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사의 재발견/겨례의 지도자

[스크랩] 역사적인 서울-부산 간 고속도로 건설현장에서

화이트보스 2011. 8. 10. 10:34

[ 윤영호(尹永浩) │ 예비역 육군준장 / 現 신영기술개발주식회사 회장 ]

<벚꽃이 아름답게 핀 고속도로 금강휴게소>
내가 육군본부 조달감실에서 근무하고 있던 1967년 11월 23일 오후, 그 당시 공병감으로 계시던 박병순 장군이 급하게 나를 부른다는 전달이 왔다. 공병감께서 첫마디로 “윤대령, 내일 아침 청와대에 들어가 봐야겠소”하기에 “무슨 이야기인지 자초지종이나 알고 가야 할 것 아닙니까” 했더니 “내가 오늘 대통령께서 예전에 지시하셨던 고속도로 건설 추정예산안에 대한 보고를 올렸다오. 대통령께서 보고서를 읽고 하시는 말씀이 ‘5개의 유관 부처에서 올린 각각의 고속도로 건설추진 예산안이 모두 달라 재검토가 필요한데 이를 도와줄 보좌관이 한 사람 필요하니 監室(감실)로 돌아가거든 우수한 공병대령 한 사람과 중령 한 사람을 차출해서 보내주시오.”라고 하시더군요.
 
  그리고 건설부 측의 기사 한 사람이 더 필요하지만 그 일은 대통령께서 직접 건설부 장관에게 지시할 터이니 공병장교 차출만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돌아오자마자 지체 없이 과장회의를 열었는데 이구동성으로 윤대령 당신이 제일 적임자라고 추천을 했고 나도 그렇게 생각하니 내일 아침 청와대 김학렬 비서관을 찾아가 보시오.”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공병감이 지시하는 대로 다음날 아침 청와대로 들어가기로 했다.(함께 선발된 공병감실 소속의 박찬표 중령은 나와는 별도로 청와대에 들어가기로 했다.)
 
  공병감으로부터 고속도로 사업에 관한 계획을 듣던 그 순간부터 고속도로 건설에 대해 골똘히 생각하게 되었다. 솔직히 군인으로서 나의 임무와는 거리가 있는 문제였기 때문에 크게 관심을 갖고 있지 않았고, 그 당시 우리나라의 경제 사정이나 여건 등을 감안해 볼 때 고속도로를 건설할 상황은 아닌 것 같다는 것이 나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하지만 막상 고속도로에 관련된 일을 직접 하게 된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벅차올랐다.
 
  고속도로 건설의 태동
 
  우리나라 고속도로의 건설 구상은 1964년 12월 7일 박정희 대통령이 서독을 방문했던 시점부터 시작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가난하고 힘들었던 그 시절 대통령 전용기가 없어 극동지역에 취항하고 있던 서독의 民航(민항)기 “루프트한자”를 일반여행객들과 함께 타고 가야 할 만큼 초라한 행차였던 것은 널리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박대통령의 서독방문 목적은 첫째가 “라인강의 기적”을 낳은 서독의 경제발전 과정을 배우기 위함이었고 둘째는 우리나라의 제2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수행하기 위한 외환 차관 문제였다고 한다. 그리고 세 번째가 그곳에서 일하고 있는 우리나라 젊은 광부들과 간호사들을 만나기 위함이었다고 한다.
 
  박대통령은 서독 수상이 안내하는 곳을 유심히 돌아봤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관심 있고 주의 깊이 관찰한 곳이 고속도로(Autobahn 아우토반)라고 했다. 독일의 나치정부는 당초 아우토반의 총 길이 1만 4천㎞를 건설할 계획이었으나 2차 대전으로 인해 3,860㎞만 건설하고 공사가 중단되었고, 그나마도 2차 대전으로 인하여 크게 파괴되었으나 전쟁이 끝난 후 가장 먼저 아우토반부터 복구하여 서독이 자랑하는 라인강의 기적을 낳는 데 큰 몫을 했다고 한다. 뤼프케 대통령은 박대통령이 쾰른市를 방문하기에 앞서 “본” 과 “쾰른市” 간의 아우토반이 1928년 착공하여 1932년 완공된 세계 최초의 고속도로로서 독일부흥의 상징이라고 설명을 하기도 했었다고 한다.
 
  박대통령은 서독의 수도 “본”에서 라인강을 따라 북쪽으로 약 20㎞떨어진 곳에 위치한 “쾰른市”를 자동차로 방문하게 되었는데 그때 그 고속도로(아우토반)를 160㎞/h의 속도로 달렸으며, 한국에서는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는 환상적인 속도였기에 쾰른市를 왕복하는 동안 두 차례나 차에서 내려 路面(노면)상태와 중앙분리대, 교차로 시설 등을 매우 주의 깊게 살펴보았다고 한다.
 
  또 박대통령은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그를 안내하기 위해 같은 차에 타고 있던 “뤼프케 대통령의 의전실장에게 아우토반에 대해 「독일이 고속도로를 건설하게 된 동기」, 「고속도로 건설방법(어떤 공법으로 공사를 진행하였는가)」, 「고속도로의 관리방법 」, 「고속도로 건설비」, 「고속도로건설 소요자금과 염출방법」 등 의전실장이 식은땀을 흘릴 정도로 질문을 퍼부었고, 답변을 일일이 수첩에 적어 두었다고 한다.
 
  그리고 박대통령이 서독의 각계 인사들과의 만찬회 석상에서 “에르하르트 서독수상”과 대화를 나누며 「국가의 경제발전을 이룩하기 위해서는 도로, 항만 등과 같은 기간시설의 정비가 선행되어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분단된 국가로서는 경제의 번영만이 공산주의를 이길 수 있는 길이다」고 강조한 서독 수상의 이야기를 감명깊이 들었다고 했다.
  박대통령의 고속도로 건설에 대한 구상이 서독방문 以前(이전)부터 구상 되었는지 여부는 알 길이 없으나 경부 간 고속도로 건설계획이 표면에 노출되기 시작한 것은 확실히 서독방문 이후부터이다.
 
  1967년 4월 29일 장충단 공원의 제6대 대통령선거 유세장에서 그간 구상해오던 서울-부산 간 고속도로 건설계획을 선거공약으로 발표 후 정식으로 언급되게 되었으며 5월 2일에는 합동 기자회견을 통해 보다 구체적인 복안까지 발표된 것이다.
 
  고속도로 건설계획이 발표되자 벌집이라도 쑤셔놓은 듯 정치계와 경제계는 물론 각계각층의 의견이 분분하게 쏟아져 나왔으며 특히 야당과 지도자급 인사들의 거센 반발이 일어났다. 그들은 우리나라 국민소득이 겨우 100달러 미만이고 연간 예산규모는 1500억 원 정도에 춘궁기(보릿고개)만 되면 아사자가 여기저기서 발생할 정도로 양곡의 절대 소요량이 부족한 세계 최빈국 농업국이라는 것을 반대의 첫 번째 이유로 꼽았다. 다음으로는 전체 자동차 보유 총 대수가 4만 대 미만이고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1962~1966)을 통해 6. 25전쟁으로 인하여 파괴되었던 국도 1호선의 경우 도로와 교량의 보수와 포장이 어느 정도 완료된 상태인데 천문학적 숫자의 자금을 투입하여 고속도로 건설을 하겠다는 계획이 그 당시의 상황으로서는 거의 모든 국민들이 가당치도 않은 이야기라고 보았던 것도 무리는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박대통령은 거센 반발과 국민의 부정적 반응에도 불구하고 국가의 원대한 100년 대계와 민족부흥이라는 슬로건 아래 최선을 다해 그 목표를 완수하겠다는 굳은 의지를 보였다.
 
  나는 앞에서 기술한 바와 같이 공병감 박장군이 지시한 대로 다음날 아침 일찍 청와대의 김학렬 비서실장을 찾아갔다. 마침 1967년 3월 24일에 착공한 경인고속도로 공사의 문제점들을 검토하는 회의가 시작되려는 시간이었으므로 김비서실장이 같이 이 회의에 참석해 보자고 하셨고, 이 회의에는 대통령과 관계부처의 장차관들도 모두 참석한다는 설명을 듣고 회의실에 들어섰다. 내가 지정하는 자리에 앉으려고 하는데 대통령께서 입장하시면서 내 명찰을 보시면서 “어- 윤대령 왔어” 하시며 자리에 앉자 곧바로 회의가 시작됐다.
 
