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기/부모의 눈물로 울리는 웨딩마치

"허례허식, 인생에 毒이더라… 아들아 널 망치기 싫다"

화이트보스 2012. 10. 13. 09:44

"허례허식, 인생에 毒이더라… 아들아 널 망치기 싫다"

  • 김수혜 기자
  • 입력 : 2012.10.13 03:03 | 수정 : 2012.10.13 09:19

    [6부-<20> 자수성가한 중소기업인 정길웅씨, 12월 결혼하는 장남과 두 가지 약속]
    ①결혼식, 500만원 주겠다 우리 회사 강당에서 하자
    ②신혼집 보증금 1000만원 빌려주는 거니 꼭 갚아라
    '작은 결혼식' 하자는 내말에 사돈은 물론 부인까지 질색
    몇달간 설득해 '오케이' 받아… 딸·막내아들도 보고 배우길

    1987년 6월, 부산 출신 25세 동갑내기 신혼부부가 아들을 낳았다. 아기 아빠는 아직 학생이었다. 당장 분유값 댈 일이 막막했지만, 양가 모두 마냥 부모에게 기댈 형편이 못 됐다. 아기 아빠는 영남대를 중퇴하고 일거리를 찾아나섰다.

    처음 2~3년은 목공예로 먹고살았다. 그 뒤 장사를 해보기로 마음먹고 서울에 올라갔다. 유명한 족발집에 들어가 일을 배운 뒤 상계동에 자기 가게를 냈다. 부부가 온종일 고기를 삶고 썰었다. 칼질하다 피가 철철 나게 손을 베기도 했다. 그렇게 모은 돈을 밑천으로 1992년 경남 창원에 내려가 '교차로신문'을 냈다. 맨손으로 출발해 연 매출 300억원짜리 알짜 기업을 일군 정길웅(50) MK그룹 회장 얘기다.

    정 회장은 12일 "그동안 직원들에게 몇 번이나 '결혼식에 쓸데없이 돈 쓰지 말고 우리 회사 강당(100석)에서 하라'고 했는데 아무도 따르는 사람이 없어 내가 직접 '시범'을 보이기로 마음먹었다"면서 본지와 여성가족부가 펼치는 '1000명의 작은 결혼식 릴레이 약속'에 동참했다.

    그는 사돈을 설득해 오는 12월 장남(25)을 장가보낼 때 회사 강당에서 '작은 결혼식'을 올리기로 했다. 양가 친척과 신랑·신부 친구만 초대하고, 피로연 음식도 회사 구내식당에서 준비하기로 했다. 예식 시간을 오후 3~4시로 잡아, 식사 대신 국수와 떡만 간단히 차릴 계획이다. 예산은 500만원이다.

    정 회장은 또 아들 신혼집으로 회사 근처에 있는 보증금 1000만원에 월세 50만원짜리 원룸을 얻어주기로 했다. 아들은 MK그룹 계열사에서 연봉 3000만원을 받고 있다. 정 회장은 최근 아들과 예비 며느리(26·음악강사)를 불러 "너희가 어린 나이에 결혼하느라 저축이 부족할 테니 신혼집 보증금은 내주겠지만, 그냥 주는 게 아니라 빌려주는 거니까 월급 모아서 갚으라"고 했다.

    정 회장은 본지와 인터뷰에서 "지금은 사업이 안정됐지만 초기엔 말도 못하게 고생했다"고 말했다. 족발집 할 때 지하 단칸방에서 온 식구가 연탄가스 마시고 죽을 뻔한 적이 있다. MK그룹 창업 초기, 직원들 봉급 줄 돈이 모자라 부산으로 사채를 구하러 갔다. "돈을 못 구한 채 집으로 돌아오는데, 차(車)가 영도다리를 지나가니까 '고마 확 뛰내릴까' 생각이 절로 들었습니다. 처자식 얼굴이 아른거려 못 뛰어내리고 도로 차에 탔지요."

    회사 강당서 ‘작은 결혼식’ 내가 먼저 시범 12일 창원시 의창구 MK그룹 강당에서 이 회사 정길웅 회장이 “내 자식부터 ‘작은 결혼식’을 올리겠다”며 장남 우철씨와 새끼손가락을 걸고 있다. 우철씨는 오는 12월 지금 서 있는 강당에서 신랑이 된다./창원교차로신문 제공

    창업 초기 그는 한 주에 4만부를 찍었다. 지금은 주6일 하루 3만 부를 찍는다. 직원이 10여명에서 300여명으로 수십 배 늘고, 계열사도 여럿 생겼다.

    그는 "힘든 시기를 넘기고 나니, 처음엔 돈 버는 게 신이 나서 저도 막 까불었다"고 했다. 남들처럼 골프도 치고, 이런저런 단체에 이름도 걸었다. 창원 시내에 있는 대형 홀에서 화려하게 창업 10주년 기념식을 열었다. 늦둥이 차남(13)을 낳았을 땐 수백 명을 초청해 돌잔치를 치렀다.

    하지만 한 해 두 해 나이를 먹을수록 허례허식에 염증이 났다. 최근 창업 20주년 기념식 때 정 회장은 외부 인사를 일절 초청하지 않고 회사 구내식당에서 특식을 마련해 직원들을 배불리 먹였다. 요즘 그는 골프 대신 등산을 한다.

    "10년 전이었다면 저도 호화 결혼식을 치렀을지 모르겠네요. 하지만 나이 들수록 번잡한 게 싫어졌어요. 화려하게 꾸민 남들 결혼식장에 가도 '성대하다'는 생각은커녕, '신랑·신부 봉급이 얼만데 이렇게 헛돈을 쓰나' 싶더라고요."

    올 초 아들이 신붓감을 데려왔다. 작은 결혼식을 올리자는 정 회장의 말에, 사돈 내외는 물론 부인도 질색했다. 정 회장이 몇달 동안 끈기있게 설득해 '오케이'를 받았다. 불과 한 달쯤 전의 일이다. 그는 "다들 반대하니까 '혹시 내가 바보인가?' 싶었는데, 조선일보 기사가 큰 응원이 됐다"고 했다.

    "아들에게 '물려받을 생각 말고, 네가 스스로 클 생각을 하라'고 했어요. 공부도 시켜주고 사업도 가르쳐주겠지만, 집 사주고 호화 결혼식 시켜주는 건 아이를 오히려 망치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화려하게 출발하면 돈 무서운 줄 모르거든요."

    그는 딸(24·미국 유학 중)과 막내아들(13)도 작은 결혼식을 시킬 계획이다.

    '1000명의 작은 결혼식 릴레이 약속' 참여하려면 이메일 또는 전화를 통해 간단한 사연과 연락처를 보내주세요. 약속 증서를 댁으로 보내드립니다.

    ▲이메일 보낼 곳: life21@life21.or.kr ▲문의: (02)793-78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