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3.07.29 03:00
“첫번째 침투 공작 땐 ‘공화국 영웅’… 두번째는 왼쪽 다리 총상 입고 체포돼”
“노무현 때 ‘중부지역당’ 재조사후 '국정원이 용공조작한 사건' 주장 이 사건, 내가 살아있는 증인”
부부공작원을 접촉한 운동권 J씨 이들을 ‘안기부 기관원’으로 오인 안기부 골탕먹이려 "간첩" 신고
남파 공작원 김동식(50)은 어디에 내놔도 그의 전력(前歷)을 짐작할 사람들이 없을 것 같았다. 눈에 익은 정치인, 연예인 누구와 닮아 보이기도 했다.
그가 내민 명함에는 ‘곽××’로 되어 있었다. 가명(假名)이다. 바깥세상에 알려진 ‘김동식’도 가명이다.
―내가 어떻게 불러야 하나?
"김 선생이라 해도 되고, 곽 선생이라 해도 된다. 내 본관은 현풍 곽씨다."
그는 자신의 젊은 날 역정을 담은 ‘아무도 나를 신고하지 않았다’는 제목의 책을 냈다. 1990년과 1995년, 그는 두 차례 침투했다. 첫 번째 공작에는 성공해 ‘공화국 영웅’ 칭호를 받았고, 다시 침투했을 때는 왼쪽 다리에 총상을 입고 체포됐다.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얘기여서, 나는 가급적 ‘팩트’ 위주로 질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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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동식씨는“공작원들은 접선 및 장비 은닉 장소로 묘지를 많이 썼다”고 말했다. 그는 얼굴 노출을 꺼렸다. /허영한 기자
"나흘 만에 제주도 남단에 도착한 뒤 반잠수정으로 옮겨 탔다. 해안선을 1㎞쯤 앞두고는 잠수해서 자정쯤 서귀포 보목동 해안에 상륙했다. 동행한 안내조에게 잠수복을 넘겨주고 헤어졌다."
―야간에 서귀포 KAL호텔을 향해 걸어가 근처 ‘묘지’ 주위에 단파 무전기 두 대, 벨기에산 브라우닝 권총 두 정과 실탄, 수류탄 4발, 야간 투시경 1개, 다른 공작조에게 넘겨줄 5만달러 등을 묻었다. 당신의 다른 행적에서도 ‘묘지’가 많이 등장한다.
"산속에는 특징적인 기준점이 없어 공작원들은 접선 및 장비 은닉 장소로 묘지를 많이 썼다. 내가 잡히면서 이런 사실이 알려졌다. 그 뒤에 잡힌 공작원들은 그렇게 안 했다. ‘저쪽에서 감시하고 있으니 묘를 쓰지 마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한다."
―당신 이후에 다른 공작원이 잡혔다는 뜻인데?
"1997년 울산에서 ‘부부 공작원’이 잡혔다. 여자는 자살하고, 남자는 살아 있다."
―부부 공작원은 당신 제보로 검거됐나?
"그건 아니다. 이들은 울산에서 활동하던 운동권 인사 J씨를 포섭하려고 만났다. J씨는 ‘북에서 내려왔다’는 이들을 ‘기관원’으로 오인했다. 소위 안기부가 ‘프락치 공작’을 하는 걸로 판단했다. 그래서 안기부를 골탕 먹이려고 ‘내게 간첩이 찾아왔다’고 신고해버린 것이다. 이들은 그런 사실을 모르고 J씨와 다시 만나기로 한 약속 장소에서 붙잡혔다."
―당신도 서울 시내의 한 커피숍에서 학생운동권 출신 L씨(현 국회의원)를 만나 포섭하려고 했을 때 그에게 ‘기관원’으로 몰린 적이 있지 않은가?
“당시 L씨는 그대로 나가버려 다시 접촉할 수 없었다. 내가 ‘북한에서 온 당 연락대표’라고 밝혔을 때 이렇게 나온 사람은 L씨뿐이었다. 나머지는 모두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그래서 ‘아무도 당신을 신고하지 않았다’는 책 제목이 나온 것인가?
"1990년대에는 운동권 내부의 헤게모니를 잡기 위해 북한과 연계를 해야 한다는 분위기가 있었다. 자기들끼리 암암리에 ‘너희는 라인이 있나?’하고 물었으니까. 입당(入黨) 제의를 하면 말 못 할 사정이 있어 못했을 뿐, 본인이 싫어서 안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첫 침투에서 4개월 20일간 체류했다. 일상에서 어떤 점을 가장 의식했나?