  청와대에서의 첫 임무
 
대통령 임명장(1967년 12월 14일)
회의가 끝나자 대통령께서 직접 ‘경부고속도로의 일을 도와줄 사람'이라며 회의에 참석했던 모든 분들께 나를 소개해 주셨다. 그리고 “윤대령 날 따라오게˜ 하시며 대통령 집무실로 들어가시고, 그 분의 뒤를 따라 들어서 보았던 대통령 집무실의 광경에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일국의 대통령 집무실이라고는 볼 수 없을 정도로 초라했고 사방의 벽면은 마치 지도로 도배를 한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처럼 많은 지도가 붙어있는 벽면 중 한 곳을 가리키며 “윤대령 여기가 어딘지 알겠나?” 하고 물으셨고 “네 수원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그래 맞아. 그럼 지금 곧 육군본부에 가서 서울-수원 간 지도를 100만분의 1에서부터 1200분의 1까지 각각 1부씩만 구해오게˜ 하셨다. 나는 “네 알겠습니다!” 대답과 동시에 지체 없이 그 길로 육군본부에 들어가 필요한 지도를 요청한 후 지프차에 트레일러를 달고 당시 영등포 6관구에 있던 지도 보관소에 가서 지도를 구해 다시 청와대로 돌아와 대통령께 보고 드렸다.
 
  이 임무는 내가 청와대에 들어온 첫날 제일 처음으로 대통령으로부터 직접 받은 임무였다.
  내가 가지고 온 지도 뭉치(지프차 트레일러에 가득 싣고 온 것 중의 일부)를 보시면서 “응 수고했네, 자네 육군대학 나왔지?” “네” “그럼 윤대령이 가지고 온 그 지도에 육군대학에서 공부할 때처럼 색칠을 해다 주게” 하셨다. 지도 뭉치를 들고 대통령 집무실을 나오기는 했지만 어디서 이 작업을 해야할지 몰라 복도에서 망설이고 있는데 비서관 한사람이 나오더니 “윤대령님 이 방에서 작업하도록 하십시오.” 하고 문을 열어준 곳이 307A실이었다. 이 방은 신관 2층 경제수석 비서관실 바로 옆방이자 대통령 집무실과는 복도 하나 사이에 둔 곳이어서 언제 대통령께서 불쑥 들어오실지 예측할 수 없는 곳이라 이 사무실을 이용하고 있는 동안 항상 긴장을 풀 수 없었다.
 
  나와 박중령은 내가 가지고 온 지도를 연결하고 채색하는 일을 다음날 아침 마무리하고 대통령 집무실에 가지고 들어갔더니 “수고들 했네. 봐! 아주 잘 보이지 않는가! 바로 이거야” 하시면서 손수 테이블 위에 펴 놓으시더니 한참을 바라보시다가 “이래야 정확한 도상연구를 할 수 있거든? 처음에는 100만분의 1 지도에서부터 시작해서 작은 단위로 내려오면서 보면 확실히 판단할 수 있게 되는 거야” 하셨다. 그리고 가지고 계시던 100만분의 1지도를 내 앞에 펼쳐 놓으시고는 “이 지도에 그려져 있는 것을 참고로 해서 채색된 지도에 그려 넣어주게” 하시는데 펼쳐진 지도를 보니 서울-부산 간 고속도로 예정노선이 연필로 그려져 있고 얼마나 그리고 지우고를 반복했는지 지도상에 인쇄된 글자들이 희미하게 보일 정도였고 지도의 귀퉁이가 닳아 없어져 대통령께서 선 한 줄 그리는 데에도 얼마나 고심을 하셨는지 그 흔적을 역력히 볼 수 있었다.
 
  내가 테이블 위에서 트레이싱(Tracing)을 하려고 하자 대통령께서 “윤대령, 그러지 말고 창문유리에 대고 그리면 좀 더 수월하게 할 수 있지 않을까?” 하고 말씀하셔서 그분이 대단히 세심하신 분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실감케 하였다.
  같은 날 건설부 소속의 박종생 기좌가 합류하여 307A호실은 모두 3명이 되었고 편의상 우리를 「청와대 파견단」이라고 하였지만 실제 공식명칭은 아니었다. 그리고 수일 후 육군본부 공병감실 소속의 박동식 소령이 우리와 합류하게 되어 파견요원은 모두 4명으로 늘어났다.
 
  고속도로 건설공사비
 
부산-대구 구간 고속도로 개통식에서 도로에 샴페인을 뿌리는 박대통령(1969.12)
고속도로 건설계획에 앞서 현존 國道(국도)의 교통수송 능력에 대한 연구 분석을 한 사실을 청와대에 들어와 알게 되었다. 특히 건설부가 IBRD(국제부흥개발은행 International Bank for Reconstruction and Development)와의 협약으로 1965년 말경부터 66년 6월까지 세계적인 전문가들에 의해 분석 평가와 장차 물동량의 증가와 교통량 증가로 인한 한계까지는 언급이 되었지만 문제해결의 대책으로 새로운 고속도로를 건설해야 한다는 의견은 없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박대통령은 서울-부산 간 고속도로 건설을 위하여 대략적인 추정예산을 처음에는 유관 6개 부처에 은밀히 지시하여 67년 11월 20일까지 작성 제출하게 하였다는데 도중에 재무부가 기권하는 바람에 5개 부처에서만 제출했다고 한다. 어찌 되었거나 대통령께서 나를 집무실로 부르시더니 테이블 위에 놓여있는 서류 다섯 뭉치를 가리키며 이 서류들을 검토해 가장 적절한 적정가를 산출해 보라고 하셨다.
 
  5개 부처가 제시한 서울 부산 간 고속도로 420㎞의 공사추정 금액은 다음과 같았다.
  - 건설부 650억 원
  - 서울특별시 180억 원
  - 현대건설 289억 원, 육군 본부 공병감실 490억 원
 
  같은 곳에서 같은 일을 하려고 하는데도 이 정도로 엄청난 차이가 발생하니 도무지 납득하기 힘들다는 이야기가 나오는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각 부처는 나름대로의 기준을 설정하고 산출해 낸 것이기 때문에 이들의 노고를 전적으로 무시할 수는 없는 일이며 산출기준에 대한 내 스스로의 충분한 이해가 있은 다음 착수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서류를 제출한 각 부처의 작성자들 의견도 참작하면서 부처별로 차트를 만들어 각 항목별 비교 분석을 하기로 하였다. 사실 따지고 보면 이만한 것을 산출해 낼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다행하고 대단한 일이긴 했다. 누가 고속도로를 만들어 보기를 했나. 고속도로 건설 전문가가 있기나 한가? 그렇다고 고속도로 공사 경험이 있는 건설회사가 있나? 있었다고 해봐야 현대건설이 태국에서 단거리 고속화 도로를 하도급으로 시공해본 경험이 전부였기에 말이다.
 
  그러니 궁여지책으로 어느 부처에서는 일본의 고속도로 건설비를 참고로 해서 작성했다고 하고, 또 어떤 부에서는 고속도로를 신작로 정도로 생각했는지 ㎞당 공사비를 국도의 포장비보다 약간 더 책정하여 제출한 곳도 있었다.
 
  5개의 부처 중 유일하게 이 계획에 참가한 민간기업인 현대건설은 그래도 태국에서의 경험이 있는 사원들을 총동원하여 나름대로 경부고속도로 예정지를 선정하고 여러 차례 경비행기로 서울-부산을 왕래하면서 공중 답사도 해보고 假定工區를 설정하여 차량과 도보로 답사를 하는 등의 열의를 보였다고 한다.
 
  주관부처인 건설부는 추정 공사비가 제일 많이 책정됐다고 하니 관계관이 “내가 사표를 쓰는 한이 있어도 이 금액에서 한 푼도 깎아서는 안 된다” 고 고집을 부렸다. 만일 공사비를 깎아 날림공사가 될 경우 그 책임을 누가 질 것인가? 우리는 역사적 국가의 대동맥을 건설하여 후손들에게 떳떳하게 물려줄 영원한 유산을 만들려고 하는데 그 유산에 조금이라도 흠이 있어야 되겠는가 하는 것이다. 이 얼마나 가상한 일인가. 그들의 열의에 찬 이야기를 들으면서 가슴이 뭉클해지는 느낌을 받기도 했었다.
 
