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영희(徐英姬)│전 국회의원, 헌정회 고문(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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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 장군의 아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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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가 처음 육영수 여사를 만난 것은 군정이 민정으로 옮겨서, 군복을 벗은 박대통령이 제5대 대통령으로 당선된 직후, 그러니까 그 가족이 아직 온전히 청와대로 이사하기 전이었다. 벌써 10년 가까이 되었나보다. 「만났다」고 해서 무슨 개인적인 동기에서가 아니라, 필자가 당시 방송국에 있었던 관계로 해서 단체방문을 할 기회가 있었던 것이다. 그때 육여사는 남편이 죽음을 각오하고 혁명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을 당시의 상황이며, 혁명전야에도 남편의 일상과 다름없던 태도 등에 대한 얘기를 우리에게 들려주었다. 5월 15일 저녁, 집에서 태연스레 저녁상까지 물린 다음 자정이 가까워서 침착한 걸음으로 나가던 일, 나가면서 한마디 “내일 아침 뉴스를 들으라”는 말뿐, 별로 다른 말이 없었지만 이심전심이랄까. 무엇인가를 짐작하고 그날 밤 “장군의 아내”는 밤새껏 빨래도 하고 집안정리 등을 했었다고 했다. 만일을 위해 집안을 깨끗하게 치워두자는 알뜰한 주부의 본능 같은 것이었으리라. 아주 자연스런 화술로서, 그녀는 국민이 이 혁명을 이해하고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가에 짙은 관심을 쏟고 있었다. 혁명가의 아내란 어쨌든 여자팔자치고는 센 팔자가 아닐 수 없으리라. 그런데도 그때 받았던 육여사의 첫 인상은 침착하고 섬세하고 곱기만 했다. 그 후에도 필자는 여러 번 여성단체 관계 등 기타 이유로 육여사를 공적으로 만날 기회를 가졌다. 필자는 자기 나름대로의 사회 경험에서 사람 가운데는 가까이 대하는 것보다 멀리서 바라보는 것이 더 좋은 사람이 있고 그 반대도 있다는 것을 겨우 알아차렸다고나 할까. 한데 육여사는 그 후자에 속하는 분이라고 필자는 나름대로 가늠하고 있다. 처음에는 별로 관심이 없던가, 또는 단순히 “권력의 자리”를 누리는 입장이라는 데서 자칫 색안경으로 보기 일쑤이다가 정작 만나본 다음엔 강렬한 인간성을 느끼게 되는 데에서 그렇게 됐는지도 모르겠다. 신록이 한창 싱그럽던 지난 1972년 5월 중순 육여사는 필자가 몸담고 있는 경희대학교 캠퍼스를 방문한 적이 있다. 학생들의 초청에 응낙, 내교한 것인데 필자는 강의를 마치면서 안내 겸 학생들의 반응을 좀 살펴보았다. “오늘 대통령 부인 육영수 여사께서 우리 손님으로 오시는데 시간 있는 학생들은 체육관 대강당으로 가서 퍼스트레이디와의 대화를 즐겨보라”고. “부정부패가 논의되고는 있지만 육여사는 만나보고 싶습니다.”, “육여사가 부패했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고 항상 청순한 인상을 갖고 계신 분이라 꼭 만나보고 싶었던 분입니다.” 기탄없이 산발적으로 떠들어대는 이러한 반응을 통해 필자는 학생들의 그분에 대한 호의를 필자 나름대로 헤아릴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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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복이 곱게 어울리는 여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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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 어린이회관 개관하던 날, 1970 (그림 정형모 화백)> |
