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사의 재발견/민족사의 재발견

마의태자는 과연 삼베옷을 걸치고 금강산으로 갔는가?| 우리들이야기

화이트보스 2013. 8. 3. 16:47

마의태자는 과연 삼베옷을 걸치고 금강산으로 갔는가?| 우리들이야기
그린내 | 조회 43 |추천 0 | 2013.06.23. 19:26

마의태자, 과연 삼베옷 입고 금강산으로 갔는가?

 

구한말 일제 통감 히로부미는 고종을 협박하며 양위를 종용하던 중

"신라 경순왕도 국운이 다했음을 알고 왕건에게 나라를 바치지 않았습니

까?" 라며 국가를 양도하는 것이 마치 우리 민족의 전통인 양 희롱한다.

지금 들어도 을분을 토할 일로, 이는 철저히 고려의 입장에서 기록된

<삼국사기>내용에서 비롯 된 바 크다. 그러나 이후에도 일제 강점기 때

쓰여진 이광수의 소설 <마의태자>를 비롯해 영화, 가곡, 대중가요까지

신라 왕족들의 나약한 이미지를 키우는 데 한몫했다.

1930년대 가곡 <마의태자>에 담긴 이은상의 노랫말을 보면 다분히 염세

적이고 패배주의적이다.

 

풍악산 험한 곳에 한 품은 그 자최

지나는 길손마다 눈물을 지우네 -1절

태자성 옛터엔 새들이 지저귀고

거하신 궁들은 터조차 모를노다

슲허라 우리 태자 어데로 가신고

황천강 깊은 물에 뿌리신 눈물만

곱곱이 여울되어 만고에 흐르네 -2절

 

이러한 기록과 분위기는 상당한 세월이 흐르는 동안 그대로 이어져 학창

시절에 배운 마의태자도 '삼베옷 입고 금강산에 들어가 풀뿌리나 뜯어먹

고 살다가 죽은 왕자' 정도였다.

그러나 사실은 이와 다르다. 태봉국 궁예가 죽은 후 37년이 지나 또 한

명의 지존이 자신의 어머니 죽방왕후의 처자, 충신열사들을 이끌고 경주,

충주, 제천, 양평을 거쳐 강원도 깊은 산으로 찾아든다. 그가 신라의 마지

막 태자 김일이다. <삼국사기>는 당시 상황을 '이에 왕(경순왕)이 시랑

김봉휴로 하여금 국서를 가지고 가서 태조(고려)에게 귀부를 청했다.

왕자는 통곡하며 왕을 이별하고 곧 개골산으로 들어가 바위에 의지해 집

을 짓고 마의와 초식으로 일생을 마쳤다'며 담담하게 기술한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2.000여 년 전 박혁거세가 강원도까지 쫒아와 진한의

마지막 왕인 태기왕을 무너뜨리더니, 그로부터 1.000여 년 뒤에는 신라

최후의 태자가 다시 강원도 땅에서 천년 왕업을 마무리하게 된다.

이것이 역사의 윤회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로부터 500여 년이 지나 고려의

마지막 임금인 공양왕 마저 또다시 이곳을 떠돌다가 생을 마감하게 되는

기이한 인연을 맺는다.

 

그러나 정사의 설명과는 달리 오래전부터 마의태자가 당시 강원도로 와서

원주와 횡성 어답산, 홍천 자왕동 등을 지나 설악산 기슭 밑 인제군

에서 '신라소국'을 세우고 대왕으로 옹립된 후 상당 기간 동안 고려에 대

한 항전체제를 구축하고 있었다는 주장이 있다. 실제로 그 일대에는 이를

뒷받침해주는 지명, 유물, 유적 등 갖가지 증거가 수두룩하다.

우선 서울에서 속초 방향으로 가다 한계령을 넘기 전 나오는 인제군 상

남면에는 김부리라는 마을이 있는데 여기서 '김부'는 경순왕의 이름 김부

(金傅)와 음이 동일하다. 다만 이 지명은 경순왕이 아닌 그의 아들 마의

태자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인제군사》를 보면 '이곳은 과거 김부

동, 김보왕촌, 김왕동, 김보리를 거쳐 김부리가 되었는데, 신라 56대 경순

왕의 아들 마의태자가 이곳에 와 머무르며 신라를 재건하고자 김부대왕

이라 칭하고 양병을 꾀했다고 해서 그렇게 불린다. 지금도 김부대왕각이

있어 봄 가을 동제를 지내고 있다고 한다.