  나는 대통령께서 지시하신 대로 분석표를 만드는데 각 부처의 특징을 살리도록 배려했고, 나의 개인적 의견도 첨부하였다. 그리고 모든 서류를 일목요연하게 보실 수 있도록 早見表도 만들어 첨부했다.
 
  내가 공사비의 적정선이라고 산출해 낸 금액은 대략 360억 원이 되었고, 대통령께 보고를 드렸더니 한참동안이나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계시는 것 같더니 “윤대령, 공사하는데 어려운 곳이 있을 텐데 그런 곳에 우리 육군 공병대를 투입하면 어떨까? 그렇게 된다면 공사비가 많이 절감될 것이고 공사 진척도 빨라질 것 같은데 말이야” 라고 말씀하셨다. 대통령께서는 국가재정 형편을 고려하여 공사비를 조금이라도 절약해 보려는 배려가 역력하게 보였다.
 
  마침 공병들의 교육장소가 마땅치 않아 고심하고 있던 터라 고속도로 공사장에서 우리 공병이 훈련실습을 겸할 수 있도록 한다면 一石二鳥가 되겠다는 생각이 얼핏 들어 “아주 좋은 생각이십니다.”고 말씀드렸더니 그러면 당장 관계관을 불러 미군 측과 병력과 장비차출에 대한 협의를 해야겠다고 하셨다. 그리고 이어서 “병력과 장비차출을 협조해 주는 대가로 고속도로가 완공되면 미군용 차량의 고속도로 사용료는 받지 않는다는 조건을 붙여. 그러면 될 것 아닌가?” 하고 강조하셨다. 그 말씀이 계기가 되어 지금(2010년 현재)까지 도미 군용차량에 대하여는 고속도로 사용료를 받지 않고 있다. 박대통령께서는 즉석에서 관계관을 불러 미군 측과 협의해 보고 결과를 보고하라고 지시하셨다. 이리하여 공병 병력과 장비차출에 대한 안이 채택되었고 고속도로 건설에서 육군 공병들의 눈부신 활약으로 인하여 많은 비용이 절감되었을 뿐만 아니라 공사기간도 단축시키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내가 작성해서 올린 추정공사비를 수일간 검토해 보신 후 어느 날 아침 박대통령께서 나를 보시더니 “윤대령이 산출해 낸 것 보았는데 330억 정도면 가능하겠지?” 하고 물으셨다. 사실 내가 대통령께 보고한 금액은 360억이었는데 330억이라고 말씀하시니 30억이 어디서 삭감되었는지 알 수 없어 답변을 망설였는데 후에 대통령께서 군 병력과 장비가 동원되어 공사비가 대략적으로 절감될 것이라고 추상하신 금액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답사(踏査)
 
국토의 대동맥 경부고속도로
공병부대 차출과 고속도로 추정 공사비가 개략적으로 결정된 수일 후 월요일 아침, 출근 즉시 대통령 집무실로 오라는 전달이 있었기에 황급하게 대통령 집무실에 들어갔더니 “윤대령, 같이 근무하는 사람이 몇 명이지?” 하시기에 “전원 4명입니다˜ 라고 하니 “응 그래! 월동준비들이나 했나?” 하시면서 김장용으로 쓰라며 금일봉을 주셨다.
 
  그리고 이른 아침부터 수고한다는 격려의 말씀을 하신 후 12,500분의 1 서울-수원 간 지도를 보자고 하시며 “어제 내가 고속도로 노선을 좀 알아보려고 혼자서 말죽거리 쪽으로 길을 나섰는데 처음에는 그곳 주민들이 나를 알아보지 못해서 좀 천천히 살펴볼 요량으로 이것저것 보다보니 점차 나를 알아보는 주민들이 늘어나 몰려오는 바람에 더 이상 머물 수 없어 돌아오고 말았네. 그래서 말인데 지금부터 자네는 아무도 만나지 말고 나 대신 서울-수원 간 고속도로 예정노선을 답사하고 그 결과를 오늘 중으로 나에게 보고해 주게” 라고 하셨다. 그 말씀에 따라 박찬표 중령과 박종생 기좌와 같이 곧바로 한남동으로 가 배를 타고 한강을 건너 강남으로 가서 그곳에서부터는 우마차 길을 따라 산과 경작지를 오르락내리락하며 고속도로 예정코스를 따라 수원까지 가기로 했다. 그 당시의 도로란 국도를 제외하고는 거의 소달구지가 겨우 다닐 수 있는 農路(농로)뿐이었다.
 
  우리 일행은 가급적 높은 곳에 올라가 이곳에 고속도로가 생긴다면 하고 구상해 보면서 그 상상하는 조감도에 따라 傾斜度(경사도)와 土質(토질) 그리고 骨材(골재)를 採取(채취)할 만한 위치, 개천이 있는 곳에 이르러서는 수량, 개천의 폭, 교량부설 가능위치 등등 외에도 장차 공사를 진행하는 데 참고가 될 만한 사항을 빠짐없이 기록하고 지도에 표시했다. 우리 일행의 답사에 앞서 대통령께서 보고 오기를 원하셨던 곳에 대해서는 더욱 관심을 가져야 했고, 특히 신갈저수지에 이르러서는 저수지 우측으로 도로를 건설할 것인가, 좌측으로 할 것인가에 대해 틀림없이 대통령께서 의견을 물으실 것 같아 좌우 양쪽을 모두 살펴보아야 했다.
 
  대통령께서 “오늘 중 보고하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주어진 시간 내에 가급적 더 많은 것을 정확하게 보아야겠다는 마음에 오히려 더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고 시간의 제약 때문에 물 한 모금 제대로 마실 시간도 없었다. 그런데도 청와대에 도착할 때쯤은 캄캄한 밤이 되고 말았다. 우리가 정문에 들어서자 경호관 한 사람이 달려와 대통령께서 집무실에서 기다리고 계시니 어서 들어가 보라고 한다.
 
  같이 갔던 두 사람을 경비실 부근에 내려주고 황급히 대통령 집무실로 달려갔다. 대통령께서 퇴청하실 시간이 훨씬 넘었는데도 불구하고 기다리고 계신다고 하니 황송한 마음에 옷에 붙은 먼지도 털 사이가 아까웠고 조금 더 일찍 답사를 마치고 돌아오지 못했던 것이 송구스럽고 후회스럽게 여겨졌다.
 
  나는 대통령 집무실에 들어서자 늦어서 죄송하다는 사과말씀을 드리고 곧바로 답사결과를 보고드렸고 경청하시던 대통령께서는 답사 지역의 사정을 조금 더 소상하게 아시고 싶으신지 많은 것을 질문하셨다.
 
  신갈저수지를 사이에 두고 우측이냐 좌측이냐에 대해서는 지도상으로 위치를 가리키며 내가 본 견지와 판단으로 장단점을 말씀드리고 좌측(南쪽)으로 가는 것에 長點(장점)이 더 많다고 했더니 대통령께서도 “내 생각도 그래, 내가 지도상으로 판단하고 구상했던 것과 비슷하군” 하고 흡족해 하셨다. 곧바로 당시의 이후락 비서실장을 인터폰으로 부르시더니 “내일 아침 건설부장관, 서울시장, 경기도지사, 경제수석비서, 이후락 비서실장, 행정관리비서관들을 모두 소집해주게” “그럼 내일 10시경으로 할까요?” 하고 이후락 비서실장이 묻자 “아니 10시라니, 한 시간이 아쉬운 이때 그렇게 늦으면 안 되지, 더 빨리, 9시로 해” 하고는 “윤대령도 꼭 참석해야 하네. 오늘 수고 많이 했네” 라고 말씀하셨고, 나는 너무 시간을 지체시킨 것을 죄송스럽게 생각하며 집무실에서 나왔다.
 
