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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MZ는 아직도 이렇게 뜨거운데

화이트보스 2012. 6. 8. 11:07

DMZ는 아직도 이렇게 뜨거운데

  • 이시형 세로토닌문화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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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 2012.06.07 22:50

    양구 펀치볼에서 본 비무장지대 초여름 적막 속 촉촉한 老兵 눈
    '당신들 OK?' 긴장한 외교사절
    '지구 곳곳에서 한국産 기다리고 무슨 일 일어나면 세계가 흔들려'
    약소국 아닌 우리, 평화 지켜내야

    이시형 세로토닌문화원장
    얼마 전 강원도 양구 펀치볼 전망대에서 바라본 DMZ(비무장지대)의 저 아래 깊은 계곡엔 죽음 같은 정적이 흐르고 있었다. 아, 저기엔 이름도 없이 죽어간 수많은 젊은이들의 원혼(寃魂)이 서성이고 있겠지. 내 하나뿐인 형은 지금 어느 하늘에서 떠돌고 있을까. ‘형, 미안해.’ 나도 몰래 불쑥 튀어나온 말이었다. 온갖 회한과 상흔을 안고 DMZ는 말이 없었다. 초여름 산들바람이 울창한 숲을 조용히 흔들고 있었다. 이제라도 곧 터질 것 같은 일촉즉발(一觸卽發)의 긴장을 한낮의 뻐꾸기 울음이 달래고 있었다.

    그때 어디선가 낯익은 가락이 들려왔다. 저만치서 노(老)신사 한 분이 철조망을 부여잡고 흥얼거렸다. ‘… 흙이 묻은 철갑모(鐵甲帽)를 손으로 어루만지니, 떠오른다. 네 얼굴이 꽃같이, 별같이.’ 아, 그 한 맺힌 노래. 나도 몰래 발길이 그리 갔다. 가만히 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북녘 땅을 응시하고 선 노병(老兵)의 눈이 흥건히 젖어 있었다. 그래도 DMZ는 말이 없었다. 멀리 금강산이 삐죽이 보이는 능선 아래 인민군 초소도 한가로웠다. 아주 평화롭기까지 했다. 그래서일까, 관람 온 사람들은 한껏 멋을 내 기념사진을 찍는 등 화기애애했다. 제법 나이깨나 듦직한 중늙은이까지. 이제 DMZ도 관광코스가 된 것인가.

    그러나 함께 간 주한 외교사절들의 긴장된 분위기는 사뭇 달랐다. “당신네는 괜찮아?” 인도 영사 한 분이 내 허리를 툭 치며 물었다. 금방이라도 다시 터질 것 같은데 한국 사람들은 어쩌면 이렇게 태평할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아 유 오케이(Are you OK?)” 지금도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내년으로 다가온 DMZ 60년을 앞두고 산림청이 이곳을 평화의 숲으로 만들자며 주한 외교사절을 초청한 뜻깊은 행사였다. ‘휴전선(休戰線)’이란 말부터 우리 기억에 아물아물하다. 오랜 역사 속에 묻혀버린 신화처럼 무감각해진 우리가 아닌가.
    일러스트=이철원 기자 burbuck@chosun.com
    귀로에 내가 템플스테이의 명상 해설강사로 초빙된 설악산 백담사에 들렀다. 저녁 공양 후 절에서 마련한 다양한 문화행사에서까지 DMZ의 긴장이 풀리지 않는지 계속 이야기가 거기에서 맴돌고 있었다. 난 이분들이 왜 이렇게 DMZ에 관심이 많은지 궁금했다. 100여명이나 되는 각국 외교사절들이 바쁜 일정 다 제쳐두고 남의 일에 참가한 것부터가 신기했다. 내 질문에 둘러앉은 외교사절들이 의아하다는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동구권에서 온 영사 한 분이 흥분된 어조로 일갈한다. “무슨 소릴? 우리가 어떻게 관심이 없을 수 있겠소? DMZ가 흔들리면 세계 경제가 흔들립니다. 그 충격파는 상상을 초월합니다. EU의 한 나라 부도 사태보다 더 심각합니다. 세계 유수 기업들이 한국에 와 있습니다. 세계 곳곳에서 ‘메이드 인 코리아(Made In Korea)’를 기다리고 있는데, 한국에 무슨 일이 일어나면 어떻게 되겠소?” 나를 윽박지르듯 말의 톤이 높아졌다.

    ‘그렇구나. 한국의 국력이 이렇게 커졌구나. 우리의 영향력이 세계를 흔들고 있구나.’ 순간 우쭐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우리가 생각하는 한국과 세계가 지켜보는 한국은 이렇게 다르다. 어느새 우리가 세계의 중심무대에 우뚝 서게 된 것이다. 그 가난하고 약했던 나라가? 우리 스스로도 믿기지 않는다. 오늘 현재 세계에서 한국으로 모여든 사람이 130만명이다. 폐허에서 일구어 낸 경제 기적을 배우러 온 것이다. 후진국만이 아니라 선진국에서도 한국의 빠른 역동성에 감탄하며 모여들고 있다. 그만큼 우리 책임도 막중해졌다. 무엇보다 우리는 DMZ를 안전하게 지켜내야 한다. 이건 단순히 우리 자신의 안보문제만이 아니다. 세계 평화와 인류 복지를 위해서다. 그래야 언젠가 평화 통일의 날도 찾아온다.

    나 스스로에게 그리고 우리 국민에게 묻고 싶다. 그럴 결의가 돼 있느냐고? 행여 아직도 그 뿌리깊은 민족적 열등감과 패배의식에 젖어 있지나 않은지. 혹은 ‘어떻게 되겠지’ ‘설마 그럴 리야’ 하는 병적인 낙천주의에 빠져 있진 않은지.

    요즈음 국회를 비롯해 돌아가는 시국을 보노라면 이런 걱정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생각이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하게 되는 걱정이다. 하지만 결론은 분명하다. 우리는 할 수 있다. 우리는 그럴 실력이 있다. 누굴 믿어서도 안 되고 믿을 수도 없다. 우리 힘으로 지켜내야 한다. 세계에서 7번째로 ‘20-50 클럽’에도 당당히 이름을 올렸다. 대단한 나라다. 세계를 돌아다녀 보라. 한껏 높아진 한국의 위상을 실감할 수 있다. 우리는 세계 정상의 강국이다. 우리가 전 세계를 이끌어 갈 리더란 사실을 알아야 한다.

    이 사실을 분명히 가슴에 새겨야 한다. 우리는 더 이상 약소 민족이 아니다. 누구 등에 기대야 할 나라도 물론 아니다. 세계열강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세계문제에 함께 책임을 져야 할 동반자임을 자각해야 한다. 그래, 자각이요, 결의다. DMZ를 평화롭게 지켜내겠다는 결의다. 그리고 우리는 그럴 실력이 있다는 자각이다. 이건 멋모르고 시시덕거리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DMZ가 아직도 뜨겁단 사실을 우리는 잊지 않고 있다. 대충 이게 그날 밤 걱정하는 외교사절에게 한 내 설명이었다. 옳게 된 설명이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