| | 매스컴이 그분 앞에 붙이는 형용 구절에는 “우아하고”, “재치있고”, “한복이 곱게 어울리고”, “미소를 잊지 않는다”는 수식이 가장 많다. 모두가 조금도 어색하지 않은 말들이다. 외국의 대통령이나 원수급 인물이 방한했을 때의 기념촬영 사진을 보면 그녀에게는 어느 나라 퍼스트 레이디에게서도 느끼지 못하는 독특한 우아함이 있다. 외국인과의 비교가 유난히 돋보이게 하는 탓일까? 하기는 육여사의 한복차림은 여성사회에서 너무나 유명하다. 흔히들 “몸매가 있다”는 얘기들을 하지만, 한복을 입은 것을 보면 한복의 아름다운 선이라든가 태가 잘 살아 있어 우리 옷의 미를 새삼 깨우치게 된다. 필자의 미국친구 한사람은 육여사를 가리켜 내추럴 촤머(Natural Charmer)라고 표현한 적이 있다. 뭐랄까, 이걸 입어도 좋고 저걸 입어도 좋은, 웃어도 좋고 다소곳이 있어도 좋은, 어쩔 수 없이 우러나오는 그런 매력을 일컬은 것이리라. 그러면서도 그녀에게는 퀸리 매너(Queenly Manner), 즉 여왕의 그것같이 어울리는 분위기가 있다고도 했다. 퀸에 대해서 독특한 정서를 지니고 있는 구미사람들에게는 그렇게 보였을지도 모른다. 대통령 부인이란 고독하면서도 支拂하는 것이 많은 자리다. “공적인 대가 없이 공무에 이바지해야하는 公僕”이 바로 대통령 부인이다. 그러한 기미를 육여사는 언젠가의 자리에서 “항상 국민 앞에 시집살이하는 기분으로 행동하고 있다”는 비유로 실토한 적이 있다. “공인”이란 가만히 있어도 혹은 지나치게 활동을 해도 무어라고 말썽이 뒤따르기 마련이다. 옷을 잘 입어도, 또 못 입어도 말들이 많은 법과 마찬가지로…….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요즘 “國母意識”같은 것은 별로 찾아볼 수가 없다. 전임 대통령부인들의 경우엔 이 낱말을 심심치 않게 들은 기억이 있으나, 이제는 간단히 그저 대통령 부인 또는 퍼스트 레이디면 그뿐이다. 한편으로 언어뿐만 아니라 이젠 사회 속에 어지간히 “歐美風”이 불어 닥쳤고 불어 닥친 만큼이나 퍼스트 레이디 역할도 또한 하기 힘들어진 것이 사실이 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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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적이면서도 동적인 활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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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희대를 방문한 육여사가 조영식 총장의 영접을 받고 있다. 좌측이 필자(1972)> |
| | 대통령 부인 가운데는 영향력이 크거나 전혀 없는 두 가지 타입이 있다. 미국의 역대 대통령 부인들 가운데 이런 면으로 가장 대조가 되는 사람이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엘리노어 루즈벨트 여사와 제12대 테일러 대통령 부인 마아가렛 테일러 여사를 들 수 있을 것 같다. 루즈벨트 여사는 不具의 夫君이 미국의 역사를 깨뜨리고 四選을 가능케 했던 일에 가장 공이 큰 장본인이었다. 대통령 취임식 전에서도 각료부인들은 어떤 옷을 입을까 하고 의상 걱정들을 하고 있을 때, 여사는 그런 문제는 아랑곳없이 먼저 경제공황 때문에 허덕이고 있는 백성들의 생활상을 두루 살피고 다녔다. 여사는 농부나 광부들과 함께 파티에 어울리고 춤도 추고, 집에 돌아와서는 그들로부터 들은 여러 가지 문제(소리)들을 정리, 거기에도 자기의 의견을 붙여 타자로 찍은 다음 남편의 침대 옆에다 놓아두곤 했다 한다. 명실공히, 소아마비로 발을 저는 남편의 눈과 귀와 다리의 역할을 담당했던 것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테일러 여사는 백악관에 살면서도 온갖 명예를 거절하고 아예 세상을 등진 사람처럼 세월을 보냈다. 