  박대통령의 숨은 실력
 
  다음날인 12월 26일 오전 9시 정각, 예정대로 대통령 참석 하에 회의가 시작되었다. 대통령께서는 미리 준비해 놓았던 5만 분의 1 지도판 앞으로 다가서시더니 서울-수원 간 고속도로건설 예정노선을 개괄적으로 설명하고 나서 서울시장과 경기도지사에게 곧 용지매입을 서두르라고 지시하셨다. 그러자 경기도지사가 질문에 나섰다.
 
  “땅이 얼마나 소요될지도, 땅값이 얼마가 될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어떻게 구입을 합니까?” 하고 묻자 박대통령께서 서울시와 경기도의 境界線(경계선)과 田畓(전답), 林野(임야) 등의 표시와 座標(좌표) 한 칸이 1㎞사방이라는 독도법의 기초적인 것을 설명한 다음 소요 평수의 산출계산방법을 설명하셨다. “즉 한 평은 여섯 자(6尺)사방이고 6척을 미터로 환산하면 (6尺 곱하기 0.3m) 1.8m가 되고 1평은 약 3.24㎡가 되오” 하고 설명하신다.
  그리고 나서 “여기 그려진 단면도를 보시오, 앞으로 건설할 고속도로의 단면도에 의해 계산하면 이렇소. 즉, 1차선이 3.6m너비니까 4차선이면 14.4m가 되고 중앙분리대 2.5m. 路肩(노견)의 한편 너비가 3m이니 양측을 합하면 6m. 구배계산에 있어서는 지방 고를 평균 平野(평야)에서는 높이를 2m로 계산하여 3m×2하면 6m, 양측배수로를 3m로 하면 그것도 6m가되고 여유 5.1m, 이것을 모두 합치면 38m가 되는데 40m로 칩시다. 따라서 실제로 매입해야 할 토지는 지도의 도면상으로 1㎞의 거리를 건설할 경우 노폭 40m×1㎞(거리)는 40,000㎡이고 이 수치를 평수로 환산하면 12,700평이오.
 
  다시 한 번 반복해서 말하면 5만분의 1지도상의 좌표 한 칸이면 12,700평이 되고 좌표상 10칸이면 127,000평이 되는 것이다.”라고 설명하시고 난 다음 나를 향해 “윤대령 지금까지 설명한 가운데 혹시 틀린 곳은 없었나?” 하고 물으시기에 “네 틀림없었습니다.” 하고 대답을 하면서 대통령에게 이런 실력이 숨어 있었다는 것에 대해 놀라움과 감탄을 감추지 못했다.
 
  서울-수원 간의 예정거리 32㎞에 대한 실 소요면적 산출계산법의 설명을 들고 난 다음 경기도지사가 “소요 평수는 대통령 각하께서 산출하신 대로 하면 된다 치고 그 용지는 산도 있고 밭도 있고 논도 있고 한데 그것을 一律的(일률적)인 가격으로 매수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하고 질문하자 “그거야 당연한 것 아닌가. 이 지도를 보시오, 이 지도는 도상연구를 하기 위해서 특별히 색칠을 한 것이니까 보기가 수월할 거요, 이 지도에서 보는 바와 같이 소요면적은 山林(산림)이건 田畓(전답)이건 모두 합쳐서 평균을 낸 거요, 따라서 정확한 地價算出은 다음으로 미루기로 하고 이 자리에서는 平均地價가 얼마면 되겠는가 하는 것을 뽑아 보도록 합시다” 라고 하시자 경기도지사가 “그러면 평균지가(平均地價)가 얼마면 되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그러자 “그래 내가 이런 질문이 나올 줄 알고 미리 地價조사를 해 놓은 것이 있지” 하시고는 전용 캐비닛에서 서류철 한 권을 뽑아내시면서 “이 서류는 시중의 두개의 모 은행에서 고속도로 예정 노선의 지가를 조사한 기록이오” 하시면서 회의참석자들에게 열람하라고 내밀었다. 그리고는 “혹시라도 누설될까 비밀리에 조사한 것이니 믿어도 될 거요”라고 하셨다.
 
  이 보고서에 의하면 平均地價(평균지가)는 畓(답)의 경우 평당 150원에서 200원 내외이고 林野(임야)의 경우는 100원 이하로 되어 있었다.
 
  서울시장과 경기도지사 두 분은 이 보고서를 잠시 동안 보고 나서 두 분이 말을 맞추기라도 한 듯 ‘지금 이 시세로는 사기가 어려울 것 같다’고 하자 대통령께서는 기다렸다는 듯이 “나는 이 은행조사서에 의한 가격대로 땅을 사라고 하는 것이 아니오, 전답과 임야를 모두 합쳐서 평당 300원으로 예산을 배정해 줄 터이니 평균 300원 이하로 사도록 하고 돈이 남으면 농지구역 정리와 고속도로 진입로, 水利施設(수리시설)보완 등 사업에 이용토록 하되 이 문제는 서울시장과 경기도지사의 재량에 맡길 터이니 알아서 처리하도록 하시오” 하셨다.
 
  대통령의 말이 떨어지자 경기도지사는 의외의 배려라는 듯한 표정으로 “감사합니다, 그러면 기한을 언제까지로 해야 합니까? 저의 생각은 빨리 서둘러도 1개월 정도는 걸릴 것 같습니다” 그러자 대통령께서 “아니오, 이 일은 빠르면 빠를수록 좋아, 가급적이면 1주일 정도로 끝맺음을 했으면 하오, 시간을 끌면 끌수록 땅값이 춤을 출 것이기 때문에 말이오˜
 
  “일주일 말입니까? 각하!” 서울시장과 경기도지사는 ‘이거 야단났구나’ 하는 표정들이다.
 
  대통령께서 “모두 발 벗고 나서면 안 될 것 없어요, 도지사는 해당지역 군수들에게 군수들은 면장들에게 그리고 면장은 里長(이장)들에게 얘기해서 우선 주민들을 설득시켜 그 주민들로부터 동의를 받아 내는 거요, 지금 내가 말하는 식으로 한다면 1주일이면 될 것 아니오?” 대통령의 단호하고 확고한 신념과 하면 된다고 하는 자신감에 더 이상 질문을 할 수도 없었으며, 서울시장과 경기도지사는 집행하는 데 다소의 무리는 있을 것으로는 생각되지만 대통령의 지시에 따를 수밖에 없다고 했다.
 
  대통령께서 회의석상에서 고속도로의 주무부인 건설부 장관에게 예산은 부족하나 공사는 서둘러야 하니 설계상의 妙(묘)를 기해 예산을 최대한으로 절약하는 방법을 모색해 보라고 하셨다.
 
  우선 개통 후 완공, 보수를 하는 식으로라던가, 공기를 단축시키는 방법 등 방안을 고려해 보라고 하셨다. 이와 같이 고속도로건설에 소요되는 자금 때문에 대통령께서 세심한 배려를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당시의 우리나라 경제기반이 취약했음을 여실히 나타내고 있는 것이라 하겠다.
 
  혹시라도 고속도로 건설로 인한 地價(지가)상승이 일반 생필품 가격의 인상으로 이어져 국민생활에 영향을 주지나 않을까? 또 공사비 증가로 국정운영과 제2차 경제개발계획에 차질이나 영향을 주지나 않을까 勞心焦思(노심초사)하는 모습이 역력히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이 회의를 통해 이처럼 완벽하고 사려 깊으신 대통령을 바라볼 수 있었다는 것이 여러모로 나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게 하였고 특히 고속도로 에 대한 단면도를 그려 회의 참석자들에게 설명한 것 등은 나는 물론 그 자리에 참석했던 모든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데 충분했을 것이라고 생각되며 「하면 된다」는 무한한 힘을 주셨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 회의에서 결정되었던 용지 수매방법은 후에 고속도로가 연장됨에 따라 대통령 지시사항으로 각 도에 하달되었다.
 
  다시 한 번 강조하거니와 박대통령께서는 고속도로 건설에 관한 한 용의주도하고 과감하게 그리고 열의에 찬 모습으로 진행하셨다. 특히 노선결정 과정에서는 가급적이면 農地(농지)의 피해를 최소화하려고 노력하셨고 공사비 절감을 위해서는 군 공병단의 투입, 공기의 단축 등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하여 조금이라도 도움을 주려고 부단히 노력하셨다.
  이 회의를 끝으로 12월 27일 국가기간 고속도로 건설계획 조사단이 발족하게 되었는데 단장에는 安京模씨가 담당하게 되었다.
 
