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3.08.16 21:30 | 수정 : 2013.08.16 22:40
무슨 돛 다느냐에 나라의 전진 후퇴 갈릴 고비
대통령이 공약 굴레 벗도록 마음 부담 덜어줘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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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천석 주필
경제 통계의 몇몇 숫자가 기지개를 켰다는데도 주머니가 윤택해졌다는 사람은 만나기 힘들다. 그 마당에 정부가 세금 감면 범위를 축소해 내년 4300억원의 세금을 더 걷겠다는 세제 개편안을 내놨으니 너나없이 발끈할 만하다. 20만~30만원 정도 세금이 늘어난다는 월급쟁이들은 걸핏하면 왜 유리지갑만 터느냐고 툴툴댔다. '이번 세제 개편안이 거위에게 고통을 주지 않고 털을 뽑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국민을 거위에 빗댄 청와대 참모는 흠씬 두들겨 맞았다. 세제 개편안을 반긴 건 오히려 삼복(三伏)더위 거리 투쟁에 숨을 헉헉 내쉬던 민주당이었다. 물먹은 심지처럼 불이 붙지 않던 거리 투쟁에 정부가 새 연료 탱크를 달아준 걸로 받아들인 것이다.
그러나 대통령 말씀 한마디에 사태는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굴러갔다. 중산층의 살림이 조금이라도 펴지도록 하겠다는 정부 뜻과 어긋나니 새로 만들어보라는 말씀이다. 대통령 경제 참모들은 '공약 실천 재원을 마련하라'는 지난번 지시를 받들던 때보다 더 민첩하게 움직였다. 바로 다음 날 국민 부담을 덜어주는 벼락치기 보완책을 내놨다. 그러자 이번에는 거꾸로 국민이 당황하기 시작했다. 복지 공약 실천에 필요한 80조원을 어디서 마련하겠느냐는 걱정이다.
복지 공약 이외의 약속까지 지키려면 모두 135조원이 들어간다. 복지 한 분야만을 위해서 새로 조달해야 할 돈이 2014년 9조6000억원, 2015년 18조5000억원, 2016년 22조3000억원, 2017년 24조6000억원이다. 하룻밤에 수조원이 들고 났으니 집 사고 팔 때 말고는 1000만원 넘는 숫자를 접한 적이 드문 국민이 까무러치지 않는 게 신기한 일이다.
마술사(魔術師)는 뿌리 없는 꽃이 꽃망울을 터뜨리는 모습을 보여줘 박수를 받는다. 탁자를 두른 가림막이 들춰져 마술이 속임수라는 사실이 드러나도 비난받는 일이 없다. 정치는 다르다. 정치가와 국민 사이의 신뢰가 눈사태 나듯 허물어진다. 대통령은 망설이고 고민할 것이다.
경제를 모르는 국민도 복지 혜택을 두 배 누리면 세금도 두 배 따라 오르리라는 것 정도는 짐작한다. 80조원 상당의 새 복지 혜택이 증세(增稅) 없이 가능하다고 믿을 사람은 없다. 심술궂은 사람일수록 선거 때 대통령 약속을 곧이곧대로 믿는 척하고 있다. 여당보다 더 거창한 공약을 내걸었던 민주당이 대통령 공약을 철석같이 믿었던 양 시치미를 떼고 있는 걸 봐도 그렇다.
여유 부리고 시치미 뗄 때가 따로 있다. 대통령과 국민이 함께 공약의 굴레를 벗어야 한다. 대통령이 먼저 행동하고 국민은 그런 대통령의 심리적 부담과 압박을 덜어줘야 한다. 까딱하단 나라 앞날을 그르칠 판이다.
복지는 하면 좋고 안 해도 그만인 문제가 아니다. 적정(適正) 복지의 희망이 멀어지면 나라가 소란스러워지고 심하면 기우뚱할 수 있다. 핵심은 무엇이 가장 시급하고 중대한 문제인가를 먼저 정확히 골라내고, 그걸 해결하는 데 드는 비용을 누가 더 부담하고 누가 덜 부담할 것인가를 공평하게 정하는 일이다. 백화점식(百貨店式) 복지 처방은 잠시 증상 악화를 늦춰줄진 모르지만 얼마 안 가 수습하기 힘든 대형 폭발을 불러온다.
다 제쳐놓고 노령화와 출산율 감소 문제 하나만 들여다봐도 금방 사정이 분명해진다. 우리는 초고령(超高齡) 사회를 향해 초고속(超高速)으로 달려가고 있다. 일본이 보유했던 세계 기록을 깨뜨렸다. 아이가 태어나는 비율은 세계 최저 수준이다. 두 현상이 맞물리면 경제활동 인구가 줄고, 총인구가 줄고, 경제가 축소되고, 세금이 들어오지 않는다. 반면에 국민연금에 기대야 하는 65세 이상 노인 숫자는 15년마다 2배로 는다. 65세 이상 노인을 부양하는 데 드는 비용은 15세 이하 어린이를 거두는 비용의 3배 가깝다고 한다.
고령화와 출산율 감소의 방아쇠는 이미 10년 20년 전에 당겨졌고 총알은 벌써 튀어나갔다. 이제 와서 무슨 정책을 쓴다 해서 고령화와 출산율 감소의 바퀴를 단시간에 거꾸로 되돌릴 순 없다. 출산장려금과 보육비 지원 정책으론 어림도 없다. 노령화·출산율 저하·인구 감소라는 비상(非常) 활주로에 동체(胴體)착륙하는 불상사를 피하는 데만도 거미줄 치듯 한 촘촘한 대책과 어마어마한 예산이 필요하다.
대통령이 시대의 바람을 바꿀 순 없다. 그러나 대통령이 무슨 돛을 다느냐에 따라 나라가 앞으로 나갈 수도 있고, 제자리를 빙빙 돌 수도 있다. 돛의 선택은 선장의 권한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다음 보선, 다음 지방 선거를 바라보는 '꽃 심는 복지'에서 10년 앞, 20년 앞을 내다보는 '나무 심는 복지'로 전환해야 한다. 아버지가 40년 전에 심은 나무가 자라 만든 푸름과 그 사이를 흐르는 시냇물 덕분에 여간 해선 지지도가 마르지 않는다는 대통령이다. 그 대통령을 향해 '꽃 심는 정치' 와 '나무 심는 정치'의 차이를 왈가왈부(曰可曰否)하는 건 실례(失禮)일 터이다.