 

조속이 그린 '금궤도'

경주 김씨의 시조 김알지는 금궤에서

나와 성을 김(金)으로 총명하고 지혜

로워 이름을 '알지'라고 칭했다(삼국사기)중에서

 

여기서 마의태자가 본래 이름인 김일(金鎰) 대신 김부(金富)로 지칭된 것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엇갈리고 있다. 뜻이 통하는 한자를 차용

해서 쓰는 신라식 '항찰표기법'에 따라 부른 것이라는 해석에 따르면

'鎰'(일)은 '溢'(일)과 음이 같고 '溢'은 '富'자와 '넉넉하다'는 의미로 서

로 통한다는 것이다. 즉 마의태자가 떠난 뒤 마을 주민들은 그를 기리면

서도 고려 조정에는 '반역의 뜻이 없다'라는 메시지를 보냄으로서 후환을

최소화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고려에 항복한 경순왕 이름을 빌려 한자 표

기만 달리했다는 것이다. 일각에서는 경순왕이 고려에 투항하면서도 마의

태자에게는 '신라 부흥에 나서라'라는 밀명을 주었기 때문에 태자가 이를

받든다는 의미로 아버지 이름을 내세웠다는 흥미로운 주장도 있다.

 

한편 마의태자 이름에 얽힌 이야기와는 별개로 당시 상황을 가늠해볼 수 있는

지명들도 많다. 옥새를 숨긴 옥새바위, 태자의 수레가 넘은 행차

고개, 또는 수거너머, 충신 맹장군 일가의 고분군이 있는 맹개골, 지금은

진부령 고개로 불리는 김부령 등이다. 또 갑옷을 입고 진을 친 곳이라는

의미의 갑둔리, 마의태자를 따라온 화랑들이 결의의 표시로 손가락을 잘

랐다는 단지골, 항전하는 병사라는 뜻의 항병골, 맹장군이 인근 양구군에

서 군량미를 징발해 비축했다는 군량리 및 국권 회복과 광복을 의미하는

다물리 등을 접하면 마의태자와 추종자들의 신라 부흥 운동을 간접적으

로나마 엿볼 수 있다. 특히 당시 신라재건 추진세력의 방어진으로 추정되

는 한계산성의 삼신단 비명(碑名)에서 발견된 간지(干支)의 제작년도가

고려 광종 20년(970년)과 21년(971년)으로 판명된 바 있어, 신라 멸망

(935년) 후 최소한 35년 이상 이곳에서는 마의태자가 이끄는 부흥운동이

지속된 것으로 추측된다.

또한 이 지역에는 마의태자를 받들었던 다양한 자취가 남아있다. 김부

리 마을 중앙에 있는 대왕각에는 '신라경순대왕태자김공일지신'(新羅敬順

大王太子金公溢之神)이라는 위패와 철마상 모형이 모셔져 있다.

1987년에는 갑둔리 일원에서 고려 정종 2년(1034년)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5층 석탑과 간지도 발견 되었는데, 여기에는 마의태자의 장수와 가족의 안녕을 기원하는 내용이 있다. 마을 사람들은 수백 년 전부터 매

년 음력 5월 5일과 9월 9일을 맞아 동제를 지내오고 있는데, 제왕에 대한

예로 4배를 하며 제사상에는 마의태자가 좋아했던 미나리와 취떡을 올린

다고 한다.

 

이들 신라 부흥 세력이 인제지역에 주둔한 이후의 행적과 관련해서는

여러 가지 이야기가 내려온다. 결국 이곳에서 고려군에 패해 금강산에서

진지를 재구축했다는 이야기, 마의태자가 당초 알려진 한 명이 아니라 왕

자 김일과 김분 두 명이었고 이들이 각자 설악산과 금강산에 있었다는

이야기, 설악산 일대를 떠난 세력들 대부분이 금강산을 지나쳐 여진으로

이동했다는 이야기 등이다.

이에 대해 육당 최남선은 1927년 금강산 유적들을 둘러보고 쓴 <금강예

찬>에서 '신라 태자의 유적이라는 것이 전설적 감흥을 깊게 하지만 역사

적 진실과는 다르다. 세상만사를 다 끊고 깊은 산골에 들어온 태자라면

성이니 대궐이니 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었겠는가?'라고 반문하며, 금

강산에 있다는 마의태자 유적지는 후대에 조작된 가짜라고 단언한다.