  국가기간 고속도로 건설계획조사단(이하 계획조사단)
 
  회의가 있었던 다음날인 12월 27일 박대통령께서 고속도로 공사를 보다 효율적으로 추진하기 위해 경부고속도로 건설의 제1선에 서서 이끌어갈 실무자들로 구성된 기구를 편성하도록 건설부장관에게 지시하셨다. 이에 따라 국가기간 고속도로 건설계획조사단(편의상 계획조사단이라 칭함)이 발족하게 되었고 나도 이 계획조사단의 일원으로 자리를 옮기게 되었다. 그런데 실제로는 대통령께서 계획조사단 편성을 지시하시고, 직접 편성표를 작성하시고 필요한 인원을 적재적소에 배치하도록 편성표상에 특정인원의 명단까지 기입하시고 그 사람들을 불러 묻는 식으로 하셨다. 이때 이 계획조사단에 참여한 분은 단장에 안경모(전 교통부장관), 실무진에 교통부소속의 김명련, 건설부차관 최종선, 동 계획국장 김용희, 동 도로과장 서용간, 국방부 시설국장 육군소장 김 묵, 한국발전연구원 이사장 안무혁 등 기라성 같은 분들이다.
 
  계획조사단에 참여할 분들에 대한 임명식이 67년 12월 14일 청와대에서 국무총리를 비롯한 각 국무위원들이 배석한 가운데 국무위원 임명식 절차에 버금가는 격식으로 계획조사단장으로부터 시작해서 각 반장, 그리고 각 반원 순으로 대통령께서 직접 각 개인에게 임명장을 수여하셨다. 나는 이때 기술반원으로 임명장을 받았고 내게 주어진 임무는 “고속도로 노선설정”의 중책을 맡게 되었다.
 
  계획조사단의 사무실은 당시 중앙청 후문에서 가까운 2층 건물의 1층을 쓰기로 되어 편의상 기획반, 재경반, 기술반으로 나누어진 각 부서는 난방시설도 제대로 갖추어져 있지 않은 곳에서 철야작업을 시작하였다.
 
  지금도 그 당시 이 계획조사단에 참여했던 분들 가운데에는 12월 31일 철야 작업을 하고 다음날 아침(68년 1월 1일) 코피를 흘리며 따끈한 커피 한 잔으로 몸을 녹였다고 회고하는 분도 있다.
 
  박대통령께서 어떤 계획된 사업 추진을 위하여 그 임무수행에 필요하고 적합한 인원으로 구성된 조직체를 만들었다가 그 일의 진행과정에 따라 새로운 인원이 필요하다고 판단되면 아낌없이 그 조직을 해체해 버리고 새로운 사람들에 의한 새로운 조직을 만들어 일을 진행하는 것을 보았을 때, 감히 건방진 말 같지만 박대통령께서는 뛰어난 조직의 鬼才(귀재)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고속도로 노선선정
 
경부고속도로 개통식(1970.7)
대통령의 결심에 의해 서울-수원 간 노선은 결정되었고 다음 단계인 수원-대전 간 노선 선정은 이제부터이다.
 
  나는 노선선정에 앞서 우선 건설부가 제시한 안을 검토해보기로 했다.
 
  이 안은 기존의 국도에 따라 고속도로를 건설한다는 것인데 이 안대로라면 공사도 수월하고 공사비도 절감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지나치게 많은 농토가 소요되고 國道와 고속도로가 인접해 있게 되었을 경우 安保(안보)상의 문제를 우선적으로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당시의 상황으로 봐서 북괴의 충동, 파괴공작 등으로 국도와 고속도로가 동시에 파괴된다면 예상외로 큰 손실을 볼 수 있게 될지 모른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노선 선정을 해야 하는 특수한 환경에 있다는 사실을 대통령께서 늘 강조하고 계시던 것들을 새삼 상기케 해 주었다.
 
  박대통령께서 구상하고 계시던 고속도로는 당연히 경제적 효과를 優先視(우선시) 했지만 국가의 안보적 차원에서의 문제도 경제적인 면 못지않게 중요시하셨다. 그래서 고속도로로서의 기능뿐만 아니라 군사적 목적을 위해서도 사용할 수 있도록 한 것이 2개소에 비상활주로를 겸용할 수 있도록 한 것과, 고속도로에 인접된 군부대들이 언제든지 容易(용이)하게 작전에 이용할 수 있도록 고려된 것들이다.
 
  이와 같은 제반 사항을 염두에 두고 수일간 도상연구를 하고 난 다음 현지답사를 하였다. 처음 서울-수원 간을 답사할 때와 마찬가지로 농로를 따라 오르락내리락 걷다가 차에 탔다를 반복하면서 대전까지의 답사를 마치고 그 결과를 안경모 단장에게 보고 드렸더니 그 즉시로 대통령에게 보고되어 다음날 아침 대통령께서 내가 답사한 노선을 보시겠다고 하셨고 헬기 2대를 동원하여 관계 각 부처 책임자들을 분승시킨 다음 대통령께서 “윤대령 자네는 선두 헬기에 타고 안내하게” 하시기에 나는 앞 헬기에 타고 내가 선정한 노선을 따라 공중답사를 했다. 이날도 1월의 찬바람이 사정없이 몰아치는 쌀쌀한 날이었다.
 
  헬기답사를 마친 일행은 대전비행장에 착륙하여 육로로 유성온천까지 가서 점심식사를 하였는데 그 자리에서 박 대통령께서 안경모 단장과 나에게 서울로 바로 올라가지 말고 왔던 길을 다시 한 번 훑어보면서 서울로 올라가되 영동까지 갔다가 거기서부터 올라가자고 하셨다.
 
  청와대로 돌아온 대통령께서 서울-대전 간을 답사한 메모를 나에게 주시면서 “길지터널˜과 그 부근을 다시 한 번 상세하게 답사하고 그 결과를 돌아오는 대로 보고해 달라는 지시에 따라 나는 그 즉시 서울역에 가서 기차 편으로 대전까지 내려가 그곳에서 일박하고 다음날 아침 일찍부터 “길지터널” 일대를 살펴보다 보니 시간이 지체되기에 대통령께서 기다리고 게실 것 같아 우선 전화로 답사결과를 보고드렸다.
 
  내가 알고 있는 한 대통령의 고속도로에 대한 열의와 집념은 그 누구도 흉내낼 수 없을 정도였다. 아마 고속도로가 통과할 지역 치고 대통령의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은 한 군데도 없을 것이다.
 
  이렇게 해서 서울 대전 간의 노선도 확정됐다.(서울 수원 간은 이미 결정되어 있었으므로 실제로는 수원 대전 간이 결정된 셈이다.)
 
  서울에서 대전까지의 노선이 확정됨에 따라 대전 부산 간 노선확정 작업에 들어갔다. 이 작업은 나 혼자서도 충분히 할 수 있었지만 만일의 착오나 잘못된 판단이 발생될 우려 등을 고려해서 계획조사단만으로 팀을 구성할 것이 아니라 건설부에서도 한 개 팀을 구성하여 두 개 팀이 각각 별도로 답사하고 그 결과를 종합적으로 검토하여 결정하자는 안을 안경모 단장에게 건의했더니 그 안이 채택되어 시행에 들어갔다. 내가 건의했던 안은 책임을 분단하려는 수단이 아니고 시행의 착오를 방지하고 보다 정확한 결과를 얻으려는 것이었지만 결과부터 말한다면 기대했던 것만큼의 성과를 거두지도 못했거니와 건설부 팀은 유야무야 별 성과 없이 해체되고 말았다.
 
  한편 나는 대전에서 추풍령까지의 험준한 산악지대의 답사를 대통령 지시에 의해서 L-19 경비행기를 이용하여 2회나 실시하였는데 급변하기 쉬운 겨울철 기상관계로 두 번째는 추락직전까지 가는 아주 위험한 일도 있었다.
 
