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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에 쫓긴 한국 기자를 굴복시킨 중국 농부의 '침묵 협상'

화이트보스 2012. 5. 13. 09:05

시간에 쫓긴 한국 기자를 굴복시킨 중국 농부의 '침묵 협상'

  • 여시동 기자

  • 입력 : 2012.05.12 03:33 | 수정 : 2012.05.13 08:08

    중국인들과의 협상은 늘 쉽지 않다.

    10년 전 베이징 특파원으로 있을 때 시 외곽에 차를 몰고 갔다가 시골 농부가 탄 자전거와 부딪혔다. 자전거가 넘어지지도 않았고 차에 흠집도 나지 않은 경미한 사고였다. 그런데 놀랍게도 농부는 자전거를 번쩍 들더니 차 앞에 딱 세워놓고는 팔짱을 낀 채 먼 산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보상받기 전에는 자리를 뜨지 않겠다는 의사 표시였다. 기자는 잘잘못을 따졌으나 그는 거의 입을 열지 않았고, 결국 시간에 쫓긴 기자는 몇십위안을 주고 말았다. 농부는 시간싸움에 자신이 유리하다는 판단을 한 뒤 짧은 '침묵 협상'으로 기자를 굴복시킨 것이다. 중국인들은 협상의 유리한 고지를 점했다고 판단하면 웬만해선 양보하지 않는다. 비슷한 경우를 최근 샤먼(厦門)에서 목격했다.

    지난 5일 샤먼에 있는 한국 기업 (주)지누스 사무실에서 중국인민재산보험사 관계자 3명과 지누스 임원 3명이 만났다. 지누스는 중국에 진출한 최초의 한국 기업이자 세계적인 텐트업체였던 '진웅'의 후신으로 현재는 침구류를 생산하고 있다. 이 회사는 지난해 4월 자연 발화로 공장 건물들이 불타는 바람에 파산 직전에 몰렸다. 이날 만남은 보험금 문제를 협상하는 7차 회의였다.

    현장에서 지켜본 대화 분위기는 냉랭했다. 보험사 측은 지누스가 요구하는 보험금의 절반 이상은 절대 줄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보험사 직원은 전혀 감정을 섞지 않은 목소리로 "이번 사건은 보험사의 책임범위를 벗어난 것이다. 만약 절반 이상을 보상하게 되면 보험 책임을 인정하는 셈이 되므로 곤란하다"고 말했다. 그들은 지누스 측의 거듭된 설득에도 불구하고 한 치도 물러서지 않았다. 지누스는 화재 이후 은행 돈줄이 막히면서 보험금이 당장 필요한 반면 보험사로서는 시간적으로 아쉬울 게 없는 상황이다.

    지누스 측은 지난해 11월 피해평가사로부터 8800만위안(약 150억원)이라는 보상금 산정 결과를 통보받았다. 하지만 보험사는 절차상의 문제를 들어 이 보고서를 무효화했고, 평가사는 재평가에 들어가 보험사의 보상 책임을 면제해주는 제2 보고서를 냈다. 광저우총영사관의 이재근 영사는 "보험사는 평가사가 중간보고서를 내지 않은 것을 문제 삼았지만 이는 보험사 측도 미리 합의한 사항"이라며 "보험사가 사후에 평가사에 압력을 넣은 혐의가 짙다"고 말했다.

    이번 사안은 한국 공관들이 지누스 지원사격에 나서고 이에 맞서 중국 최대 보험사가 피해평가사를 거느리고 공동 방어전을 펼치는 집단 힘겨루기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다. 한국대사관에서는 그동안 베이징의 보험사 본사 및 보험감독관리위원회와 접촉해왔고, 광저우총영사관에서는 샤먼시 보험감독국 등을 찾아가 여러 번 항의했지만 효과가 없었다.

    진퇴양난에 몰린 지누스 측은 지난 3일 외국 기업으로서는 처음으로 샤먼 당국에 시위 허가 신청을 했다. 허가가 안 나면 불법 시위도 불사할 태세다. 상하이의 한국 보험사 관계자는 "입이 닳도록 하는 얘기지만 중국 측과 계약을 맺을 때는 재삼 내용을 확인하고 반드시 물적 근거를 남겨야 한다"고 말했다. 이번 사안을 계기로 한국 기업들은 다시 한번 경각심을 높여야 한다. 동시에 중국 측도 많은 한국 기업이 이 사안을 주시하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