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2.05.24 03:05 | 수정 : 2012.05.24 07:12
[실패 연구 : 국가 핵심 기술인 로켓, 왜 낙오됐나] [1]
1998년 정부의 명령 - 소형 로켓 개발 중인데
느닷없이 "우주 로켓 만들라"… 독자개발 대신 기술도입으로
러시아에 끌려다닌 5년 - 애초 기술 이전 약속했다가
나중엔 "돈 주고 사가라"… 시험도 안 거친 로켓 건네
우크라이나에서도… - 30t급 엔진기술 배워왔지만 국내 테스트 장소 없어 사장
IMF 경제 위기가 한창이던 1998년 9월 대전의 국책 연구기관 한국항공우주연구원(항우연)에 100억원의 예산이 갑자기 떨어졌다. 예산에는 '2005년까지 무조건 우주 발사용 장거리 로켓을 만들라'는 긴급 지시가 붙어 있었다.
당시 항우연은 2010년 우주발사체(로켓) 개발을 목표로 고체연료를 쓰는 소형 과학로켓을 개발하고 있었다. 정부 지시는 이를 5년이나 앞당기라는 것이었다. 더구나 장거리 로켓은 액체연료 엔진을 써야 하는데 당시 항우연을 포함해 국내에서는 이 기술을 연구하는 곳이 없었다.
항우연은 일단 2001년까지 지상 200㎞까지 올라가는 기본형 액체로켓(KSR3호)을 만든 뒤 이를 개량해 2005년쯤 무게 50㎏급의 저궤도 위성을 실어 쏘아 올린다는 전략을 세웠다. 이때까지만 해도 항우연과 과학기술부는 로켓 기술을 독자 개발한다는 방침이었다.
대통령까지 나서 '2005년 로켓 발사'를 선언한 마당이라 청와대와 과학기술부는 어떻게든 '지름길'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채연석 당시 항우연 선임연구부장은 "2005년 발사 일정을 맞추기 위해 외국에서라도 빨리 기술을 들여오라는 상부의 재촉이 있었다"고 말했다. 정치적 배경이 크게 작용했다는 말이다.
항우연과 과기부는 액체 로켓 엔진을 도입하기 위해 미국·일본·프랑스·러시아를 급히 접촉했다. 이 가운데 한국에 기술 이전을 해주겠다는 의사를 밝힌 나라는 러시아가 유일했다. 당시 러시아는 외환 위기로 재정난이 극심했다. 현금이 급한 러시아와 2005년 발사 일정이 촉박한 우리 정부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졌다.
과기부는 2001년 5월 러시아와 기술 협력을 위한 양해각서(MOU)를 체결하고 협상을 시작했다. 협상은 처음부터 삐걱거렸다. 갈 길 바쁜 우리 정부의 사정을 알아챈 러시아는 거액을 요구하며 시간을 끌다가 2003년 9월에야 자국 우주 기업 흐루니체프를 공식 협력기관으로 선정했다. 항우연은 2004년 3월 당시 오명 과학기술부장관에게 "2005년 발사 계획을 수정하는 것이 불가피하다"고 보고했다. 협력이 본격 시작되기도 전에 로켓 발사는 2007년으로 미뤄졌다.
게다가 당초 기술 이전을 약속했던 러시아가 말을 뒤집었다. 우주발사체의 핵심인 1단 로켓의 엔진을 포함한 핵심 기술은 전해줄 수 없다고 돌변했다. 로켓을 공동 개발하는 것이 아니라 돈을 주고 사가라는 것이었다. 러시아 정치권은 "한국에 대한 기술 유출이 우려된다"며 양국 간 기술 보호협정까지 요구했고, 2007년에 협정이 비준됐다. 그동안 우리나라는 우주발사체 개발을 착수도 못 해보고 러시아에 5년을 끌려 다녔다.
다급해진 항우연은 그사이 러시아를 대신해 1단 발사체 엔진 기술을 제공할 새로운 파트너를 찾아나섰다. 우크라이나에서 30t급 로켓 엔진 기술을 배워왔지만 국내에는 그 성능을 테스트할 연소시험장조차 없었다. 결국 이 엔진은 개발되지 못하고 묻혀버렸다.
러시아는 2009년에야 자신들이 실제 시험 발사도 해보지 않은 1단 로켓을 한국에 제공했다. 이를 바탕으로 만든 나로호는 두 차례 모두 발사에 실패했다. 장영근 항공대 교수(우주공학)는 "우주발사체는 국가 안보 기술인데 어느 나라가 쉽게 넘겨주겠느냐"며 "차라리 그때 러시아와 계약을 끊고 독자 개발에 나섰다면 지금쯤 로켓 기술이 훨씬 진전됐을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나라는 현재 1단 로켓 엔진을 시험하기 위한 종합연소시험장조차 없는 상태다.
하지만 나로호 개발 책임자인 조광래 항우연 나로호발사추진단장은 "러시아로부터 기술을 배운 게 전혀 없다는 비판에 동의할 수 없다"며 "독자개발로 갔다면 우리의 로켓 기술이 지금과 같은 수준까지 오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액체로켓·고체로켓
액체로켓은 연료가 액체인 로켓이다. 액체연료가 고체연료보다 에너지가 크기 때문에 무거운 위성이나 화물을 우주로 쏘아 올릴 때 주로 사용한다. 단거리 발사에 사용되는 고체로켓은 고체연료를 사용한다. 고체로켓은 발사준비 시간이 짧아서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등 주로 무기에 쓰이나, 최근에는 저궤도 위성 발사체로도 활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