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끼리는 생각하지 마.”
이 말을 듣자마자 머릿속은 코끼리(미국 공화당 상징)로 가득 찬다. 의식적으로 코끼리를 몰아내려 하지만 무의식적으로 코끼리의 틀에 갇히게 된다. 미국의 대표적 진보 석학인 조지 레이코프(71·사진) UC버클리대 교수가 ‘선거전략 프레임’ 이론을 제시하며 냈던 책 제목이기도 하다. 인지과학·언어학 권위자이기도 한 레이코프 교수의 책은 한국에서도 큰 인기를 끌었다. 한·미 모두 대선을 앞둔 시점에서 그의 시각이 궁금했다. 그는 “한국에 대한 관심이 많지만 한국 정치 전문가는 아니어서 조심스럽다”면서도 기자가 미리 보낸 관련 기사들을 탐독하고 별도로 사전조사를 한 뒤 전화 인터뷰에 응하는 열의를 보였다. 지난 3일 새벽 2시(한국시간)부터 약 100분간 진행된 인터뷰는 레이코프 교수도 지대한 관심을 보였던 ‘안철수 현상’으로 시작했다.
-한국 대통령 선거가 12월 19일 치러진다. 잠재적 후보인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은 여전히 출마 선언을 않고 있다.
“선거전에서 넉 달은 짧지 않다. 진짜 문제는 출마 이후다. 정치는 결국 사람이다. 선거에서 이기는 것과 국가를 통치하는 건 엄연히 다른 문제다. 대통령이란 자리는 만만히 볼 게 아니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2008년 대선에서 멋지게 승리했지만 당선 이후 암초에 부딪쳤다. 3000개가 넘는 정부 요직을 임명해야 하는데 등용할 인재가 모자랐기 때문이다. 결국 오바마 대통령의 정권인수팀장 자리는 라이벌이었던 힐러리 클린턴 측 핵심인사 존 포데스타에게 돌아갔다. 포데스타는 빌 클린턴 대통령 시절 백악관 비서실장을 지냈던 인물인데 대표적인 ‘클린턴의 사람’이었다.”
-그렇게 따지면 안 원장에겐 시간이 많지 않은데.
“대선 이후까지 생각한다면 시간이 없다. 자신의 가치관을 공유하면서 동시에 믿고 일을 맡길 수 있는 유능한 인재는 생각보다 찾기 어렵다. 지금쯤 안 원장은 물밑에서 열심히 인재를 찾고 있지 않을까 싶다. 그렇지 않다면 큰 문제다. 당선 이후 그림까지 그려가면서 선거전을 치러야 성공한 대통령이 될 수 있다. 그래서 대통령 자리는 어려운 거다.”
-안 원장으로선 민주통합당과의 후보 연대 문제도 남아 있다.
“그가 무소속으로 출마할 생각이 있는지 나도 궁금하다. 그가 무소속으로 출마한다면 한국 진보세력엔 비극이다. 진보 지지 표를 분열시킬 테니까. 부동층의 마음을 얻지 못한 채 지지 세력만 이간질한다면 결국 지금 여당에만 좋은 일 시켜주는 셈 아니겠나. 이는 안 원장도 원치 않을 거다.”
-민주당 이해찬 대표는 지난달 말, 외신기자 회견에서 “민주당 후보가 최종 후보가 될 것”이라고 자신했다.
“이 대표로선 그리 말할 수밖에 없지 않았겠나. 그가 어떤 생각을 갖고 있든 공식적으로 할 수 있는 말은 자기 당 후보를 지지하는 내용밖엔 없다. 현재 민주당은 안 원장에게 적대적일 수밖에 없고, 그런 적대심은 민주당의 결속을 다질 최대의 무기다. 안 원장이 민주당을 어떻게 자기 편으로 만들어 나가느냐는 그의 정치력 시험대가 될 터다.”
“진정한 진보라면 북한 정권 비판해야”
-안 원장이 지난달 출간한 『안철수의 생각』을 평가해 본다면.
“심심하고 겸손하다. 그래서 영리하다. 출간 타이밍을 볼 때 이 책은 그의 출사표다. 책 제목도 상당한 고심의 결과일 수밖에 없다. 책 제목에서 그는 가치판단을 일부러 빼버렸다.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만, 여러분은 어떨지 궁금합니다’라고 말하는 인상을 준다. 내가 지금껏 경험한 한국의 문화에선 겸손해야 사람 마음을 얻는다. 그는 이 점을 아주 잘 이용하고 있다. 동시에 새누리당의 박근혜 후보와 차별화도 꾀하고 있다.”
-박 후보와 어떻게 차별화된다는 것인가.
“박 후보는 권위주의와 숙명적으로 이어져 있다. 아버지 박정희 전 대통령은 박 후보의 운명적 유산이다. 안 원장은 노골적으로 ‘난 권위주의 싫습니다’라고 말하는 대신, 책 제목을 통해 탈권위주의적 성향을 은연중에 드러내고 있다. 긍정의 언어로 자신만의 프레임을 짜고 있다. 박 후보 지지층은 안 박사의 책 제목에 대해 딱히 꼬집어 지적할 문제점은 없는데 괜히 거슬리니까 짜증이 날 거다. 박 후보를 거론하지 않으면서 박 후보와의 차별성을 꾀하는 영리한 전략이다.”
레이코프 교수는 드러내놓고 진보를 자처한다. 하지만 미국과 한국의 보수ㆍ진보 프레임을 등가로 놓고 비교하기엔 무리가 있을지 모른다. 북한의 존재감도 무시할 수 없다. 그는 ‘북한 변수’가 한국 정치에 미칠 영향을 어떻게 보고 있을까.