어떤 경우든 마의태자가 단순히 신라 패망에 분기를 누르지 못하고 개

골산에 은둔하다 맥없이 죽었다는 고려 왕조의 설명은 허구라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삼국사기> 등에서 굳이 금강산이라는 아름다운 말

대신 '모든 것이 해골인 죽음의 골짜기'를 의미하는 '개골산'이라는 명칭

을 부각시킨 것도 태자와 그 세력의 종말을 사람들에게 세뇌시키려는 정

치적 의도가 다분하다는 것이다.

 

결국 설악산을 떠난 마의태자 무리가 북쪽으로 진출을 거듭해 만주 일대

에서 여진족을 통합하고, 이 후예들이 급기야 중국 금나라와 청나라를 세

우게 된 대목에 이르면, 그 옛날 마의태자가 간직해왔던 국권 회복 의지가

낳은 역사의 결과에 숙연한 느낌마저 든다. 수년전<KBS역사스페셜>

이 이러한 내용을 매우 심도있게 밝혀내 주목을 받은 적이 있었다.

 

금강산에 있다는 마의태자 능

 

사서를 보니 신라 왕실인 김씨가 수십 세를 이어왔고 금이 신라로부터 온 것은 의심할 바 없다.

금나라 국호 또한 김씨 성을 취한 것이다.<흠정만주원류고>

 

청나라 몰락 과정을 그린 영화 <마지막 황제>로 잘 알려진 청나라 황제들의 성(姓)인

아이신줘러(愛新覺羅)중 '아이신'은 김(金), '줘러'는 족(族)이란 말로 결국 '김씨들'이란

뜻이다.<만주실록>

 

금 나라 시조의 이름은 함보로 고려인(金之始祖緯函普初從高麗來)이라 했는데 이는 경순

왕의 외손자다. <금사/金史>

 

여진의 추장은 신라에서 온 사람이고(女眞酋長乃新羅人) '완안'으로 불렀다. 완안이라 함은 중국말로 왕을

의미하는 것이다. <송막기문>

 

청나라 마지막 황제이자 만주국 초대 황제였던 푸이

이 황제의 이름은 '애신각라부의(愛新覺羅簿儀) 즉 신라

를 사랑하고 깨닫는다'는 뜻은 아닌지...........

 

우리나라에서 마의태자 후손을 칭하는 성씨와 본관은 통천 김씨, 경주 김

씨, 대장군공파와 계림공파, 청풍 김씨, 부안 김씨, 부여 김씨 등 여섯 개인

데, 이들 대부분이 대대로 살아왔던 곳으로 경주 일대가 아닌 현재의 강원

도 통천을 거론하고 있어 당시 마의태자 추종세력들의 행로를 짐작하게

한다. 한편 경순왕은 1.000년 사직을 왕건에게 넘기고 한동안 천추의 한을

품은채 충북 제천 백운면의 이궁에 머무르며 강원도 땅을 가끔씩 방문했는

데, 이때 주로 거처하던 곳이 원주 귀래면이다. 귀한 분이 오셨다는 의미의

귀래(貴來) 는 여기서 유래했다.

또한 그곳 황산사의 타종 때가 되면 귀래면과 제천 백운면 사이에 있는

언덕에 올라 경주 쪽을 바라보면서 사죄의 큰절을 올렸다고 해서 '배재'라

는 이름이 생겼으며, 이따금 월악산 덕주사에 머물고 있던 덕주공주가 올

때면 무던히 기다리지 못하고 배재까지 마중가곤 했다고 한다. 사실 지금도

제천 미륵사가 있는 월악산에는 덕주사와 덕주산성이 있는데 이는 신라의

덕주공주가 머물고 있었다 해서 유래된 사찰 이름이다.

마지막으로 나라를 빼앗긴 후 신라 화랑의 후예답게 고려에 결사 항전하던

끝에 중국 대륙까지 진출을 꾀했던 마의태자를 기리며, 2003년 한 독지가가

인제지역에 세운 노래비의 가사를 음미해 본다.

 

행치령 고개 넘어 백자동 고개 넘어

산새도 오지 않는 깊은 산골 갑둔리

달빛보다 더 푸른 천추의 그 푸른 한

나라를 찾겠노라 그 큰 뜻을 품은 채

어찌 눈을 감으셨나 마의태자 우리 님

하늘이 버리셨나 바람도 스산하다

무덤조차 잃어버린 첩첩산중 김부리

꽃보다 더 붉은 망국의 그 붉은 한

세월아 말을 하라 통한의 그 역사

어찌 눈을 감으셨나 마의태자 우리 님

<마의태자> 정두수 작사, 조영남 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