"서귀포에 침투한 뒤 처음 택시를 탔을 때다. 운전사에게 ‘동명백화점까지 갑시다’ 했는데, 그렇게 말을 걸기 전까지 온갖 생각이 다 들었다. 비록 ‘적구화 교육(敵區化·남한의 말과 생활 등을 배우는 것)’은 받았으나 실제 남한에서 대화를 해본 적이 없었다. 그러니 ‘과연 말이 통할까’ 입속이 탔던 것이다."
―한국말이 외국어 배우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것 같다고 쓰여 있던데, 억양 때문인가?
"억양보다 입에 밴 북한 방언 때문에 힘들었다. ‘이자 왔어?(지금 왔어)’ ‘섟갈린다(헷갈린다)’ ‘인차 와(빨리 와)’ 같은 북한에서 많이 쓰는 방언들이 부지불식 튀어나와 아차 할 때가 많았다. 한국말에 섞인 ‘외래어’도 알아듣기 힘들었다."
―공작금으로 1만달러와 다른 공작조에 넘겨줄 5만달러를 들고 왔다. 우리 지폐가 아닌 달러로 들고 오는 이유가 있나?
"지도부에서 설명은 안 해주는데, 지폐 부피 때문에 그럴 것이다. 5만달러를 우리 화폐로 하면 한 배낭이 된다. 남대문 시장에서 어떻게 환전해야 하는지 교육받고 들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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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6년 법정 출두 장면.
"일본을 통해 영주권을 얻어 합법적으로 잠입했으니, 북한 대남 공작에서는 상징적인 존재였다. 하지만 그는 고등교육을 받지도 않았고 당시 75세 노인이었다. 우리가 얘기해줘도 포섭 대상에게 제대로 전달도 못했다."
―남한에서 이선실은 권력 서열 22위로서 어떤 핵심 역할을 했나?
"권력 서열과 실질적인 역할은 상관없다. 이선실은 민한당과 민가협, 민중당에 들락날락하면서 관계를 구축하는 임무가 주어졌다. 친북 인사들을 점찍어두는 것이다. 자신의 신분을 노출하지 않은 채 장기 잠복했다. 하지만 1987년쯤 대남 전술이 ‘적극적인 포섭’으로 바뀌었다. 우리보다 먼저 1개 공작조가 이선실을 만나러 내려왔다. 공작조가 ‘그동안 찍어둔 인사들을 입당시키라는 지령이 내려왔다. 접촉해 포섭하라는 지령이 내려왔다’고 전했을 때, 이선실은 ‘김일성에게 직접 그런 말을 듣지 못했고 나는 준비되지 않았다’며 펄쩍 뛰었다."
―고정간첩의 정보 수집 활동에 의문이 간다. 우리 같은 열린 사회에서는 고급 기밀이 아닌 웬만한 정보는 인터넷이나 매스컴을 통해 다 공개돼 있다.
"인터넷으로는 누굴 포섭하거나 조직을 만들지는 못한다. 고첩의 역할은 사람들과관계를 맺는 데 있다. 정보는 그 기관에 있는 사람을 포섭하면 얻게 되지, 우리가 어디 가서 정보를 수집하겠나."
―고정간첩을 오래 하다 보면 남한 생활에 젖어 북한과 연락을 끊는 경우는 없는가?
"구체적인 사례는 모르지만, 사실 그럴 경우 마이크로 칩을 일일이 단 것도 아니고 북에서 찾을 방법이 없다. ‘행불(行不)’이 되는 것이다. 북에서 그런 행불된 간첩의 가족을 봤다. 북 입장에서는 판단할 수가 없어 난처하다. 영웅적 행위로 평가 내릴 수도, 배신자 가족으로 처벌할 수도 없으니 말이다."
첫 침투에서 그는 이선실과 H씨(1980년 사북 사태 주동자)를 대동해 복귀하는 임무를 받았다. 복귀 접선 장소는 강화도 해안이었다. 1990년 10월 17일, 그는 아침과 저녁 시간에 평양방송에서 ‘내 고향’이라는 노래가 흘러나오는지 확인했다.
"만약 그 노래가 나오면 접선할 수 없다는 신호가 된다. 그날 밤 11시쯤 북에서 내려온 안내조와 묘지에서 접선했다. 그 전에 서로 돌멩이를 두들기는 걸로 신호를 주고받고는 암호를 대 확인했다."
이들은 공작선을 타고 황해도 해주로 올라갔다. H씨는 노동당 입당과 무전기 사용, 암호 해독 등을 배우고 일주일 뒤 같은 루트로 내려왔다. 당시 그에게 “남조선 혁명가들과 인민들에게 신심과 용기를 줄 수 있게 친애하는 김정일 동지께서 배를 타고 인천을 통해 서울을 다녀갔다는 소문을 퍼뜨려라”는 북의 지시가 떨어졌다. 이선실은 2000년 북에서 사망했다.
