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사회문화/사회 , 경제

IMF 시련딛고 한국 언론사에 한 획 그은 남도일보

화이트보스 2013. 5. 10. 17:59

IMF 시련딛고 한국 언론사에 한 획 그은 남도일보'언론 홍수시대'속 정론·직필로 호남대표지로 우뚝

남도일보  |  webmaster@namdonews.com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승인 2013.05.10  00:45:51
트위터 페이스북 미투데이 요즘 네이버 구글 msn

광주타임스로 출발 2005년 남도일보로 제 2창간  
명칼럼, 주제의식 뛰어난 각종 시리즈로 인기몰이
'언론 홍수시대'속 정론·직필로 호남대표지로 우뚝


   
▲ ①옛 광주타임스 사옥
남도일보가 10일로 창사 16주년을 맞았다. 남도일보는 지난 1998년 5월 10일 창간된 광주타임스를 전신(前身)으로 하고 있다. 1997년 출범한 광주타임스는 전국 최초의 구독료 없는 무료 일간지였다. 한국 언론 100년 사에 새 장(章)을 열었다. 풍부한 읽을거리와 다양한 생활정보를 제공하며 창간과 동시에 선풍적인 인기를 모았다. 날선 비판기사와 유익한 정보가 가득한 광주타임스는 독자들로부터 대단한 사랑을 받았다.

광주타임스는 타블로이드 판형으로 매일 80면이 제작됐다. 광주·전남지역에 8만여 부가 배포돼 시민들은 길거리 어느 곳에서도 쉽게 광주타임스를 손에 쥘 수 있었다. 당시 광주타임스는 광주·전남지역의 새벽을 여는 신문이었다. 40여명의 본사 편집국 취재기자와 30여명의 지역기자들이 밤새 취재했던 생생한 사건·사고 기사와 뒷이야기들이 가득 실려 있었다. 출근길의 시민들은 광주타임스와 함께 하루를 시작했고 실린 기사들은 아침마다 시중의 화제가 됐다.

지역현안에 대한 정확한 분석기사와 대안 제시는 독자들의 이해의 폭을 넓혔다. 생활중심의 다양한 기사는 독자들의 생활을 풍요롭게 했다. 파격적인 편집과 사진게재 또한 시선을 붙잡았다. 44개면에 걸쳐 실렸던 부동산과 자동차·구인구직 정보는 시민들의 편의를 높였다. 독자들은 광주타임스의 거침없고 신선한 제작과 편집, 생활정보 제공에 환호했으며 독자들의 뜨거운 관심과 사랑은 광주타임스를 호남을 대표하는 언론으로 우뚝 서게 했다.

신문제작의 한 획을 그은 광주타임스

광주타임스 편집국 구성원들은 광주·전남 언론계에서 명성을 높이던 중견 언론인과 일선 취재·사진기자, 편집기자들로 꾸려졌다. 수습기자들 역시 치열한 경쟁률을 뚫고 합격한 인재들이었다. 발로 뛰는 기사, 비판하되 공정함을 잃지 않은 기사. 스토리 중심의 기사가 당시 편집국 데스크들의 주문사항이었다. 면을 채우는 기사가 아닌, 시선을 끌어당기는 기사들이 매일처럼 넘쳐났다.

정치면은 서울 중앙정치 중심의 기사보도 패턴을 벗어나 지역 정가의 속사정을 자세히 전하는 흥미 넘치는 기사들로 가득 채워졌다. 행정기관의 주요 정책·사업 현장을 헤집으면서 잘잘못을 전하는 기사들은 독자들의 마음을 시원하게 했다. 골목을 누비면서 발로 쓰던 생생한 사회면 기사들은 단연 압권이었다. 권역별로 1개 면을 할애해 모두 9개면이 제작됐던 지역뉴스는 독자들의 고향소식 궁금증과 현지주민들의 뉴스욕구를 충분히 충족시켰다.

   
▲ ②창간호 소식지 발간
다양한 칼럼진들은 전문지식과 지혜를 담은 각종 명칼럼으로 독자들을 기쁘게 했다. 12면을 컬러판으로 제작, 독자들의 눈을 즐겁게 했다. 이슈에 대한 심층취재 및 뉴스의 중심에 서 있던 인사들에 대한 와이드 인터뷰는 열독성(熱讀性)을 높였다. 과감한 편집과 촌철살인 격의 제목은 독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속 시원한 기사, 생생한 기사, 깊이 있는 분석기사, 파격적이면서도 신선한 편집은 신문제작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6·25 당시 중공군 파병 요청 확인   
김일성·모택동 친필서신 특종보도

광주타임스는 광주광역시 동구 동명동 230-1 번지의 임시사옥에 터를 잡고 출범했다. 그러나 사옥과 주차장이 협소해 사원들과 내방객들의 불편이 컸다. 이런 이유로 창간 이후 1년 뒤인 1989년 10월 광주 서구 사동 84-6번지에 새 사옥을 마련해 이전했다. 이와 함께 판형도 타블로이드 판에서 스탠다드판(대판)으로 바꾸었다.

