에 기록돼 있다.
◇ 신에게는 아직 전선 12척이= 보성을 지날 무렵 장군은 선조로부터 "수군의 전력이 너무 약하니 권율의 육군과 합류해 전쟁에 임하라"는 교지를 받았다. 이에 대해 장군은 "신에게는 아직 전선 12척이 남아 있습니다. 이것으로 죽을 힘을 다해 싸운다면 오히려 적을 이길 수 있습니다"라는 장계(狀啓)를 올렸다.
장군은 전선(戰船)이 있는 곳으로 곧장 가지않고 먼길을 돌아가는 대장정을 하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지용희 서강대 경영대 교수는 '경제전쟁시대 이순신을 만나다'라는 책을 통해 장군의 대장정 숨은 뜻을 5가지로 요약했다.
우선 장군은 민심을 수습했다. 또 군사를 모았으며, 행정력을 복원했고, 엄격한 군기를 세웠으며, 무기를 모았다는 것. 철저한 정보수집 덕분에 왜군의 이동상황을 먼저 파악, 적보다 한발 앞서 군량과 무기를 수습할 수 있었다고 한다.
마침내 장군은 칠천량 해전에서 패한 지 한 달, 통제사에 재임명돼 대장정에 나선지 보름만인 8월 19일(음력) 장흥 회령포(회진)에서 전선 12척을 인수한다. 경상우수사 배설이 칠천량 전투초기 전장에서 도망하는 바람에 역설적으로 살아남은 전선들이었다.
회진읍에 들어서게 되면 오른편 산에 쌓여진 성벽이 시선을 잡아끈다. 최근 복원된 '회령진성'(도 문화재자료 144호)이다. 포구를 내려다보는 높은 위치에 조성돼 있어 마을과 바다가 한눈에 시원스레 보였다. 회령포에서 배를 인수한 장군은 해남 이진(梨津)→해남 어란포→진도 벽파진으로 진영을 옮긴후 9월 16일(음력) 해남∼진도사이 '울돌목'에서 서해로 진출하려던 일본 수군을 격파한다.
◇ 대장정 '스토리텔링'화 기대= 장군의 대장정은 경남 진주에서 시작해 장흥 회진항에서 끝난다. 서울 옥에서 풀려나 권율 대원수의 진영까지 갔던 '백의종군로'는 전남과 경남도에서 걷기 길로 조성하고 있지만, 수군재건을 위한 전남지역 행로(行路)는 아직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다. 이 길은 워낙 긴데다 갓길마저 없는 곳이 많아 걷기에는 무리이고, 차량을 이용한다 해도 만만치 않은 거리이다.
하지만 이순신 장군의 대장정과 순천 왜성(倭城) 등 남해안에 군데군데 흩어져 있는 임진왜란 유적들을 연결해 '스토리텔링'화한다면 색다른 길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윤수옥(74) 전 장흥문화원장은 "회령진은 고흥 녹도, 강진 마량과 함께 만호(萬戶·종 4품 무관)가 주둔하던 곳"이라며 "회령진에 도착했을때 군사가 얼마나 됐는지 '난중일기'에 기록은 없지만, 남도를 돌며 군사와 무기, 12척의 전선을 수습해 불과 한달후 '울돌목'에서 대승을 거두는 밑바탕이 됐다"고 평가했다.
(대한민국 중심언론 CBS 뉴스FM98.1 / 음악FM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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