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2.11.15 23:31
기존 순환 출자 의결권 제한은 私益 앞세우는 재벌 폐단 막아
시장경제의 투명성을 높이고 양극화 줄여 보려는 안간힘…
대기업을 법질서 아래 못 두면 '과거와 미래 대결' 구도 굳어져
- 윤평중 한신대 교수·정치철학
박근혜는 '신규 순환 출자만 금지하고 기존 순환 출자는 그대로 유지하자'는 입장이다. 경제 위기 상황에서 대기업 집단이 기존의 순환 출자를 해소하는 데 천문학적 비용을 들이는 게 맞지 않는다는 이유에서다. 그 돈을 신규 투자와 고용 창출에 쓰는 게 국가 경제를 위해 더 낫다는 것이다. 박근혜 캠프의 공약 기조가 경제 민주화 대신 성장에 대한 강조로 옮아가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경제정책을 선회함으로써 박근혜는 '집토끼 굳히기'에 들어갔다. 재계의 환영이 그 생생한 증거다. 그러나 박근혜와 재계는 이 지점에서 중대한 오류를 범하고 있다. 한국 사회의 업그레이드를 위해 필수적인 시장경제의 합리화를 거역하고 있는 셈이다. 경제 민주화가 18대 대선의 화두로 떠오른 배경을 돌아보면 박근혜의 행보는 전진이기는커녕 역진(逆進)에 가깝다.
시간을 두고 단계적으로 추진해야 하겠지만 '기존 순환 출자 의결권 제한'은 경제 민주화 가운데 핵심이다. 대기업 총수가 순환 출자를 이용해 실제 지분보다 훨씬 큰 의결권을 누리면서 회사 전체의 공익(公益)보다 자기 가문의 사익(私益)을 앞세우는 통폐를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김종인이 제안한 기업집단법과 중요 경제 범죄자의 국민참여재판 회부도 중요하다. 몇년 전 '삼성 사태'가 입증하듯 국가 기구를 '포획'해 '국가 안의 국가'로까지 커져버린 대기업 집단을 민주적 법질서의 통제 아래 두는 게 급선무다.
새누리당 쇄신파는 그동안 경제 민주화 방안을 제시하기 위해 노력한 바 있다. 이들은 경제 민주화 공약을 후퇴시키려는 박근혜에 대해 우려하면서도 대선이 코앞에 닥쳤다며 비판을 삼간다. 자멸(自滅)의 침묵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일련의 상황 전개는 12월의 대선을 '과거와 미래의 대결'로 굳히는 효과를 낳는다. 박근혜가 재벌을 주축으로 한 '선(先)성장 후(後)복지'의 박정희 패러다임으로 돌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 들어 가속화한 양극화와 민생고는 박정희 패러다임의 재현 불가능성을 증명할 뿐이다.
'재벌(財閥)'이라는 고유명사로 불릴 만큼 커졌으나 사회적 책임과 경영 윤리에는 소홀한 게 우리나라 대기업 집단의 민얼굴이다. 재벌이 오늘의 위치에 오른 데는 뛰어난 기업가 정신과 경영 능력이 있었다. 하지만 국가의 전폭적 지원과 국민의 전면적 희생을 빼고 재벌의 성공은 불가능했다. 대기업 집단 자신들만의 힘으로 오늘의 성취에 이르렀다는 주장은 한국 현대사의 객관적 사실(史實)에 어긋난다. 경영 성과는 재벌과 총수 일가가 독식(獨食)하는 데 반해 그 비용과 손실은 '사회화'해서 국민 전체가 나눠 부담하는 불공정과 특혜의 관행은 한국 경제의 오래된 풍경이다.
한국처럼 대기업의 약육강식과 승자 독식이 제도화된 나라는 드물다. 유사 봉건 세습 체제를 구축하고 있는 재벌의 선단(船團)식 경영과 총수의 무한권력에 반비례하는 무책임 경영 행태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국민경제에서 재벌이 차지하는 비율은 높아져만 간다. 이런 현실은 공정한 시장 질서를 왜곡할 뿐 아니라 민주공화정 자체를 위협할 지경에 이르렀다. 한마디로 '재벌공화국'이란 표현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김종인의 경제 민주화 방안은 시장경제의 투명성을 높이고 양극화를 줄여 대한민국 체제를 지키려는 합리적 보수의 안간힘이다. 지난 9월 전직 경제 장관 13명이 "시장경제체제 수호 차원에서 대기업이 양극화 해소에 앞장서야 한다"고 요청한 것과 같은 문맥이다. 최소한의 보수적 개혁조차 거부하는 기득권 집단이 과연 무얼 '보수'하며, 어떻게 나라의 미래를 말하겠는가.
지난 4월 총선에서 박근혜는 미래로 치고 나가 승리했다. 이랬던 박근혜가 대선에서는 경제 민주화를 후퇴시켜 압축 성장 시대의 과거에 속한 자신의 민낯을 드러내려 한다. 그 결과 보수 필패(必敗)·진보 필승(必勝)인 '과거와 미래의 대결' 구도가 만들어진다. 여기서 합리적 보수의 선택은 자명하다. 박근혜가 역사 앞에 떳떳하게 대선에서 이길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경제 민주화 공약을 온전히 지키는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