광주타임스는 주요 관공서를 제외하고는 시가지 곳곳에 비치함을 설치해 독자들이 찾아와 가져가는 배포시스템을 운영했다. 그러나 무료라는 점이 한국기자협회 가입을 어렵게 했다. 언론기관으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하기 위해서는 기자협회와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의 가입이 불가피했다. 이런 이유로 무료에서 유료로 전환할 수밖에 없었고 유료일간지 판형에 익숙한 독자들을 위해 판형 역시 바꾸게 됐다.

광주타임스는 전남 곡성에 자체윤전기 시설을 갖추고 신문을 발행했다. 따라서 야간 늦게까지 개판이 가능했고 독자들은 밤늦게 벌어진 사건·사고의 내용을 이른 아침에도 자세히 알 수 있었다.

특히 광주타임스 시절인 2000년 6월 24일자로 중국 단동 현재 취재결과 6·25당시 중공군 파병 요청을 확인해준 ‘김일성·박헌영과 모택동의 친필서신’을 특종 보도하기도 했다.

독자들의 폭과 계층이 넓어질수록 호남을 상징할 수 있는 신문사 명칭사용이 필요하다는 판단에 따라 지난 2005년 창사 8주년을 기해 ‘남도일보’로 이름을 바꾸고 제2의 창간을 선언했다. 2011년 광주 서구 쌍촌동 891-20 현재의 사옥으로 이전했다.  
 

 삶의 깊이와 지혜를 더해주는 고정 칼럼들 


영문학자이자 시인인 범대순 前 전남대 교수(83)는 지난 1998년 10월 15일자부터 지금까지 15년 동안 매주 ‘범대순의 세상보기’라는 고정칼럼을 남도일보에 게재하고 있다. 범 전 교수는 깊이 있고 풍부한 학식과 경험이 녹아있는 칼럼을 통해 독자들과 후배들에게 세상을 새롭게 보는 시각과 삶에 대한 성찰과 지혜를 제공하고 있다.

‘범대순의 세상보기’는 지역 일간지 사상 최고령의 칼럼니스트가 최장기간에 걸쳐 연재하고 있는 고정칼럼이다. 세계 석학들의 사상과 교류에 대한 소개, 산행을 비롯해 소소한 일상에서 깨닫는 희노애락을 유려하고 세련된 문체로 풀어내고 있어 독자들로부터 뜨거운 사랑을 받고 있다. 범 전 교수가 15년 동안 단 한주도 거르지 않고 독자들에게 내놓고 있는 ‘범대순의 세상보기’는 남도일보의 대표적인 칼럼이자 자랑거리이다.

목포대 형광석 교수가 주 필진인 남도시론 또한 국내외 현안에 대한 날카로운 분석과 대안제시로 두터운 독자층을 확보하고 있다. 형 교수를 비롯한 사회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깊이 있고 균형 있는 시각으로 개성 넘치는 글들을 독자들에게 선사하고 있다. 남도일보 논설위원과 국장급 기자들이 필진으로 있는 ‘무등을 바라보며’ 고정 칼럼도 인기를 모으고 있다. 

지역발전과 문화 발전을 이끈 기획물들

광주타임스에 게재됐던 백두대간은 본사 편집국 소속의 베테랑 산악인이 2년여에 걸쳐 백두대간을 종주하면서 발로 써낸 기행문이었다. 지난 2009년 5월부터 남도일보에 실렸던 명산기행과 함께 등산애호가들로부터 대단한 호평을 받았다. 우리 국토와 명산에 대한 사랑이 듬뿍 담겨져 있다. 이 시리즈를 통해 많은 이들이 전국의 명산을 새롭게 이해하는 계기가 됐다.

창사 12주년인 2009년부터 연재된 소호명가(所湖名家)는 광주·전남 지역경제 활성화를 위해 기획됐다. 소호명가는 광주은행이 이 지역에 위치해 있거나 이 지역출신이 운영하는 명가 명장을 발굴해 차별화된 서비스를 제공하는 종합금융서비스의 이름이기도 했다. 전통성 등을 바탕으로 뛰어난 영업력을 발휘하고 있는 유망기업에 대한 자세한 소개를 통해 지역기업의 인지도를 높이는데 크게 기여했다는 평가이다. ‘맛있는 집 소문난 집’과 ‘맛 집 기행’ 같은 유명음식점 소개 기획물도 독자들로부터 뜨거운 반응을 얻었다.