  1. 21북한 게릴라 남침
 
  개벽 이래 처음으로 우리의 기술과 우리의 힘으로 건설하려는 역사적인 고속도로 기공식을 1968년 2월 1일로 결정하고 계획조사단 전원이 그 준비에 동분서주하고 있던 1968년 1월 21일 기공식을 불과 9일 앞두고 난데없이 북한의 124군부대 특수부대원 31명이 청와대 습격과 정부요인을 암살하라는 김일성의 지령을 받고 休戰線을 넘어 서울에 침투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들이 자하문을 통과하려던 중 경찰의 불심검문을 받고 기관총을 亂射(난사)하며 도주하자 우리 측 군경의 소탕작전이 시작되었고 그 작전으로 28명을 사살하고 1명을 생포함으로써 작전이 종료된 사건이다. 1월 22일에는 공비들이 청와대 근처까지 침투하여 우리 군경과 치열한 총격전을 벌이고 있던 때였어도 박대통령께서는 요란스러운 총성을 들으시면서 고속도로 工程計劃을 작성하고 계셨고 1월 23일에는 동해상에서 미 해군 푸에블로호가 북괴해군에 의해 납치되는 사건도 발생하였다. 불과 수일 사이에 북괴의 군사적 도발로 인하여 긴장이 고조되고 있던 1월 29일, 이날까지도 공비 토벌작전이 끝나지 않은 상태에서 박대통령은 朱源(주원) 건설부장관과 안경모 계획조사 단장으로부터 고속도로 시공 준비상황을 보고 받는 등 열의를 보이셨다.
 
  이와 같은 북괴의 군사적 도발로 인하여 혹시라도 기공식이 연기되거나 계획의 재검토라는 문제가 발생되지나 않을까 염려스러웠지만 대통령께서는 북괴의 도발이 있건 말건 전쟁이 발발하지 않는 한 시공 일정이 결정된 이상 정해진 날에 차질이 없도록 공사계획은 진행되어야 한다는 굳은 의지를 보이셨다.
 
  역사적 기공식
 
  북괴의 도발이 노골화되는 등의 우여곡절이 있는 가운데에서도 박대통령의 강한 의지에 따라 1968년 2월 1일 예정했던 바대로 서울-수원 간 고속도로 기공식이 서울 영등포구 원지동(현 양재동 교육문화회관 부근)에서 박대통령을 비롯한 각 부처 정부요인이 참석한 가운데 거행되었다.
 
  식장에는 이 공사에 투입된 공병부대의 각종 토건장비가 도열되어 있었는데 그 당시만 해도 우리나라 건설회사에는 이렇다 할 장비 하나 제대로 갖추지 못하고 있을 때였다. 박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고속도로 건설이 70년대를 향한 한국경제의 위대한 전진을 상징하는 것이 될 것”이라는 포부를 강력하게 시사하시고 어떤 난관에 봉착한다 해도 4년 이내에 이 공사를 완공하겠다는 굳은 결의를 피력하기도 하셨다.
 
  기공식에 앞선 1968년 1월 7일 휘몰아치는 강추위에도 불구하고 육군 제1201건설공병단 220공병대대가 차출되어 불도저를 비롯한 새로 도입된 건설공병장비들을 가지고 관악산 기슭 옛골이라고도 부르는 고산자(古山子)라는 곳에 자리를 잡고 야영을 시작하며 공사투입을 기다리고 있었다.
 
  기공식이 끝나자 곧바로 투입된 공병부대의 활약과 성과는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컸다. 이 공병부대의 능력을 높이 평가한 대통령께서는 공사 진행에 따라 대전지역에 1202공병단에서 건설공병 1개 대대, 부산지역에는 1203건설공병단에서 1개 대대를 각각 차출하여 공사에 투입하였다. 이들 공병단은 어려운 공사 구간을 성공적으로 완성하는 데 큰 성과를 거두고 약 7개월 만에 모두 원대로 복귀했다.
 
  1980년 2월 15일 도로공사는 공병단 장병들이 역사에 길이 남을 보람된 일을 시작했던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서울 한남대교에서 약 12.2㎞ 떨어져 있는 곳에 20톤이 넘는 자연석으로 기념비를 세워주었다.
 
  젊은 청년장교 공사감독관들
 
  고속도로 계획단계 때부터 감독임무를 현역장교에게 맡길 것을 대통령에게 건의드린 바 있었는데 다행히 이 건의가 받아들여져 육군본부에 병력지원을 정식으로 요청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 젊은 尉官(위관)급 장교들이 공사에 참여하게 된 것이다. 현역장교 감독관의 선발기준은 육군사관학교 출신으로써 우선 미혼(총각)이라야 할 것과 월남전에 참전한 경험이 있는 자, 책임감이 강한 자 중에서 선발하도록 요청했지만 내가 가장 염려스러웠던 것은 이 많은 공병장교가 과연 있겠는가?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다행히도 육군총장이나 공병감을 비롯한 군 수뇌부가‘국가백년대계를 위해 보람된 일에 참여하는 것’이나 ‘전선에서 조국을 위해 싸우는 것’이나 진배없는 것이니 다소의 무리가 있다 해도 병력을 차출해 주는 것이 당연하다고 모든 분들이 협조해 주시는 덕분에 68년 2월 22명의 위관급 장교들이 차출되었고 3월 4일에는 ROTC출신 장교 12명이 차출되어 건설공무원 교육원에서 각각 2개월간 감독요원으로서의 필수교육을 실시하였다.
 
  현역장교를 감독요원으로 기용하고자 한 구상은 우선 젊은 패기와 사명감, 그리고 주어진 임무에 대한 책임감과 인내력 등을 활용하고자 한 것이었고 매우 어렵고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능히 해낼 수 있는 훈련을 받은 사람은 역시 군인밖에 없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이었는데 현장에 배치된 이 젊은 감독관들의 눈부신 활약상은 기대 이상의 성과를 거둬주는 덕분에 공사 기간 중 계속 많은 젊은 현역장교들이 차출되어 현장에 투입되게 되었다.
  공사현장에 투입된 젊은 현역장교 감독관들은 충실히 그 임무를 수행하려 했고 원리 원칙을 준수하려 노력했다. 그들은 항상 시방서를 들고 다니며 조금이라도 그 시방서에 어긋나거나 차질이 발생하면 가차없이 재시공, 내지는 공사를 중단하는 경우가 빈번히 발생하곤 했다.
 
  어느 한 工區에서 감독관이 얼마나 심하게 했었는지는 몰라도 한 하도급자가 “내가 공사판 노동생활 30년에 이렇게 지독한 감독관은 보길 처음 본다” 면서 삽자루를 내던지고 가버린 일이 있는가 하면, 어느 공구에서는 감독관이 자리를 비운 틈을 타서 자기들이 편리하게 공사를 해버렸는데 감독관이 돌아와 시방서와 다른 공사를 한 것이 확인되자 “이런 공사는 계속할 수 없으니 시정하기 전에는 더 이상 공사를 진행할 수 없다” 고 불도저 앞에 누워 “더 이상 공사를 진행하려거든 나를 치고 지나가 하시오” 하는 바람에 공사는 중단되었고 성토하기 위하여 운반해 온 흙을 실은 덤프트럭들이 장사진을 이루었던 일이 있었다.
 
  또 현대건설이 담당하고 있던 달이내고개에서는 표층공사(아스팔트 포장공사)를 하고 있는 곳에서 감독관이 휘니셔(Finisher) 앞에 의자를 내다 놓고 앉아서 시방서대로 공사를 하지 않아서 시정을 요구하고 있는 중이었다. 이때 마침 정주영 사장이 대한토목학회 회원들의 조언을 듣고자 공사현장에 이들을 모시고 나와 있었는데 공사장에서 일어나고 있는 광경을 바라보던 정주영 사장에게 이들이 딱하게 보였던지 공사현장까지 내려와 포장된 아스팔트 표면을 손바닥으로 쓸어보면서 “왜 이렇게 까다로운가” 하고 짜증스러운 말을 했다는 일화도 있다.
 
