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3.08.12 03:01 | 수정 : 2013.08.12 10:38
김봉기 정치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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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 3일 김한길 민주당 대표가 청와대에 단독 영수회담을 제안했고 이틀 뒤인 5일 황우여 새누리당 대표가 이를 대통령과 여야 대표가 만나는 ‘3자회담’으로 확대해 청와대와 야당에 역제의했습니다. 그러자, 박 대통령은 6일 김기춘 비서실장을 통해 3자회담에 여야 원내대표까지 참여하는 ‘5자회담’으로 여야에 수정제안했습니다.
그러나 이 5자 회담 제의는 김한길 대표에 의해 곧바로 거부됐습니다. 3자회담으로 진행될 절충 가능성도 아직 남아있지만, 민주당의 공식 입장은 박 대통령과 민주당 대표 간 단독회담 요구입니다. 아직 청와대는 “안타깝다”는 반응 외엔 야당의 단독회담 재요구에 대해 별다른 입장을 내놓고 있지 않습니다. 여권 일각에선 “박 대통령은 여전히 5자 회담을 원한다”는 말도 나옵니다. 그렇다면 왜 박 대통령은 야당 대표와의 단독 영수회담을 선뜻 받아들이지 않는 모습을 보이는 걸까요? 여권(與圈) 인사들의 설명들을 종합해보면 크게 세가지 정도입니다.
김한길 민주당 대표가 5일 오전 서울 서울광장 앞 국민운동본부에서 열린 의원총회에서 모두발언을 하고 있다(왼), 박근혜 대통령 /출처=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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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대통령의 확고한 ‘당권·대권 분리’ 원칙과 관련됐기 때문이란 분석이 가장 많습니다. 박 대통령은 2005년 한나라당 대표 시절 ‘당권·대권 분리’ 원칙을 당의 ‘헌법’인 당헌당규에 받아들여 이를 제대로 정착시킨 주역입니다. 그동안 박 대통령은 이 당권·대권 분리 원칙을 ‘금과옥조’처럼 여겨왔는데, 이번에 야당이 요구하는 성격의 단독회담은 여기에 어긋날 수 있다는 겁니다.
‘당권·대권 분리’ 원칙은 크게 두 가지로 이뤄져 있습니다. 첫째는 당권을 가진 인사가 당 대선후보 경선 등 대권 도전을 할 경우 유리한 지위를 점할 수 없도록 경선 1년6개월 전에 당직에서 물러나야 한다는 겁니다. 당시 2007년 대선경선에 출마할 생각이 있었던 박 대통령은 이를 지키기 위해 자기한테 보장된 당 대표 임기보다 약 2개월 정도 빨리 물러났습니다.
둘째는 대권을 가진 인사, 그러니까 대통령이 당을 좌지우지 할 수 없도록 대통령이 되면 명예직을 제외한 당직을 못 갖도록 한 겁니다. 바로 이 점이 이번 야당의 단독회담 요구 문제와 부딪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청와대 핵심 관계자는 “과거 제왕적 대통령 시절에는 대통령이 당 총재를 겸했던 만큼 여당의 권한에 있는 문제까지도 대통령이 야당 대표와 직접 담판 짓는 게 가능했지만, 지금의 대통령은 새누리당의 일개 평당원인 상황”이라며 “이런 상황에서 야당이 원하는 내용들을 제대로 회담에서 다루려면 야당의 ‘카운터 파트’인 여당 대표와 원내대표도 함께 회담에 참여해야 가능하다”고 했습니다.
평당원 신분인 대통령이 국회과 관련된 사안에 대해 야당과 함부로 합의를 할 수 없고, 설사 한다고 해도 이를 여당 지도부에 그대로 지키라고 지시하는 건 당·청 관계에 맞지 않는다는 겁니다.
한 친박계 핵심 인사는 “만약 박 대통령이 국정운영과 관련해 국회에서의 야당 협조를 구하는 사안이었다면 얼마든지 야당 대표와의 단독 회담을 고민없이 바로 진행했을 것”이라며 “하지만 이번엔 야당이 ‘정국 현안 문제와 관련해 여당과 잘 얘기가 안되니 대통령과 직접 담판짓겠다’는 식 아니냐. 그러니 대통령도 함부로 할 수 없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②사진찍기용 행사에 대한 거부감
이의 연장선상에서 자신의 권한 밖 사안들을 갖고 회담을 진행한다면 결과물이 없는 ‘사진찍기용’ 행사에 그칠 수 있는 만큼 단독회담을 받지 못한다는 관측도 나옵니다. 박 대통령은 의원 시절부터 ‘보여주기’식 행사에 남다른 거부감을 보여왔습니다. 박 대통령이 2007년 7월 이명박 당시 후보와 치열한 대선후보 경선을 치루는 과정에서 고 장준하 선생의 부인인 김희숙 여사를 찾아갔을 때가 대표적입니다.