군인이었던 남편이 대통령으로 입후보하는 것부터 반대했지만 남편의 취임 연회석상에 그녀가 없어도 아무도 찾는 사람이 없을 만큼 전혀 나서지를 않았다. “전쟁의 영웅으로 숭배 받으면서 여생을 편안하게 살 일이지 왜 소란스런 정치에는 뛰어드느냐”는 것이 그녀의 의견이었다고 한다. 테일러 대통령이 사망한 다음, 그에게도 부인이 있었다는 것이 뉴스거리였다니 전자와 대조되는 그녀의 생활태도를 또한 짐작할 만하다. 필자는 육여사를 보고 있노라면 루즈벨트 여사 생각이 들 적이 있다. 차이가 있다면 루즈벨트 여사는 서양식이고 육여사는 동양적이라는 정도랄까. 육여사의 활동은 정적이면서도 동적이어서 퍽 다양하고 포괄적이다. 불우한 사람에게 위로와 용기를 주어 적극적인 생활자세를 갖도록 이끌어 주는가 하면 각 도마다 여성회관을 세워 부녀자들이 그곳에서 교양을 쌓을 수 있고 또 여가선용을 통한 부업주도로 소득증대에도 도움을 주어왔다. 지난 5년 동안 육여사를 중심으로 한 양지회가 매년 발행하여 농어촌에 무료배포한 “희망의 등불”이란 책자는 어려운 생활여건과 빈번한 환경에서도 이를 딛고 일어서 보람과 희망을 찾은 많은 농어민들의 체험담을 싣고 있어 이를 본 사람들이 용기와 자신을 얻었을 뿐 아니라 농어촌에 보이지 않는 힘을 주어 오늘날 요원의 불길처럼 번지고 있는 새마을운동의 자그마한 원동력의 구실을 했다는 이야기도 농촌으로부터 들려오고 있다. 육여사의 사업 중에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어린이들에 관련된 일이다. 지난 수년 동안 전국의 낙도와 벽지 초등학교에 매달 어린이 교양월간지를 보내고 있다거나 서울 변두리에 있는 시민 아파트에 도서실을 차려주어 아파트 입주자들의 정서함양과 어린이 학습활동에도 많은 도움을 주어왔다. 그동안 양지회가 매년 전국 오지 초등학교에 보내온 양지문고가 올해로 5백여 학교에 이르게 되었다는 보도는 듣는 사람들에게 흐뭇한 마음을 갖게 한다. 청와대의 야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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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 회원들과 함께 소양강 댐을 방문한 육여사, 좌측이 필자(1974.5) | 육여사의 生長과정이 적힌 책을 읽은 적이 있다. “충북일대에 이름이 높았던 沃川土豪 陸鍾實씨의 둘째 令愛로서 수많은 하인들로부터 ‘작은아씨’라 불리며 자란 육영수 여사는 지체를 중히 여기는 엄한 가풍에 몸담아 왔다” 이와 같은 생장의 일면이 언제 보아도 흐트러진 흔적 없이 우아한 기품을 지닌 오늘의 그녀를 형성하지 않았나 싶다. 육여사는 노력하는 여성이다. 남편이 혁명을 성공시켜 한나라의 국사를 책임지게 되자, 그녀는 대통령 남편을 보필하기에 부족함이 없도록 하려고, 공부를 시작했다는 얘기는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斯界의 전문 인사들을 초청해 매일 오전에 2시간 가량 강의를 들었으며 그 내용도 국사, 세계문화사, 고고학, 철학, 사회학, 정치외교사 등 매우 다채롭다 한다. 위수령이 발동되었던 무렵, 육여사를 만날 기회가 있었던 필자는 헌법을 해석하는 그녀의 박식에 내심 놀랐다. 비단 헌법뿐만이 아니라 그녀와 대화를 나누고 있노라면 여러 가지 문제에 대해서 일가견의 소양을 갖고 있는 사람, 그리고 머리가 아주 총명한 여성이라는 것을 알아차릴 수가 있었다. 과거의 퍼스트 레이디들과는 달리 여론에 남달리 민감한 육여사를 매스컴은 “청와대의 야당”이라고 자주 부른다. 가능한 각 분야의 사람들과 접촉을 하고 대화를 나누면서 민의를 알고 그것을 대통령에게 직접 전달하는 일을 대통령 가족에게 주어진 책임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그녀를 매스컴은 그렇게 부르는 것이다. “물론 대부분은 그분이 알고 계시는 일이지만 노파심에서 자주 이야기를 해드리지요. 그래서 아마 나에게 이런 칭호가 붙여진 것 같지만……. 