장기시리즈로 게재됐던, 성공 농업인을 소개하는 억대부농 시리즈와 신 농업경영 소개도 농촌경제 회생에 큰 도움을 주었다. 이 지역 동호회에 대한 소개와 활동상을 실은 동호회 탐방도 인기를 모았던 시리즈였다. 김선기 전 논설위원이 광주·전남지역 정자탐방을 통해 호남의 선비사상과 애국충절의 역사적 배경을 유려한 문체로 풀어낸 ‘정자기행’도 대단한 호응을 받았다.

지난 3월 59회를 끝으로 대단원의 막을 내린 고구려유적답사기행도 우리 역사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고 있다. 중국의 동북공정에 맞서 고구려 역사를 지키기 위한 취지로 연재가 결정됐으며 요동 일대에 대한 고구려 유적지에 대한 상세한 기록이 담겨져 있어 뜻있는 독자들과 사학자들로부터 깊은 관심을 모았다.

생활의 기쁨을 크게 한 남도일보 주최행사들 

   
▲ ③심양서커스단 공연
광주타임스가 창간 다음 해인 1999년 심양서커스단을 초청해 펼쳤던 서커스공연은 폭발적인 인기를 모았다. 당시만 하더라도 국제적인 공연이 거의 열리지 않았던 관계로 심양서커스 공연이 열렸던 염주체육관에는 수만 명의 관람객들이 몰렸고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기예와 수준 높은 공연에 찬사가 쏟아졌다.

거듭되는 요청에 저소득층과 장애우들을 초청해 재공연을 하기도 했다. 심양서커스단 공연이 큰 인기를 끌자 광주타임스는 부산·울산·성남시 순회공연을 기획·추진했고 이들 공연은 대단한 호평을 받았다.  

   
▲ ④광주타임스배 축구
   
▲ ⑤남도일보 축구대회
광주타임스배 골프대회와 축구대회가 성황리에 개최되기도 했다. 제주도와 동남아시아 일대 유명 컨트리클럽에서 개최된 골프대회에는 이 지역의 많은 골퍼들이 참가해 실력을 겨뤘다. 축구대회 역시 축구인구 저변확대에 기여했다.  

2011년과 2012년에는 세계 40개국 1천500여 명의 대학생이 참여하는 ‘IYF 월드캠프(World Camp)’도 적극 후원했다. 세계 각국의 청소년부 장·차관들이 참석하는 만큼 2015유니버시아드대회 홍보에 좋은 기회여서 행사를 적극 지원했다. 청소년들의 비전을 위해 남도비전스쿨을 개설해 청소년들이 미래에 대한 의지와 계획을 세울 수 있도록 도움을 주기도 했다.
 

광주·전남 언론발전에 크게 기여한 남도일보


   
▲ ⑥임직원 춘계워크샵
남도일보는 지역 언론인 육성에 크게 기여했다. 1998년 광주타임스 창간당시 입사한 수습 1기 기자 5명을 포함해 지금까지 남도일보를 통해 언론계에 입문한 인력은 80여명에 달한다. 남도일보 창간 직후 국내는 IMF에 따른 여파로 극심한 경제난을 겪고 있었다. 따라서 광주·전남 언론사들은 상당기간 수습기자채용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남도일보는 1998년 이후 매년 3~5명의 수습기자를 채용해 유능한 인재로 키워나갔다. 수습 6개월 동안 현장 취재요령과 기사작성 교육이 쉴 틈 없이 계속됐다. IMF직후 5년 동안 광주·전남지역에서 배출된 수습기자들은 대부분 남도일보사 출신이다. 이들 기자들은 현재 광주·전남 지역의 언론사 곳곳에서 중견언론인으로 활약하고 있다.

   
▲ ⑦백두대간 종주
   
▲ ⑧고구려 숨결을 찾아서
남도일보는 창간 이듬해인 1999년 8월 중국 요녕성 심양시에 있는 심양일보와 자매 결연을 맺었다. 심양일보는 인구가 1천만명을 넘는 심양시의 최대 언론매체로 이 자매결연은 본보의 지면을 더욱 풍성하게 만들어주었다. 중국 관련 소식들이 다양하게 소개돼 한·중 문화교류의 폭을 깊게 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창사 10주년을 전후로 해서는 인터넷 남도일보(www.namdonews.com)가 운영되기 시작했다. 지난 2012년 10월부터는 광주·전남지역 일간지 최초로 모바일 서비스를 개시했다. 실시간으로 각종 주요 뉴스를 전달하는 모바일서비스로 애독자들의 뉴스 접근성이 더욱 향상됐다. 남도일보는 뉴스와 여론의 쌍방향 소통을 넓히기 위해 모바일운영체계에 대한 개선과 확대를 준비 중이다.

   
▲ ⑧현 남도일보 사옥

< 저작권자 © 남도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