선친이었던 박정희 대통령 시절 민주화 운동을 하다가 ‘의문사(疑問死)’를 당한 장 선생의 유족을 방문하는 것인 만큼, 당초 박근혜 후보 캠프에선 이를 대대적으로 홍보하고자 했습니다. 좋은 국민여론을 이끌어낼 수 있는 선전전이 될 것으로 본 겁니다. 그럼에도 박 대통령은 당시 “언론사 카메라들을 대거 대동하고 간다면 그 분들이 내가 진정성이 있다고 보겠느냐. 알리지 말라”고 지시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캠프 실무진에선 ‘이 만남을 홍보하지 않는 건 너무 아깝다’고 판단, TV·신문·인터넷 언론 각 1곳만 ‘풀 기자’로 부르는 방법을 사용했습니다. 박 대통령은 당시 현장에서 ‘풀 기자단’이 온 것을 보고 실무진들을 나무란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이명박 정부 때도 박 대통령은 확실한 의제 조율이 되지 않은 상태에선 이명박 대통령과 회담을 갖는 데 대해 부정적이었습니다. 일각에선 “일단 두 사람이 만난다는 것 자체가 협력 관계임을 보여주는 것 아니냐”라는 주장이 나왔지만, 박 대통령의 측근들은 “결국 만나서 밥만 먹고 사진이나 찍을 순 없다”고 반대했습니다. 박 대통령의 의중을 측근들이 대신 말한 겁니다.
③야당 내부 사정을 너무 잘 알기 때문?
마지막으로 박 대통령이 야당의 내부 사정을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단독 회담을 원치 않는다는 분석도 나옵니다. 야당 지도부가 계속 친노(親盧) 진영에 의해 흔들리고 있는데, 굳이 당을 완전히 장악하지 못한 김한길 대표를 단독으로 만날 이유가 있겠느냐는 겁니다.
새누리당의 핵심 인사는 “현실적으로 김한길 대표가 무척 노력하고 있지만, 당을 온전히 다 이끌지 못한 채 강경파인 친노 진영에게 계속 끌려다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지 않느냐”라며 “김 대표와 회담을 진행해 설사 결과물이 나온다고 해도 나중에 친노 세력이 ‘그 결과를 받아들이지 못하겠다’고 반발하면 회담 자체가 헛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박 대통령이 당 대표 뿐만 아니라 국회 현안을 총괄하는 원내대표까지도 함께 나와달라는 것아니겠느냐”라고 말했습니다.
또다른 여당 관계자는 “그동안 야당 지도부는 여야 간 합의를 해도 의원총회에서 강경파들이 거세게 반발하면 ‘도저히 이대로는 안되겠다. 다시 협상하자’고 말하는 모습을 여당한테 여러차례 보이지 않았느냐”고 설명합니다.
황우여 새누리당 대표가 7일 오전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 당사에서 열린 최고중진연석회의에서 모두 발언을 하고 있다.(위) 김한길 민주당 대표가 7일 오전 경기도 광명시 광명2동 주민센터에서 열린 현장 최고위원회의에서 모두발언을 하고 있다./사진=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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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야 모두 서로 과거에 똑같은 요구와 거절 반복‘자가당착’이란 비판 나와
하지만 정치권에선 단독회담을 꺼려하는 박 대통령이나 유독 단독회담만 요구하는 야당 모두를 꼬집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습니다. 이 문제에 대해선 서로 정반대의 입장을 취한 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박 대통령은 한나라당 대표였던 2005년 1월 당시 노무현 대통령에게 제1야당 대표으로서 단독회담을 요구했었습니다. 박 대통령은 당시 신년 기자회견에서 “민생 파탄 비상사태를 맞아 국정 방향의 일대 전환을 위해서”라며 1대1 회담을 제안한 겁니다. 이에 당시 청와대에선 “정치적 사안은 국회에서 여야 대화로 풀어갈 일”이라며 부정적이었습니다. 실제 이때는 영수회담이 이뤄지지 못했습니다.
앞서 박 대통령은 2004년 당시 수도 이전 문제로 정국이 시끄러웠을 때도 “(노무현 대통령으로부터) 영수회담 제안이 오면 수용하겠다”며 우회적으로 대통령과의 회동을 제안한 적이 있었습니다.
이에 대해 김한길 민주당 대표는 이달 10일 과거 박 대통령이 야당 대표때 영수회담을 제안했던 일을 언급하면서 “자신이 야당 대표 시절 대통령과 둘이서 만나는 건 원칙이고 대통령 되고 나서는 야당 대표와 단독회담을 안 하는 게 원칙이라고 한다”며 “세상에 도대체 이런 말도 안되는 원칙이 어디 있느냐”고 비판했습니다.
그러나 김한길 대표도 이런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김 대표는 2006년 8월 열린우리당 원내대표 시절 강재섭 당시 한나라당 대표가 “전시작전권 전환 문제를 논의하자”며 노무현 대통령과의 ‘영수회담’을 제안했을 때, “대통령이 제왕적 총재를 겸하고 있던 시절이라면 모르지만 지금은 당원일 뿐인데…야당 대표의 맞상대가 대통령이라면 여당 대표는 누구와 상대해야 맞겠냐”라고 했었습니다.
정치권 안팎에서 “양측 모두 ‘자가당착’에 빠진 것”이라는 비판이 이어지는 것은 바로 전력(前歷)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