  이렇듯 박대통령이 아니고서는 해낼 수 없는 우수한 청년장교들의 차출과 또 차출되어온 청렴결백하고 패기 넘치는 젊은 감독관들이 생명의 위험도 무릅쓰고 자기들에게 주어진 임무에 충실했다. 오늘의 고속도로가 제구실을 하고 경제발전의 대동맥 역할을 해낼 수 있는 그 이면에는 이들 청년장교들의 피땀 어린 노고가 숨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공사현장의 오너
 
  어느 날 새벽 공사진행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공사 현장엘 나갔더니 현대건설의 정주영 사장의 검정색 지프차가 현장 가까운 곳에 세워있어 차 속을 들여다 보니 밥그릇 하나가 놓여있었다. 근처에 있던 운전기사에게 밥그릇은 뭐고 정사장은 지금 어디에 있냐고 물었더니 정사장이 몸이 불편해서 죽을 먹고 있고 정사장은 현장에 있다고 했다. 나는 정사장이 있는 현장으로 가서 “사장님 몸이 불편하시다는 말을 들었는데 아침 새벽같이 나오셨네요” 하고 인사를 했더니 몸이 불편하다는 대답은 안하고 “나보다 더 일찍 나와 다니는 사람도 있는데요” 라고 하기에 “그건 또 누군데요?” 하고 물었더니 “이병철(삼성 회장)이요!” 라고 했다. 나는 그의 말을 듣고 “또 한분 계시는데” 했더니 정사장은 얼른 알아차린 듯 “그분이야 더할 나위 없고요” 하고 받아친다. 이렇듯 이 분들이 퍼붓고 있는 열성을 봐서라도 공사가 성공리에 마무리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수일 후 다시 현장에서 정주영 사장을 만났을 때 “정사장님 이 공사에서 재미 보기는 틀린 것 같은데 그렇지 않습니까?” 했더니 “재미는 무슨 재미요” “그럼 돈도 안 되는 일에 왜 그토록 정성을 쏟아 붓지요?”라고 했더니 “장사란 게 그렇게 항상 남을 수야 있나요? 이익이 날 때도 있고 밑질 때도 있는 게지요, 아마 다음에는 좋은 결과를 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서의 손해는 손해가 아니라 투자라고 했다.
 
  그 투자란 게 또 뭔가 했더니 정주영 사장이 세계적으로 가장 低廉(저렴)한 공사비를 들여서 가장 빠르게 고속도로를 건설했다는 경험이 국제적으로 인정되어 후에 외국으로부터 많은 공사를 受注(수주) 받은 바 있었다. 아마도 그것을 정주영 사장은 투자라고 한 것 같고 이런 것을 종합적으로 봤을 때 先見之明(선견지명)이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달이내고개 하나 때문에 앞이 안 보이던 그 고개를 깎아 내리는 공사가(육군공병단 담당구역) 진행됨에 따라 시야가 넓어져 수원으로 뻗어가는 고속도로 공사현장이 한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지평선 저 너머까지 웅장하게 뻗어나가고 있는 대 토목공사현장을 바라보면서 한 지도자의 조국근대화라고 하는 대전략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용단과 집념 그리고 혼신의 열의로 재력도, 자재도, 기술도, 경험도 없는 상태에서 오직 우리만의 손과 기술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감격스러웠고, 나도 이 공사에 직접 참여할 수 있었다는 영광을 영원토록 잊을 수 없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많은 우여곡절도 있었고 시행착오도 있었지만 10개월 21일 만인 1968년 12월 21일 마침내 서울-수원 간 31.3㎞(신갈입체 교차로까지)의 공사가 마무리되었고 이와는 별도로 1967년 3월 24일 착공한 서울-인천 간 고속도로(23.4㎞)도 같은 날 준공되어 서울 영등포구 양평동에 있는 당중초등학교 교정에서 박대통령과 영부인, 3부 요인들 그리고 각국 외교사절들과 각계각층의 인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서울-수원 간, 그리고 서울-인천 간 고속도로 개통식이 동시에 성대하게 거행되었다.
 
  박대통령은 축하연설에서 「근대 산업국가에 있어 도로의 혁명 없이 산업의 혁명은 이루어 질 수 없으며, 도로의 근대화 없이 산업의 근대화가 이루어 질 수 없다는 것은 일반적인 상식이다」고 하였고 「경부고속도로가 완공되는 70년 12월경에는 서울-부산 간의 거리가 4시간대로 단축될 것이며 이 고속도롤 통해 우리나라의 산업이 무한한 발전을 이룩하게 될 것이다」라고 힘주어 말씀하셨다. 그리고 이 공사에서 무엇보다 자랑스러운 것은 두 고속도로(서울-수원, 서울-인천)가 모두 순수한 우리의 기술과 자본만으로 세계에서 가장 적은 예산으로 가장 빠르게 건설할 수 있었다는 것임을 강조하셨다.
 
  대통령의 연설이 끝난 다음 유공자에 대한 훈장표창장이 수여되었는데 나도 영광스럽게도 4등 보국훈장을 받았다.
 
  원대복귀
 
  나는 경부고속도로 전 구간의 도로측정을 마치기는 했지만 서울 부산 간 전 구간의 준공까지는 보지 못하고 69년 2월 12일 청와대 파견 1년 3개월 만에 원대에 복귀했다.
  그 날 박대통령에게 신고 차 청와대 대통령 집무실에 들어갔더니 대통령께서 “그동안 고생 많았지!” 하고 위로의 말씀이 있었고 친필로 원대복귀를 축하한다는 서한을 그 자리에서 직접 써주시면서 그 글을 쓰신 만년필까지 기념으로 주셨다.
 
  짧으면 짧다고 할 수 있는 기간이기는 했지만 박정희 대통령을 가까이에서 모시면서 일국의 대통령이 그처럼 소박하시고 어떤 일에든 무서울 정도의 집념과 열의를 쏟아붓다시피 하는 그리고 儉素(검소)와 節約(절약)이 몸에 배이신 분을 보면서 나는 많은 것을 배웠고 또 많은 것을 느끼게 한 기간이기도 했다.
 
  육영수여사 묘소조성
 

  내가 국방부 조달본부 건설국장으로 재직중이던 1974년 8월 15일 광복절 기념행사장에서 육영수 여사가 시해를 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사건을 세칭 문세광 사건이라고 한다.
 
  이 사건이 일어난 지 2일 뒤인 8월 17일 국방부차관(이민우 예비역 육군중장)께로부터 동작동 국립묘지로 곧 나오라는 호출을 받고 황급히 달려가 보았더니 국립묘지 내의 야산 한 곳에서 이차관과 지관으로 보이는 세 사람이 묘지선정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중이었다.
 
  국방부차관이 내가 온 것을 보고 “윤장군, 고 육영수 여사의 묘지설계를 곧 세워주어야겠소” 하기에 “네”하고 대답은 했지만 계획수립에 앞서 우선 정확한 장소가 결정되어야 하는데 지관들의 의견차이로 정확한 위치 결정도 못하고 그 세 지관들은 墓點(묘점)도 찾지 못하고 서로 옥신각신 시간만 낭비하고 있었다. 내가 이 세 사람이 묘점을 찾을 때까지 기다리고 있으려니 날이 새도 안될 것 같아 이 세 지관들에게 자신들이 주장하고 있는 묘점을 선정하고 표시를 한 다음 그것을 가지고 묘점을 좁혀보자고 했더니 세 사람이 정한 곳을 제시하는데 서로 근처에 있었기에 나는 그 중간지점을 택하고 여기는 어떠냐고 했더니 모두 좋겠다는 동의를 얻어 지체 없이 측량에 들어갔다.
 
  일단 약식측량을 마치고 약식설계를 그리면서 군 병력을 동원하여 임시 묘역공사에 착수했다. 그렇게 해서 약간의 시간을 얻어 정식 설계도 하고 브리핑 차트도 그리고 현장에 임시 사무실을 만들기 위한 천막도 칠 수 있었다.
 
  다음날인 8월 18일 국무총리(김종필)와 국방부장관(서종철 예비역 육군대장) 두 분이 공사현장을 방문하셔서 군 병력이 동원되어 시공하고 있는 묘역을 안내한 다음 임시 사무실인 천막에서 밤새 작성해 놓았던 미니차트로 설계내용을 설명했다. 내 설명을 다 듣고 난 국방장관이 “그 차트를 가지고 날 따라오게”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국방장관 차 뒤를 따라 갔는데 그 곳은 청와대였다.
 
  대통령 집무실에 들어섰더니 갑작스런 사건으로 인해 비통에 잠겨있는 대통령의 너무나도 애처로운 모습에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은 아픔을 느꼈다.
 
