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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派獨 광부·간호사 50년 - 그 시절을 다음 세대에게 바친다]

화이트보스 2013. 2. 7. 10:46

[派獨 광부·간호사 50년 - 그 시절을 다음 세대에게 바친다]
[10] 권광수 前 청주대 교수의 고백
-"광부였던 아버지가 싫었다"
가난 이기려 택한 獨 탄광길 죽어라 공부해 박사 됐지만…
'광부'라는 낙인 지우고 싶었다… 사진 다 없애고 이력서에도 빼
-"광부 2代, 자랑스럽다"
어릴때 지긋지긋했던 석탄가루 이것이 가족을, 또 나를 살렸다
파독광부 사실 털어놓으니 마음에 감사함과 평안이…

1970년 파독 광부로 독일에 갔던 권광수(70)씨는 최근까지도 자신이 파독 광부였다는 사실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당시 사진도 모두 없애 버렸다. 광부 월급봉투와 당시 가족들과 주고받은 편지도 남아 있지 않다. 독일 공학박사 출신으로 한국 정부의 해외 학자 초빙에 응해 국책 연구기관(한국지질자원연구원)과 대학(청주대)에서 경력을 쌓은 자신에게서 광부라는 '낙인'을 지우고 싶었다.

권씨의 아버지도 광부였다. 권씨의 기억 속에서 아버지는 무능한 사람이었다. 아버지는 경북 문경에 있는 탄광에서 석탄을 캤다. 저녁이 되면 이까지 새까매져 돌아왔다. 어머니는 빠듯한 살림에 보태겠다고 시골 구멍가게에서 밤늦도록 일했다. 9남매의 장남인 권씨는 작은 방에서 동생들을 돌보며 밤늦도록 어머니를 기다렸다. 그는 "동생들을 돌보면서 '아버지처럼은 되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그러려면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권씨는 바라던 대학(한양대 자원공학)에 들어갔다. 졸업 후엔 고등학교 교사로 교단에 섰다. 그토록 원하던 '아버지보다 나은 삶'을 살게 됐다고 생각했다.

경북 상주에서 광부의 아들로 태어난 권광수씨는 27세 때인 1970년 12월부터 독일 탄광에서 3년간 일했다. 권씨는 “아버지처럼 살기 싫었지만 돌이켜보니 파독 광부 경험이 지금의 나와 나라를 일으켜세우고 아버지에게 감사하는 마음도 갖게 했다”고 말했다. /이태경 기자
아버지와는 다른 삶을 시작했지만 교단에 선 지 3년이 되도록 그의 가난한 살림은 나아지지 않았다. 권씨는 부모와 동생들 열 식구를 부양하는 가장이었다. 중학교와 고등학교에 다니는 두 동생은 아예 서울로 와서 권씨의 자취방에서 지냈다. 당시 권씨 나이 스물일곱, 결혼도 하고 싶었지만 월급 3만5000원을 고향에 보내고 나면 연애는 꿈도 못 꿨다. 서울에 간 장남만 바라보는 가족들, 쳇바퀴 같은 삶이었다. 다른 돌파구가 필요했다.

'파독 광부 모집.' 여느 때처럼 출근 준비를 하다가 본 구인광고였다. 그렇게 혐오하던 아버지의 직업이었는데 눈이 번쩍했다. 그것도 머나먼 이국 땅에서 해야 하는 일이었지만 마음이 흔들렸다. 그는 "파독 광부의 보수가 교사 월급의 5배였다. 지긋지긋한 가난과 책임감에서 벗어나고 싶었다"고 했다.

1970년 12월 권씨는 독일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 딘스라켄 광산 기술부에서 일하게 됐다. 광부들이 작업을 마치고 철수하면 낮 동안 사용한 채굴기를 점검하고 손보는 일이었다. 밤 10시부터 아무도 없는 지하 1000m 막장에 혼자 남아 동틀 때까지 기계를 점검했다. 새벽 6시쯤 기숙사에 돌아와 땀과 석탄가루로 범벅된 자신의 모습을 거울에 비춰보며 여러 번 눈물을 삼켰다. 월급 1200마르크(당시 약 18만원)의 대부분을 한국에 있는 가족들에게 보냈다. 권씨는 "맥주 한잔 마실 돈도 남기지 않았다"고 했다.

독일 탄광 갱도에서 작업 중인 광부들 모습. 각종 도구와 기계를 사용해야 하는 작업 환경은 항상 위험이 뒤따랐다. /파독광부간호사간호조무사연합회 제공
생사의 고비도 몇 차례 넘겼다. 하루는 작동 중인 컨베이어 벨트에 몸을 기댔다가 석탄 파쇄기에 빨려 들어갈 뻔했다.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지만 석탄 파편이 튀면서 볼에 깊은 상처를 입었다. 응급실에서 대충 꿰맨 실밥을 며칠 뒤 다시 풀고 피부를 벌려 석탄가루를 긁어냈다. 눈앞에서 동료의 손가락이 잘리거나 작업 도중 쏟아진 암반에 깔려 죽는 모습을 보게 된 날은 몸이 힘든 것보다 마음이 더 괴로웠다.

대학을 나오고 교사로 근무했던 그에게 힘든 나날을 잊게 해주는 유일한 위안은 책이었다. 광부 계약 기간 동안 부지런히 공부했다. 서툴었던 독일어는 아침에 퇴근해 쪽잠을 자고 동네 공원에 나가 한 손엔 한독(韓獨)사전을 쥐고 길거리에서 만나는 낯선 이들에게 말을 붙이며 익혔다. 어느새 동료의 애로사항을 회사에 전달할 수 있을 만큼 독일어 실력이 늘었다.

계약 기간 3년이 끝나고 그는 아헨대에서 자원 암석역학을 공부했다. 파독 간호사와 만나 결혼도 했다. 독일 생활 10년째 되던 해 박사학위를 받았고, 한국을 떠난 지 14년 만에 해외에 거주하는 유능한 교포들을 불러들이는 유치과학자 신분으로 그야말로 금의환향했다.

권씨는 그동안 연구기관이나 대학에 이력서를 낼 때 파독 광부 경력은 쓰지 않았다. 그는 "광부인 아버지를 부끄러워했던 것처럼 나 자신도 광부 출신이라는 게 부끄러웠다"고 했다. 권씨는 지난 2007년 파독 광부였다는 사실을 주위에 털어놓고 그해 청주대를 정년퇴임했다. 그는 "손가락질하면 어쩌나 싶었는데 동료들이 놀라워하면서 격려하더라"고 했다. "그때 광부 이력을 털어놓고 나니 평생 나를 괴롭혔던 '광부 트라우마'도 사라졌고 아버지도 달리 보였다"고도 했다.

권씨는 "아버지는 광부 일을 하며 나와 형제들을 낳고 키우셨다. 나 역시 파독 광부로 일했기 때문에 지금의 내가 있는 것"이라며, "돌이켜보니 아버지가 자랑스럽고, 나도 자랑스럽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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