내가 뭐 ‘정권’을 넘보는 것도 아니고 또 그러기 위한 조직을 갖고 있는 것도 아니니 대통령에게는 안심하시라고 그러지요”하며 청와대 야당설에 관해 해명을 했다. 육여사와의 대화에서 필자는 “최선을 다하는 데 의의가 있다”는 얘기를 자주 들었다. 아마 그분이 좋아하는 말인 것 같고 거창하게 표현하면 그분의 생활 철학이 거기에 있는 것 같기도 하다. 그분은 항상 ‘노는 일’에는 별로 흥미를 못 느낀다면서 “최선을 다해 성실하게 일하고 그 일이 끝났을 때 보람을 느낀다”고 했다. 그래서 아무것도 안 하고 그냥 있는 시간이면 꼭 “숙제를 안 해 놓은 학생”처럼 불안하다 했다. 성실―육여사는 또한 이 낱말을 몹시 좋아한다. 그러나 쉬운 것 같으면서도 어려운 것이 이 낱말의 행동화인 것이다. 가정에 대해 성실하고 이웃에 대해 성실하고 더욱이 자기 자신에 대해 성실하게 살아나간다는 그러한 뜻의 성실. 어록이랄 것까지야 없지만 육여사의 말 가운데 “가장 큰 재산은 건강과 성실이다. 성실은 재능을 능가한다”란 말을 자주 들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유독 그녀가 했대서가 아니라 누가 했더라도 되새겨볼 만한 말이다. 살기가 어려워지니 사회가 빡빡해지고 그러다보니 인간들은 약아만 간다. 잔재주와 임기응변이 승리하는 순간들이 있고 악이 선을 누르고, 僞가 眞을 가로채기도 한다. 그때그때의 땜질과 입발림으로 生을 허둥대야 하는 경우도 많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성실함을 잃지 않는 인간이야말로 가장 영원한 모습의 인간일 것이다. 청와대의 생활은 한국 중류생활이면 족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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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희대학교를 방문한 육여사(중앙) (1972) | 육여사는 최근 비교적 캠퍼스 나들이의 기회를 자주 갖는다. 지난 5월 12일, 오후 1시 20분. 여사가 탄 서울자 1-1호 크라운 승용차가 “경희의 문”을 들어서자, 길 양편에 서있던 남녀 학생들의 열광적인 박수와 환호가 쏟아졌다. 본관에 이르는 도로를 따라 끊이지 않는 박수와 환영인사로 퍼스트 레이디 육여사는 밝게 웃으며 趙총장을 비롯한 學處長 및 교수들의 영접을 받으면서 학생들이 기다리는 “대화의 광장(대강당)”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총학생회 초청으로 이날 대강당에서 열렸던 진지한 문답에는, 약 3천여 명의 남녀 젊음들이 참가했다. 학생들은 소풍 가기 전날의 어린아이들처럼 기분들이 마냥 부풀어 있었고 남녀 학생들이 한결같이 어머니라고 부르며 응석 반 자랑 반으로 서로 대화를 주고받는 모습은 마치 다정한 모자지간의 정겨운 대화처럼 분위기가 유쾌하고 부드럽기만 했다. 학생들의 짓궂은 질문에도 육여사는 당황하지 않았고 시종 위트와 미소 속에 학생들의 물음에 진지하게 응하고 답하는 성실성으로 일관했다. 그날 구체적으로 어떤 대화들이 오고갔는지 육여사라는 한 인간을 알기 위해 몇 대목 참고로 간추려 본다. 학생: 외국의 경우를 보면 대통령 부인도 막후 외교를 하고 있는데 이 점에 대한 육여사의 의견은 어떠하십니까. 또 요즘 신문 방송의 신빙도를 어느 정도 믿고 계십니까. 그리고 외국에 나갔을 때 한국의 여성을 어떻게 부각시키는지요? 육여사: 대통령 부인의 직접적인 외교는 그 나라 실정에 따라 할 수도 있고 안 할 수도 있지만 우리나라의 경우 외무장관을 비롯한 관직 외교관들이 할 수 있는 일을 구태여 내가 나서서 할 필요가 있다고는 생각지 않아요. 공무원의 사기 문제도 생각해 주어야지요. 아내로서의 입장은 내조하는 것으로 충분할 줄 압니다. 비단 외교뿐만 아니라 어떤 일이든 좋은 생각이 있다면 행정부건 일반 사회단체건 간에 말해줘서 그 책임자로 하여금 실행하도록 하면 된다고 생각해요. 그러나 내가 꼭 해야만 되는 일이라면 할 수 있는 자신도 있지요. 신문의 신빙성에 대해서는 이 자리에 기자들이 있기 때문에 말하기가 좀 곤란하지만(웃음), 신문이 100% 정확하다고는 볼 수 없지 않아요. 