―우리 정보 당국에서는 이선실이 북으로 복귀하고 난 뒤에야 그 존재를 알게 됐다. 함께 입북했던 H씨가 연루된 ‘조선노동당 중부지역당 사건’(1992년)이 터지면서였다.
"나도 북에서 ‘노동신문’을 보고 알았다. 노동신문에는 ‘남조선 정부의 조작’이라고 보도됐다. 내가 포섭 공작을 했던 인물인데 황당했다. 당시 나는 공작 부서에서 ‘누구는 목숨 걸고 해놓았는데 이런 식으로 다 망쳐놓느냐’고 소리친 적이 있었다."
―망쳐놓았다니, 그 사건의 전모가 드러난 게 공작 부서와 무슨 상관이 있었나?
"이런 정보를 아는 공작 부서 요원이 남으로 넘어갔고, 거기서 추적이 시작된 걸로 안다. 이를 ‘중부지역당 사건’이라고 발표했지만, 사실은 별도의 3개 간첩 조직이 섞인 것이다. 수사 과정에서 운(運)도 좋았던 것 같다. S씨는 경기도에 있는 자신의 비닐하우스에 파묻어둔 무전기를 꺼내 치려다가 현장에서 붙잡혔다고 한다."
―당시 수사 발표가 대선 기간과 맞물렸다. 재야에서는 ‘평화적 민족 통일에 몸바친 양심수 석방 운동’도 전개했다.
"중요한 간첩 사건이었지만 선거로 인해 조용히 덮였던 셈이다."
―주범들은 1998년 모두 사면됐다. 그 뒤 노무현 정부 시절 ‘중부지역당 사건이 조작됐다’며 국정원 과거사 진상규명위원회에서 이를 재조사했다.
"내게도 조사관들이 찾아왔다. KAL기 폭파 사건의 증인이 김현희였다면, 이 사건에는 내가 살아 있는 증인이 됐다."
―1995년 10월 당신은 공작조장이 돼서 제주도 온평리 해안으로 다시 침투했다.
"1차 침투에서 이선실을 복귀시킨 공로로 ‘공화국 영웅’ 칭호를 받았다. 그러자 ‘젊은 놈이 영웅 칭호를 받더니 출세 생각만 한다. 사상이 변질됐다’는 등 별 험담을 다 들었다. 그래서 간부에게 ‘내가 증명해 보일 방법은 다시 나갔다 오는 것밖에 없다’고 했다. 승려로 위장한 고정간첩 ‘봉화 1호’를 복귀시키고 다른 인사들을 포섭하는 게 임무였다."
―‘봉화 1호’와 접선하려는 과정에서 붙잡혔다. 그가 이미 전향한 줄 몰랐나?
"1980년 봄에 남파된 그가 이미 가을에 체포됐던 걸 몰랐다. 그해 겨울에 그가‘나를 북으로 데려가 달라’는 무전을 쳐 공작선이 내려갔다. 그 공작선은 난파됐다. 그에 대한 의심은 있었지만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북 입장에서는 15년 동안 농락당한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그를 복귀시키라는 임무가 내게 주어진 것이다."
그는 ‘봉화 1호’와 접선을 시도하려고 충남 부여의 한 사찰로 찾아갔다가 노출됐다. 이미 정보기관과 경찰이 잠복하고 있었다. 그는 왼쪽 다리에 한 발 맞아 쓰러졌고, 그의 조원은 숨졌다.
―그 뒤 ‘봉화 1호’와 만난 적 있나?
"그쪽에서 두세 번 만나자는 연락이 왔는데, 내가 감당이 안 되겠더라. 당시 쫓기는 상황에서 그에 대한 배신감과 분노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이념을 떠나 내 조원이 죽었으니…."
―잡히지 않고 북한에 올라갔을 때의 삶과 비교해봤나?
"나도 인간인데 비교를 안 해봤겠나. 여기서는 평범한 시민으로 살고 있다. 북한으로 돌아갔으면 과장급(정부 실국장)쯤 됐겠지. 그래 봐야 대단할 게 없다. 실상을 너무 잘 알기 때문에 아마 북한에 갔어도 해외로 돈벌이를 나갔을 것이다."
그는 최근 ‘북한의 대남혁명전략 실체’로 북한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류길재 통일장관이 지도교수였다. 그의 두 아들은 아버지 과거에 대해 아직 모르고 있다.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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