-미국의 보수ㆍ진보 개념을 한국에 그대로 적용하는 건 무리가 있지 않나.
“진보라는 개념의 정수는 만국 공통이다. 진보는 모든 종류의 부당한 억압에 반대한다. 진정한 진보라면 한국이라고 다를 수 없다. 단순히 말하면 보수는 ‘엄격한 아버지(strict father)’와 같다. 험한 세상에서 생존하기 위해 규율을 통해 스스로를 다스리고 성장시켜 자유를 쟁취하는 거다. 반대로 진보는 ‘자상한 부모(nurturant parents)’와 같다. 모두가 평등하다는 생각 아래 나만의 성장이 아닌 모두의 행복을 향해 노력하는 법을 가르치는 부모 말이다.”
-하지만 한국엔 ‘북한’이라는 특수성이 있다. 북한 인권 문제는 특히 한국 보수ㆍ진보 사이에서 뜨거운 감자다.
“자상한 부모라면 자기 자식을 다치게 하는 범죄자들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하겠나? 당연히 범죄자를 응징할 거다. ‘엄격한 아버지’인 보수와 달리 ‘자상한 부모’인 진보는 모든 종류의 억압에 반대한다. ‘북한’이라는 용어 자체도 문제다. 억압의 주체인 북한 정권과, 억압의 피해자인 북한 인민을 ‘북한’이라고 통틀어 하나로 지칭하기 때문에 혼란이 빚어진다. 국민을 탄압하고 있는 정권에 반대 목소리를 낼 수 있어야 진정한 진보다. 그렇지 않다면 진보 세력은 진보의 가치를 외면하며 스스로의 발목을 잡는 셈이다.”
-‘북한’이라는 용어에 문제가 있다면, 대안은 뭔가.
“북한 인민을 지칭할 때는 ‘북한(North Korea)’이 아닌 ‘또 하나의 한국(the other Korea)’이라는 식으로 동질감을 불러일으킬 단어를 만들어내야 한다. 한국 정서에 맞는 용어를 찾는 데 한국 진보세력이 창의성을 발휘해야 할 것이고, 일단 그 용어를 만들면 정착될 때까지 반복 사용해야 한다. 언어가 프레임을 만들고 프레임은 인간의 뇌 구조를 지배하기 때문이다. ‘북한 사람들’이라는 용어는 그들을 타자화시킨다. 21세기 정치에서 중요한 건 공감을 이끌어내는 능력이다.”
긍정의 스토리·언어로 부동층 잡아야
12월 대선을 앞두고 달아오르는 복지 확대 논쟁에 대해서도 물었다. 이에 앞서 4·11 총선에서 새누리당이 예상을 뒤엎고 승리한 결과부터 짚어봤다.
-4월 총선의 결과를 어떻게 보나.
“이 선거의 큰 화두가 ‘무상급식’이라고 알고 있다. 이 ‘무상급식’이라는 프레임부터가 보수에 유리하다. ‘무상급식’ 하면 (영어의) ‘공짜 점심은 없다’는 말이 떠오른다. (민주통합당이) ‘영양급식’이라는 용어를 쓰면 어땠을까. 비용과 대가를 지불하고 스스로의 자유와 성장을 쟁취하는 보수의 프레임이 아니라모든 아이들이 평등하게 누릴 건강을 위한 공익의 가치 프레임이 만들어졌을 테니까.”
-4·11 총선 전에 박 후보는 당명부터 바꿨다. 어떻게 평가하나.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당의 상징 색을 빨강으로 바꾼 것부터가 그렇다. 이 상징 색은 유권자들에게 자연스럽게 반복 노출되면서 무의식 속에 하나의 프레임으로 자리 잡는다. 인간은 이렇게 만들어진 프레임에 기반해서 생각하도록 프로그래밍돼 있다. 진보는 자꾸 정책으로 승부를 보려고 한다. 인간이 의식적으로 논리를 따지고 판단하는 경우는 약 2%에 불과하다. 17세기 르네 데카르트 식으로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건 21세기에선 이상향에 불과하다. 진보의 헛똑똑이들은 17세기에 살고 있는 셈이다. 역사적으로 레드콤플렉스가 있는 나라에서 보수세력의 대표가 빨간색으로 자신의 상징을 바꿨다는 건 포용력을 드러내고자 하는 포석이다.”
-대선을 앞두고 박 후보는 경제민주화와 복지정책을 강조하고 있는데.
“문제는 진정성이다. 박 후보가 복지를 이야기한다면 민주당으로선 그 정책을 얼마나 실행할 수 있느냐를 물고 늘어져야 한다. 오히려 ‘박 후보도 마침내 복지의 중요성에 눈을 떴다니 환영한다. 진정으로 복지를 생각한다면 민주당을 지지해야 할 거다’라는 식으로 맞받아쳐야 한다.”
-민주당의 유력 후보인 문재인 상임고문은 이달 초 “박근혜 후보의 복지는 가짜 복지”라고 공격했다.
“(새누리당의) 프레임에 말려들고 있다. 유권자에게 코끼리 생각을 못하게 하기 위해 ‘코끼리는 생각하지 말라’고 얘기하는 것과 같다. 유권자는 더 공감이 가는 그 누구에게 투표한다. 빈곤층 유권자가 부유한 보수정당의 후보에게 투표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어떤 후보든 긍정의 스토리와 언어로 부동층 유권자의 무의식을 장악하는 프레임을 짜내야 한다. 그게 선거 승리의 문을 여는 열쇠다.”
전수진 기자 sujiney@joongang.c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