  나는 어떤 위로의 말씀도 드리지 못하고 곧바로 묘지선정과 설계에 대한 브리핑을 드렸다. 다 듣고 나신 후 “수고했소. 설계한 내용이 아주 잘 됐는데 땅을 너무 많이 차지하는 것 아니오?” 하고 묻자 옆에 앉아있던 김종필 총리가 “주위에 나무를 심으면 됩니다˜라고 대답했고 대통령께서는 “그래 그럼 나도 나무를 심도록 해야겠는 걸!”하시며 다시 한 번 설계가 잘됐다고 흡족해 하시는 것 같았다.
 
  브리핑이 끝나자 대통령께서 “기왕에 왔으니 저녁식사나 같이 하고 가라”고 하셔서 같이 갔던 일행은 박대통령과 같이 저녁을 한 다음 나는 곧바로 묘소현장으로 돌아와 청와대에서 논의되었던 문제들에 대한 보완공사를 지시했다. 임시묘역공사가 끝나는 것과 장례식이 끝나는 시간이 거의 동시에 이루어졌다.
 
  장례식장에 갔던 나에게 장례식이 끝나는 즉시 묘소로 오라는 국방장관의 전화지시를 받고 묘소에 도착해 보니 국방장관과 이주호(예비역 육군준장), 국립묘지 관리소장 두 분이 기다리고 있었다. 대통령께서 곧 이곳에 오신다는 전달을 받고 기다리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잠시 후 대통령께서 도착하여 곧바로 묘소로 올라가 참배하시고 내려오는 것을 기다리고 있었던 국방부장관이 대통령에게 “묘소공사를 전적으로 尹永浩(윤영호)장군에게 맡기겠습니다˜ 라고 하니 대통령께서 나에게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하면서 잘 부탁한다는 말씀을 남기고 묘소를 떠났다.
 
  그 날 청와대에서 묘비건립 소요예산의 문의가 있어 見積을(당시의 금액으로 2천 8백만 원) 올렸더니 그 즉시 현금이 지급되었다. 돈을 받고 보니 책임이 한층 더 무거워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돈이 많이 들어가는 것은 묘소에 소요되는 석재인데 그것은 강화도의 것이 제일 좋다고 하기에 강화도에 전문가를 보내 단시간 내에 석재를 구할 수 있는지 그 석재의 질이 어떤 것인지를 보고 오라고 했고 한편 그 석재를 운반해 올 수 있는 운반회사로 대한통운이 좋을 것 같아 내가 직접 대한통운 최사장에게 전화를 걸어 자초지종을 말했더니 최사장이 “그런 일이라면 만사를 제쳐놓고라도 해야지요”하며 직접 진두지휘해서 석재를 목적지까지 책임지고 운반해 주겠다고 했다. 문제는 시간과 인력이 많이 소요되는 石工(석공)들의 작업인데 석공을 모두 동원하여 24시간 3교대로 작업을 시키기로 했다.
 
  한편 묘소로서 중요시되는 배수처리 문제와 계단 등의 조성은 사후 100년이 가도 하자가 발생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우선 배수로는 묘소 양쪽에 1m깊이의 盲暗渠(맹암거)를 설치하고 배수를 용이하게 할 수 있도록 하였고 계단은 설치할 곳에 철근 콘크리트를 한 다음 석재로 계단을 조성하는 등 더할 나위 없이 완벽을 기하려고 노력하였다.
 
  육여사 묘지조성에 동원된 모든 사람들은 경건한 마음으로 정성을 다하겠다는 뜻으로 매일 작업을 시작하기에 앞서 묘소를 참배하곤 했다.
 
  묘소에 입힐 잔디는 가장 중요시되는 것의 하나이기에 한국도로공사에 의뢰했더니 박기석 사장(전 건설부장관)께서 직접 나서서 잔디 배양지까지 가서 선정하여 보내주었기 때문에 최상급 잔디를 구할 수 있게 되어 나의 큰 고민거리 하나가 해소된 셈이 되었다.
 
  물론 석재도 계획대로 육군사관학교 후문 근처에 있던 석재공장에 무사히 운반되어 예정했던 대로 3교대로 작업이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당시 청와대의 김정렴 비서실장께서는 1주일에 한번 현장에 나와 공사 진행 상황을 보고 가서는 대통령에게 보고하고 있었다. 현장 책임자인 나도 물론 국방부장관을 통해 일일이 공사진행 보고를 했다.
 
  이 공사에 참여했던 현역군인은 물론 민간인들까지도 모두 휴일을 반납하고 아침 일출 시간부터 밤늦도록 열심히 일해준 덕분에 공사를 시작한 8월 17일부터 42일 만인 9월27일(추석 3일 전)공사를 마무리 지을 수 있었다.
 
  공사가 마무리되는 날에는 일반적 관습에 따라 여기에 참여했던 모든 사람들이 묘소 앞에서 뜬눈으로 하룻밤을 새웠다.
 
  공사 기간 중 어려움이 있었다면 매일 매일 일찍부터 구름 떼같이 몰려오는 참배객들 때문에 공사 진척에 차질이 발생하지 않을까 염려스러웠던 것이다. 다행히 참배객들의 이해와 협조로 공사에 큰 지장 없이 완료할 수 있었다는 것은 매우 다행한 일이었다고 여겨진다.
  공사를 완공한 후 남은 약간의 예산으로 묘소의 비품 구입비로 사용하도록 조치하고 모든 공정을 깨끗이 마무리했다.
 
  청와대에 준공결과 보고가 되고나서 얼마 후 박대통령께서 나를 부르시기에 청와대에 들어갔더니 묘지조성에 수고가 많았다고 하시며 친서와 함께 선물을 주셨다.
 
  내가 책임지고 조성한 그 묘소가 곧 박대통령의 묘소가 되리라고는 미처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다행히도 오늘까지 그 묘역에 瑕疵(하자)가 발생하지 않았다는 것은 내가 만든 설계도 시공도 감독도 무난하게 된 것 같아 자위하고 있으며 현충원에 들릴 때마다 남달리 깊은 감회를 느끼곤 한다.
 
  끝으로 혹시 누가 나에게 일생을 통해 가장 보람된 일이 무엇이었냐고 묻는다면 나는 서슴없이 “초 빈국에서 대 도약을 위해 국가백년대계의 전략을 세우고 실천에 옮기신 위대한 대 전략가 박대통령 밑에서 우리나라 개벽 이래 처음으로 시행하는 경부고속도로 건설계획에 참여하여 路線(노선)결정에 박대통령을 보좌하고 또 그 공사에 감독책임자로서 맡은 바 소임을 다했다는 것과 불의의 참변으로 작고하신 박정희 대통령 영부인 육영수 여사의 묘소 조성공사를 맡아 할 수 있었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말할 것이다.
 
  내가 근 30년간 군에 몸담고 있으면서 남달리 중요한 과업에 참여할 수 있었다는 것은 어쩌면 영광스러운 행운아였는지도 모른다.쬂
 

  필자약력
  육군 소위 임관
  한양대학교 공과대학 토목공학부 졸업
  육군대학교 졸업
  제 1102 야전공병단장
  국가기간 고속도로 정부파견
  제 6군단 공병 여단장
  육군 준장으로 승진
  국방부 조달본부 건설국장
  제 2군 사령부 공병부장
  군수기지 사령부 종합보급창장
  군에서 예편
  (주) 신성 전무이사 근무
  서울대 경영대학 최고경영자 과정수료
  신영기술개발 사업자 등록
  신영기술개발(주)/신영조경(주) 대표이사 취임
  신영기술개발(주) 회장재임
 
  상훈
  토목기사 1급 취득
  측지기사 1급 취득
  표창장 제 34260호,4등 보국헌장 제 1044호(대통령표창)
  보국포장 제 632호,보국훈장 천수장 제 914호(대통령표창)
  보국헌장 국선장 제 501호 (대통령표창)
  표창장 제 15617호 (국무총리표창)
  무공훈장 제 10398호, 무공훈장 제 39234호(국방부장관표창)
  표창장 제 753호, 표창장 제 925호(국방부장관표창)
  표창장 제 978호 (건설부장관표창)




출처 : " 영원히 함께 "
글쓴이 : 늘영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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