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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철수의 '부정 출발'

화이트보스 2012. 7. 25. 11:32

안철수의 '부정 출발'

  • 김창균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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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 2012.07.24 22:59

    교과서 11곳 '안철수 위인전' 20대의 열광적 지지 밑거름
    홍보성 예능 프로 두 번 출연… 수백억원짜리 TV 광고 한 셈
    재벌 '불공정 경쟁' 비판하며 자신은 大選 경주 특권 누리나

    김창균 논설위원

    한 언론사가 유권자 좌담회에서 "안철수란 사람을 어떻게 알게 됐느냐"고 물었더니 상당수가 안철수 서울대 교수가 2009년 6월 출연했던 MBC TV 예능 프로그램 '무릎팍도사'를 꼽았다. 그런 안 교수가 이번엔 SBS TV '힐링캠프'에 출연했다. 새누리당 박근혜 대선 경선 후보, 민주당 문재인 후보가 지난 연초에 나왔던 예능 프로그램이다. 문 후보는 이 프로그램에 출연한 뒤 한 달 사이에 지지율이 8%에서 14%대로 6%포인트가량 뛰어올랐다. 민주당의 손학규·김두관 후보, 새누리당의 김문수 후보도 출연 기회를 달라고 했지만 방송사는 "더 이상 정치인을 다루지 않겠다"고 거절했다. 그래 놓고 대선 출마를 저울질하고 있는 안 교수에겐 기회를 줬다.

    얼마 전 시인 도종환씨가 국회의원이 됐으니 교과서에 실린 그의 시(詩)를 삭제해야 하느냐는 논란이 있었다. 그때 필자 머릿속엔 "교과서에 소개됐던 사람이 선거에 나서면 불공정 논란은 없을까"라는 다른 각도의 질문이 떠올랐다. 만일 도종환씨가 비례대표가 아닌 지역구 후보로 출마했다면 경쟁자들은 교과서에 이름이 나온 상대와 득표 경쟁을 하는 것이 억울하다고 느낄 만하기 때문이다. 안철수 교수의 이름은 초등학교 교과서 1곳, 중학교 교과서 6곳, 고등학교 교과서 4곳에 나온다. 안 교수의 자서전 또는 수필을 소개했거나 안 교수의 최측근으로 꼽히는 '시골 의사' 박경철씨와 인터뷰를 가진 내용을 실었다.

    미디어리서치의 6월 말 대선 주자 지지율 조사에서 안 교수에 대한 20대 유권자 지지율은 34%인 반면, 50대 유권자 지지율은 6%다. 교과서에서 안철수를 접한 20대와 언론에서 안철수를 접한 50대의 지지 강도가 5배 이상 벌어지는 것이다. 교과서 속 사람 이야기는 청소년들에게 본받게 하려는 '위인전' 성격이다. 예능 프로그램도 스타급 인사들을 쉽게 섭외하려고 출연자를 한껏 띄워 준다. 사람을 근사하게 포장하는 데 초점을 맞추다 보면 사실 관계를 엄격하게 따지는 일은 소홀해지기 쉽다.

    안 교수는 '무릎팍도사'에서 "입대하는 날 아침까지 컴퓨터 바이러스 백신 프로그램을 만들다가 허겁지겁 부대로 달려갔다. 아내에게 군대 간다는 말도 안 하고 온 사실이 뒤늦게 떠올랐다"고 했다. MC들은 "남편이 실종된 줄 알았을 거 아니냐"면서 눈을 크게 떴다. 방송 용어를 빌리자면 안 교수를 치켜세우기 위한 '리액션'이다.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도 이 얘기가 그대로 실려 있다. 연구에 정신이 팔려 달걀 대신 시계를 끓는 물에 넣었다는 어느 위인 얘기가 생각난다.

    안 교수 부인 김미경씨도 작년 8월 조선일보 인터뷰에서 그날 얘기를 했다. 안 교수가 입대 날 아침까지 백신 프로그램을 만들었다는 대목까지는 같은 내용이다. 다만 부인 김씨는 "(남편 안씨를) 기차에 태워 보내고 혼자 돌아오는데 무지 섭섭했다"고 했다. 안 교수가 아내에게 군대 간다는 말도 않고 입대한 것은 아니라는 얘기다.

    2008년 미국 대선 때 오바마 후보는 400만달러(약 50억원)를 내고 30분짜리 TV 선거 광고를 방영했다. 안 교수는 지상파 TV 두 곳의 홍보성에 가까운 프로그램에 1시간씩 출연했다. 수백억원 가치의 광고를 공짜로 한 셈이다. 방송사가 공정 선거 관점에서 판단했다면 대선이 5개월도 안 남은 시점에 대선 후보로 거론되는 사람 중 한 명을 예능 프로그램에 초대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안철수 교수의 삶은 청소년에게 소개할 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만일 안 교수가 선거에 나설 잠재적인 정치인이라는 사실이 알려져 있었다면 교과서에 안철수 얘기가 실릴 수는 없었을 것이다. 다른 대선 주자들은 교과서에 이름이 나오고 TV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안 교수와 경쟁하는 게 불공정하다고 불평할 것이다. 100m 경주로 치자면 출발 총성도 나기 전에 옆 레인의 안 교수가 열 발자국 이상 뛰쳐나가는 '부정 출발'을 했다고 느낄 것이다.

    안 교수는 새로 나온 저서 '안철수의 생각'에서 정의(正義)에 대해 "첫째, 모두가 같은 출발선에 서도록 공정한 기회를 주는 것이며, 둘째, '특권'을 허용하지 않고 공정한 규칙을 적용하는 것"이라고 썼다. 재벌들이 중소 업체들과 불공정한 경쟁을 하고 있다고 비판한 것이다. 안 교수는 2012년 대선 경주에서 자신만 특권을 누리고 있다고 생각지 않는가. 안 교수가 지지율이 높은 덕에 다른 주자가 못 나가는 TV 프로그램에 출연해 지지율을 더 올릴 기회를 얻은 것은 자본의 힘으로 불공정한 경쟁을 하는 재벌과 어떤 점이 다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