한국여성의 이미지 부각을 위해 내가 하는 일은, 먼저 상대방 나라의 장점을 충분히 찾아서 대화에서 흥미를 갖게 하여 서로가 이해한 뒤, 우리의 장점을 이야기하여 서로 호감을 가질 수 있도록 내 나름대로 노력하고 있지요. 학생: 데모로 인해 제적된 5명의 본교생에 대해 모정으로 구제하는 데 힘써 주실 수는 없는지요? 육여사: 피해를 입은 학생에 대하여는 대통령께서도 매우 가슴 아파하십니다. 자녀를 데리고 있는 나 역시 총학장님, 교수님, 또 부모님 그리고 교우인 여러분 못지않게 마음 아픈 일입니다. 그러나 그 문제의 처리는 총, 학장님들께서 하실 것이지만, 여러분의 뜻을 틀림없이 대통령께 전해드리지요. 더구나 그런 문제는 학생들에게만 잘못이 있는 게 아니라 기성세대가 여러분에게 조용히 공부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주지 못한 데에 기인하는 것으로 생각되어 기성세대의 한사람인 나로서도 항상 미안하게 여기며 이 점은 기성인들도 반성해야 할 것이라고 봅니다. (중략) 요즈음에도 나는 가끔 匿名으로 된 금지된 신문(地下新聞을 뜻하는 듯)을 받는데, 그 내용으로 미루어 볼 때 아직도 자기들의 잘못을 반성하지 못하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들지요. 그러나 그 사람들이 주소를 밝히면 기꺼이 만나 얘기할 용의가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학생들이 아무리 여러 가지 질문을 해도(때로는 난처한) 하나도 빠짐없이 성실하게 답변했다. 간담회가 끝난 후 모교수는 “육여사의 모습은 우리의 예상과는 달리 혼탁한 정치가를 연상케 하는 모습이 아니었으며 웅변가의 달변도 아니었다. 어머니로서의 자상함을 대학생에게 보여주었으며 대학생을 이해하려 노력하고 있음을 그분의 말과 행동에서 느낄 수 있었다”고 소감을 말했지만 “청와대로 학생들을 초청하겠다”는 약속을 잊지 않고 육여사는 그로부터 열흘 뒤에 이를 이행했다. 평범한 아내로서의 행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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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회루에서 개최된 8.15 리셉션에서 육여사와 함께. 좌측이 필자(1973.8) | 육여사와 대화를 나누다보면 그가 퍽 위티한(재치있는) 인간이라는 것을 금방 알아차릴 수 있다. 그러나 그 위트라는 것이, 얄팍한 말재주가 아닌, 진지하게 살아가는 인생경험론 같은 것을 느끼게 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녀의 위트는 적어도 육여사가 체험하고 인식한 생활철학을 바탕으로 한 것이라는 느낌을 강하게 풍기는 것이다. 청와대로 우리 학생들을 초청한 날은 메뉴가 푸짐했다. 송편, 도넛, 슈크림, 딸기, 콜라 등 “보통은 음식을 질 위주로 간단하게 내놓지만, 오늘은 한창 식욕이 왕성한 학생들이라 질보다는 양을 택했지요. 많이 드세요” 이렇게 퍼스트 레이디가 한마디 하자 학생들은 와아-하고 환호성을 울렸다. 한 가정에서의 여인(아내 또는 어머니)의 위치란 때로는 남성의 그것에 비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무거울 때가 있다. “부실한 아버지보다는 어머니가 불건전할 때 청소년들은 더욱 많이 비뚤어진다”는 것이 육여사의 지론이다. 육여사는 “여성의 행복이란 각자의 성격에 따라 방향이 다를 수도 있겠으나 나는 평범한 아내로서 의, 식, 주가 어느 정도 해결되는 환경에서 그리고 남편과의 사랑 속에서 아이들을 훌륭하게 기르는 가운데에서 여성의 행복을 찾고 싶다”고 한다. 이러한 바람과는 달리 환경의 변화에 따라 퍼스트 레이디로서의 “공인의식”을 어쩔 나위 없이 가져야만 했고 그 역할을 또한 훌륭하게 해냈던 분이 육여사였다. 대통령 선거 때 육여사의 대전 유세장 잠입(?)이 화제가 된 적이 있다. 박대통령을 대전으로 떠나보내고 초조한 마음에 혼자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어 대통령 몰래 유세장에 내려갔다. 남의 눈에 띄지 않게 옷을 老티 나는 것으로 골라 입고. 그러나 주변의 군중에게 발견되어 군중을 떠들썩하게 하는 바람에 유세장에 잠시 동요가 일어났다. 유세를 마치고 돌아온 대통령은 육여사에게 “분명히 선거운동 방해가 아니냐, 선거운동 방해죄로 고발할까? 내게 말이라도 하고 내려왔으면 놀라지나 않았을 것 아닌가…….”하고 조크를 던졌다 한다. 한국적 풍토 속에 그리고 육여사의 인간상을 잘 말해주는 한 삽화가 아닐 수 없다. “자기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명확하게 알고 소신껏 행동하며 자기가 한 일에 책임을 질 줄 아는” 그런 사람이 육여사가 좋아하는 인간상이다. 박대통령의 소령시절 여사와 결혼했다는 사실을 누구나 알고 있지만, 그때는 박대통령이 권력은 물론 그밖에 다른 것도 별로 가진 것이 없는 한낱 영관 장교에 불과했다. 그런데 처음 본 순간 무척 믿음직스러웠다고 했다. “더구나 주관이 뚜렷이 서 있는 듯한 그 눈에 마음이 끌렸다”고 육여사는 후일 고백(?)한 적이 있다. “나는 庶民 속에서 자랐고, 庶民 속에서 一生을 마치는 것이 소원”이라는 박대통령의 “庶民人生論”을 뒷받침하듯 대통령 집안의 가풍 가운데 첫째가 검소라고 육여사는 일러주었다. 박대통령은 처음 취임하면서 ‘내핍생활’을 부르짖었다. 육여사가 그때 “청와대 식구들의 생활은 한국 중류가정의 생활정도로 체면유지만 하겠다”고 말했던 것을 기억한다. 농민의 아들로 어려움 속에 자라 검소와 절약이 절실하게 몸에 밴 박대통령이 언젠가 시골에 가는 길에 넥타이가 너무 老色인 것 같아 다른 것으로 갈아 매었으면 좋겠다는 부인의 말에 “시골 가는 사람이 넥타이를 매는 것도 민망한 심정인데, 뭘 고르기까지 하겠느냐”면서 그대로 지방출장을 갔었다는 얘기며 사진을 찍을 때도 카메라맨이 좀 좋은 것을 뽑기 위해 몇 번 거듭 찍으려 들면 “한 번이면 됐지, 아까운 필름을 왜 낭비하느냐”고 나무란다는 박대통령의 일상 성품을 육여사가 말해주기도 했다. 그러한 남편을 모시는 육여사의 몸가짐과 행동에 또한 언제나 검소가 배어 따라다니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다정한 미소를 담고 항상 활기 있게 움직이는 퍼스트레이디 육여사에게 나는 무엇보다 인간으로서의 정을 먼저 느끼며 때문에 어찌 생각하면 선뜻 써지지 않는, 그리고 쓰기 어려운 이 글을 이렇게 쓰게 됐는지도 모르겠다.
필자 약력 이화여고 졸업(1957년) 이화여대 문리대 불문과 졸업(1961년) 미국 미주리주립대 신문대학원 졸업 〔신문방송학 석사〕 (1968년) 자유중국 China Academy 철학 명예박사 학위 (1977년) 미국 캘리포니아 Union 대학 정치 명예박사 학위 (1984년) KBS TV 편성부·제작부(1961년) 미국 뉴욕 CBS 뉴스부 연구원(1968년) 경희대 정경대학 교수(1969년) 서울 중앙방송국 심의위원회(1971년) 정부시책 평가교수(1972년) 9·10대 유정회 국회의원(1973∼1980년) 국제의원연맹 이사(1975년) 아마추어 무선연맹 이사장(1977년) 미국 버클리대학교 동아세아문제연구소 객원교수(1982년) 일본 외무성 국제문제연구소 연구위원(1985년) 경희대 평화복지대학원 교수〔교학부장〕(1985년) 민자당 정책평가위원(1990년) 한국 지역사회 복리회〔Save the Children〕부회장(1993년) 미국 미주리대학 한국 총동문회 회장(1994년) 대통령선거방송 심의위원(1997년) 선문대학교 부총장(1998년) 전문직여성 한국연맹〔BPM〕회장(1999년) 전국 여교수 연합회 회장(2000년) 대한민국 헌정회 여성위원장(2007년) 헌정회 고문 저서 도전과 보람의 순간들 : 국가와 언론 그리고 여성(1991년) 역서 닉슨대통령과 언론계(1973년) 미국시대의 종말(1974년) 새롭게 태어나는 여성(1986년) 상훈 한국 무대연극협의회 주최 고등학교 연극대회 최우수 여주인공상 수상 (유치진회장상 1956년) 이화를 빛낸 졸업생상 수상(1973년) 미국 미주리주립대학교 모교를 빛낸 동문상 수상 (2004.10월)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